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매망량魑魅魍魎
옛사람은 세상에 무지하여 자신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보면 그걸 도깨비나 요괴 혹은 요정의 짓으로 전가했다.
그 탓에 이매망량을 비롯해 온갖 기괴한 존재가 생겼는데, 모두 상상의 산물일 뿐이었다.
그러나 유근은 이매망량이 분명히 있다고 확신했다.
"밤새 아무도 출입하지 않았지?"
흑갑호위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근은 믿었다.
본인이 한 말조차 온전히 믿을 수 없지만, 흑갑호위가 한 말은 믿어도 된다.
"우문 천호. 밤새 지켜본 거 맞소?"
우문강현이 한결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근은 믿었다.
우문강현처럼 유능한 자는 자신의 실수를 감추지 않는다. 솔직히 얘기하고 더 나은 결과를 도모하는 게 훨씬 나음을 알 정도로 현명하니까.
"다들 나가시오. 난 잠시 생각해야겠소."
양손을 뒤로 묶인 모용용이 버둥거리며 일어나 동굴 밖으로 나갔다. 금의위들이 뒤를 따랐고 우문강호가 가장 마지막에 떠났다.
혼자 남은 유근은 양손으로 입을 꽉 막은 채 고통스럽게 울었다.
너무 무서웠다.
반쯤 툭 튀어나온 용 환관의 눈이 자신을 쏘아보는 것 같고, 용 환관의 목에 새겨진 교흔絞痕이 산 뱀처럼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의심해서 미안하다.'
이는 이매망량의 짓이 분명했다. 자신이 불경하게도 용 환관의 짓이라고 의심하자, 노여움을 참지 못한 이매망량이 용 환관을 죽여 자신에게 경고한 거다.
'이매망량이시여. 도대체 내게 뭘 원하는 겁니까?'
한참 운 유근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과 콧물을 깨끗이 닦았다.
'돌아가는 대로 큰 사당을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낼 테니, 꿈에 현신해주십시오.'
진심을 담아 속으로 빈 유근이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유근이 나오기 무섭게 아무도 없는 허공에 소리가 울렸다.
"유근 네 이놈. 네 죄를 알렸다."
이매망량에게 사당을 짓겠다고 했는데도 죄를 묻는 소리가 들리자 유근은 놀란 나머지 딸꾹질이 올라왔다.
"정덕 이년. 너는 날조된 거짓으로 이부상서 한문韓文을 파직하고 유건과 사천을 두둔하는 급사중 여충 등 여섯에게 태형을 내렸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시작된 소리는 유근이 자신을 탄핵하려던 한문과 유건을 삭관파직하고 그에 반대하는 자들을 중죄로 다스렸으며 자신에게 아부하는 자들의 관직을 함부로 올려준 죄를 낱낱이 읊었다.
일부는 유근도 잊고 지내던 사실이라 딸꾹질이 점점 심해졌다.
"정덕 삼년. 너는 누군가가 익명으로 자신을 성토했다는 사실만으로 문무백관을 봉천문 앞에 무릎 꿇리고 신문했고, 오품 이하의 관리를 감옥에 가뒀다. 개중 하전, 주신, 육신은 옥중에서 병으로 죽었다."
유근을 성토한 익명신을 작성한 게 환관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뒤늦게 관리들을 석방했으나, 몸이 허약한 문관 셋이 더위로 옥중에서 사망했다.
그럼에도 유근은 아무런 벌도 받지 않았다.
"국경을 지키는 장수가 잘못해도 뇌물만 바치면 죄를 묻지 않았고, 뇌물을 바치지 않는 강직한 자는 없는 죄를 만들어서라도 자리에서 쫓아냈다."
미처 내지 못한 세금을 채우기 위해 죽은 현령의 손녀를 팔아버린 일, 이미 사라진 연좌제를 적용해 강북의 사람이 지은 죄로 강남의 사람들까지 감옥에 집어넣은 일, 국고의 은자로 순천부에서 고리대를 놓은 일, 자신이 시킨 일을 제대로 못 한 자들을 핍박해 자살케 하거나 관직을 박탈한 일.
