발운견일拔雲見日
시원한 바람이 해를 가리던 두꺼운 구름을 슬며시 밀었다.
고집스럽게 해를 가리고 세상에 그늘을 만들던 구름은 끝까지 버티려 했으나, 결국엔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구름이 비키자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찬란한 해가 세상을 밝게 비췄다.
[안으로 들어오시오.]
구후영은 귀연과 원융 그리고 막불손에게 차례로 똑같은 내용의 전음을 보냈다.
귀연이야 무인조차 아니어서 강호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에 괜찮지만, 봉문한 소림에서 나온 원융과 종남칠검의 수좌로 유명한 막불손은 정체를 가릴 필요가 있었다.
"무슨 일이오?"
감옥에 도착하기 바쁘게 막불손이 질문했다.
그간 수양이 깊어지며 경지도 높아지고 기운도 부드럽게 변했지만, 배후와 관련한 일만 되면 예전의 혈기가 다시 튀어나오는 막불손이었다.
"이 안에 중요한 단서가 있는 듯하오. 대사는 기관에 일가견이 있다고 들었고 진인은 진법에 조예가 깊은 거로 아오. 여기 귀연을 도와 벽 뒤의 밀실로 들어갈 방법을 찾으시오."
청의방주의 경솔함으로 문제가 생길 뻔했던 기억이 있기에 구후영은 무조건 조심하자는 마음이었다.
"좋소."
원융과 막불손은 내공을 뽑아 벽 내부를 탐지하고, 내공을 아예 익히지 않은 귀연은 모산파에서 전해지는 온갖 도구를 꺼내 벽을 문지르고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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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반 시진 뒤.
밖으로 나온 구후영이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감옥에 갇혔던 사람은 당분간 우리가 데리고 있어야겠소. 이 일은 사제가 맡으시오."
장선의 제자인 최종필을 구후영은 사제라고 불렀다.
"그간 청소한 산채와 수채가 한둘이 아니니, 개중 괜찮은 곳으로 모시시오."
"내게 맡기시오."
최종필이 자기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이번 칠살문 몸통을 잡은 일에 최종필의 역할이 최소 삼 할이라 기세가 등등한 모습이었다.
"문서들은 예전에 하던 대로 낙화표국에 맡겨 각자 합당한 곳으로 보내시오. 이 일은 두 분이 맡아주시오."
강서 흑호방 방주와 안휘 철기방 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칠살문에 친인을 잃고 복수의 칼날을 갈던 사람들이었다.
눈에 불을 켜고 칠살문의 정체를 들추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구후영 등과 부딪히게 됐고, 자주 부딪히다 보니 대화하게 되었고,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 후 확고한 동맹으로 거듭났다.
"흔적 지우는 일은 세 분께 맡기겠소."
삼룡방이란 꽤 유치한 이름의 방파는 흔적을 찾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특이한 자들의 모임이다.
공교롭게 세 명의 방주 이름에 모두 용자가 들어가서 삼룡방이라고 지었는데, 개중 한 명이 흑호방 방주와 사촌지간이다.
이들은 흑호방 방주의 소개로 구후영과 알게 되었고, 막대한 의뢰비의 유혹에 못 이겨 발을 한 번 담갔다가 이젠 목까지 푹 잠기고 말았다.
"믿고 맡기시오."
처음엔 그저 돈이 좋아 시작한 일이었지만, 상대하다 보니 칠살문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된 셋이었다. 이제 와서 발을 뺀다고 자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된 이들은 흑호방이나 칠기방 방주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다른 게 아니고 최소한 자신들의 흔적만큼은 확실히 지우기 위해서.
구후영이 지시를 마치고 돌아서자 두 방주는 문서를 나무 상자에 나눠 담기 시작했고 삼룡방의 세 방주는 지하 건물로 흔적 지우러 갔다.
최종필은 자신을 도울 사람 몇 명을 차출해 감옥에서 구출한 사람들을 이끌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신의. 나한테 침놔준다고 하지 않았소?"
그만 잊고 있던 안물의 애처로운 부름이 귀에 울렸지만, 구후영은 애써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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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옥이 수상하지 않아?"
구후영의 말에 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벽 너머에 밀실이 있는 건 이미 확인했다. 그러나 벽은 물론이고 천장이나 바닥에도 밀실로 향하는 방법이 없었다.
"밀실로 통하는 문이 안에 있다면 굳이 죄수를 가둘 필요가 없지. 괜히 드나들 때마다 죄수들 눈치를 봐야 하니까. 굳이 그런 귀찮음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맞아요. 괜히 뱀한테 발을 그려주는 느낌이죠."
"그러나 모든 존재하는 것엔 반드시 합당한 이유가 있어. 합당한 이유가 사라지면 존재도 사라지고 말거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합리적이다. 아무리 불합리하게 보이더라도.
"형님!"
현기가 충만한 말에 귀연이 잔뜩 감동한 얼굴이 되었다.
"자. 그럼 우리 추론해보자. 사실 위종이 알려주기 전에 우리 누구도 감옥 안에서 밀실을 찾을 생각을 하지 못했어."
"합리적인 사고방식이죠."
"그래. 합리적이었지. 그런데 합리적이지 않게 결국 감옥 안에 밀실이 있었어. 그럼 이러한 불합리함을 해소할 만큼의 더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단 말이지. 그게 뭘까?"
귀연이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저기 복도 보이지?"
철문을 열면 옥지기들이 있음 직한 방이 하나 있고, 방 끝에 사람 어깨보다 조금 넓은 좁은 복도가 하나 있다. 그 복도를 통해 서른 걸음 정도 걸으면 바로 감옥이다.
"복도에 문을 숨겼을까요?"
"아니지. 복도로 문을 숨겼겠지."
구후영의 말에 귀연의 눈이 반짝 빛났다.
"문 열고 들어온 방에 문이 있는 거군요!"
밀실은 감옥 가장 안쪽에 있다. 그러나 밀실로 가는 문은 철문을 열고 들어오면 제일 처음 만나는 방에 있다.
이게 구후영의 추론이었다.
죄수들은 좁고 긴 복도 때문에 방에서 누가 뭘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지. 그러니까 이제 네가 재주를 부릴 차례다."
귀연이 흥분한 얼굴로 달려갔고, 곁에서 가만히 듣던 막불손과 원융도 감탄한 얼굴로 귀연의 뒤를 따라 암문暗門의 존재를 찾으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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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는 것과 반드시 있다는 확신을 품는 것엔 큰 차이가 있다.
구후영의 말에 확신을 품은 셋은 꼬박 한 시진의 시간을 허무하게 퍼붓고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엔 어렵게 어렵게 칠살문이 공들여 숨긴 암문을 찾아냈다.
사고의 허를 찌르면서 어렵게 숨긴 암문 안쪽은 당연히 진법과 기관으로 떡칠돼 있었다.
구후영은 귀연 등에게 진법과 기관의 해체를 맡기고 휴식을 취했다. 높은 경지와 막대한 내공으로 버틸 만하지만, 열흘 넘게 못 잔 탓에 집중력이 평소 같지 않았다.
"형님!"
귀연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얕은 잠에 빠진 구후영을 크게 불렀다.
구후영은 양손을 비벼 마른세수해 느슨해진 정신을 깨웠다.
"끝났어요."
진법의 해체란 그런 것이다. 이게 무슨 진법인지 모르면 바깥부터 하나하나 천천히 해체하면서 살얼음판 걷듯이 해야 하나, 진법의 요체를 파악하는 순간 작은 조치 몇 개로 진법을 무력화할 수 있다.
처음 보는 진법이고 여러 가짜 진법 뒤에 숨은 놈이었지만, 귀연은 타고난 재능으로 어느 순간 진법의 핵심을 잡아내 단숨에 해결했다.
"기관은?"
"기관도 다 해체했습니다."
진법과 달리 기관은 아무리 복잡한 듯해도 결국엔 단순함의 조합일 뿐이다.
기관이 대단해 보이는 건 인간이 절대 낼 수 없는 힘의 방출과 그러한 힘의 방향 전환 때문이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진법의 핵심도 꿰뚫어 본 귀연이기에 상대적으로 단순한 기관을 해체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일단 다들 밖에서 기다리시오."
구후영이 뭔가 잘못 건드려서 감옥이 갑자기 무너지기라도 하면 누군가는 죽고 다칠지도 모른다. 구후영은 어떤 순간에도 한 몸 지킬 자신이 있었기에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을 자처했다.
그러나 구후영의 기우가 무색하게 아무런 위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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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후영이 한 광주리는 될 법한 문서를 들고나오자 사람들은 한숨부터 쉬었다.
칠살문의 자객들은 상상력이 빈약한 사람은 매번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다양한 살인 기술로 일행을 괴롭혔다.
그러나 일행은 암호문으로 변형한 문서와 씨름하는 것보다 차라리 수백 명 칠살문 자객과 혼자 맞서는 게 더 편했다.
"잠시 생각할 게 있으니 일단 여러분이 고생하시오."
평소 솔선수범하던 것과 달리 구후영은 문서의 해독을 사람들한테 맡긴 다음 조용한 곳을 찾아 고민에 잠겼다.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가장 위에 있는 최근의 것으로 보이는 문서를 무심코 펼쳤는데, 해독을 시도하던 과정에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구후영이 문서를 잘못 해독한 게 아니라면 칠살문의 문주, 그러니까 호 선생으로 불리는 자가 황궁에 있었다. 그것도 황제와 가장 가까운 환관 중 하나를 행세하고 있었다.
바로 문서들을 챙겨 나오느라 그게 구체적으로 누군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지만, 장인태감 공현과 몇 명의 승필태감 중 하나일 게 뻔하다.
굳이 따지자면 동창의 창주와 장인태감이 가장 의심스럽고.
'공현이 호 선생이라면 배후가 따로 있다는 뜻이다.'
배후는 원경과 대결한 적이 있고, 한 선생의 신분으로 소림을 암중에서 조종한 적 있다. 쭉 황궁에서 지내며 황후와 태자를 보필한 공현이 호 선생이면서 배후일 수는 없다.
'겨우 찾아냈다고 생각했는데.'
안물은 배후와 확실히 연관이 있는 인물이다. 배후는 안물을 협박해 구후영 일행을 종남으로 보냈다.
그런 안물이 감옥에서 나온 순간, 칠살문과 배후의 연관성은 확실해진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현재 드러난 종종의 단서는 칠살문이 배후가 아닌지도 모른다는 낌새를 풍기고 있다.
이는 칠살문이 배후일 가능성을 구 할 이상 점치던 구후영에겐 작지 않은 타격이었다.
'아직도 얼마나 더 죽여야 하는 걸까?'
극악무도한 산적과 수적만 해도 최소 수백 명은 죽였다. 칠살문의 자객도 이백 명은 넘게 죽인 듯했다.
그 외에도 악행을 일삼는 무도한 자를 벌하는 과정에 거둔 목숨이 한둘이 아니다.
다시 선택의 기회를 줘도 똑같이 할 테지만, 그렇다고 사람 죽이는 일이 즐겁거나 아무렇지 않은 건 절대 아니었다.
다행히.
구후영이 가련해 보였는지 하늘이 한 줄기 서광을 내렸다.
"맹주, 빨리 와보시오."
흥분 가득한 목소리에 구후영의 신형이 사라졌다가 순식간에 수십 장 밖에 나타났다.
여전히 원경이 선보인 금강부동의 경지에 살짝 못 미치지만, 천마가 봤으면 신검과 구후영 중에 누가 경공 제일인지 고민에 잠기게 할 만한 대단한 수준이었다.
"여기, 이거 화산의 일 아니오?"
암호문의 해석은 힘들고 지겨운 일이다. 말도 안 되는 문장을 현월궁이 알아낸 열 개가 넘은 암호문에 대조해서 다음 문장을 드러내게 하고, 드러낸 문장을 다른 암호문으로 또 변형하고.
그렇게 열 번이나 변형했는데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가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확한 해석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다행히 위종의 도움으로 어떤 암호문을 적용할지 알려주는 문구를 알아냈고, 덕분에 예전에 보름씩 걸렸던 암호문을 순식간에 풀어냈다.
"이건 소림의 것으로 보이오."
원융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문서 하나를 가리켰다.
안엔 한 선생이 소림을 어떻게 구슬리고 협박했는지 자세히 적혀 있었는데, 소림 대표로 온 원융은 부끄러움에 쥐구멍에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원융과 달리 칠살문이 곧 배후라는 증거에 구후영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 작가의말
발운견일 - 구름을 치우자 해가 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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