듣는 유근 본인조차 자신이 백번 죽어 마땅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게 다, 폐하를 위해, 내 충성심이."
딸꾹질 때문에 유근의 변명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으나 때맞춰 허공에 울리던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만 출발하지."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한 일행이다. 그러나 갑자기 울린 육합전성의 대단한 재주에 식욕이 사라졌다.
이들은 미처 먹지 못한 건량을 손수건에 소중히 싸서 품에 넣은 다음 물배만 채우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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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 일행이 쉬거나, 밥을 먹으려 하거나, 잠자려 할 때마다 허공에 목소리가 울렸다.
제일 처음 울릴 땐 큰 죄만 밝혔다면, 이젠 유근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한 소소한 죄들을 세세히 늘어놓았다.
물론, 유근이 지은 죄 중에서 소소할 뿐 다른 사람이었으면 한두 개만으로도 곤장을 맞고 감옥에 갇힐 정도로 심각한 죄질이었다.
그 탓에 유근은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밥이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았으며 느리게 걸을지언정 잠시도 쉴 엄두를 못 냈고.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리고, 무리의 숫자도 꾸준히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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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입니다."
단아의 말에 장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대로 죽이기엔 너무 아깝지."
살인불여주심殺人不如誅心.
죄지은 자를 그저 죽이는 것보다 죄명을 낱낱이 공개해 망신을 주는 게 훨씬 나은 처벌이란 말로, 목숨을 거두거나 몸에 고통을 가하는 것보다 마음을 괴롭히는 게 훨씬 가혹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물론, 단아는 단지 유근을 더 오래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었다.
"흑갑호위는 아직 지치지 않았습니다. 복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아무도 다치지 않는 겁니다."
흑갑호위는 어려서부터 황제와 황태자에 대한 충성심을 주입받을 뿐만 아니라 약물로 신체를 개조한다.
그러니 강호의 기준으로 고작 일류의 경지임에도 무거운 흑갑을 착용하고 편하게 움직이는 거고, 고된 상황에서도 전혀 지치지 않았다.
"흑갑호위가 얼마나 강한지 한 번 두드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소."
구후영이 말했다.
"어차피 흑갑호위를 꼭 없애야 하는 것도 아니잖소. 몰래 다가가 암기를 뿌리면 유근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소."
그에 단아와 장선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좀 더 괴롭히고 죽이자."
장선의 말에 단아가 호응했다.
"사람 손에 죽으면 오히려 억울하다고 생각할 파렴치한 놈입니다. 차라리 천벌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면 자기 죄를 조금이라도 뉘우칠지 모르죠."
세상에 양심이 없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유근 정도로 없는 사람은 드물다.
단아는 유근이 양심이 없다기보단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앞세워 그러한 양심의 가책을 교묘하게 피해 갔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누군가의 손에 죽는다고 여기는 것보다 천벌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하는 게 제대로 벌주는 거다.
"난 찬성."
장선은 이제 단아가 '해가 서쪽에서 떴네요.' 해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야효는 원래부터 그랬고, 양달도 단아가 시키는 일은 고민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구후영의 주장은 순식간에 무산됐다.
'동생 이거 평생 잡혀 살겠는데.'
원경은 교우 관계가 상당히 좁다.
어느 정도 깊이 있게 사귄 사람은 옥무영과 구후영밖에 없는데, 둘 다 원경이 진심으로 감탄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단아를 보니 마치 구후영과 옥무영을 합친 것 같은 대단한 여인이라, 동생의 향후에 대한 걱정이 슬슬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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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 일행은 천신만고 끝에 대백산에 도착했다.
"이 큰 산에서 고분을 찾아야 한단 말이오?"
대백산에만 도착하면 끝인 줄 알았던 유근이 막막한 어조로 말했다.
높은 자리에서 손가락으로 사람을 부려 먹던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인데, 그저 시키기만 하다가 직접 실무에 나서면 모든 게 어렵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더구나 현재는 실제 어려운 일이 맞는다. 일행은 고작 다섯인데 흩어지지도 못하고, 대백산은 눈에 들어오는 것만 해도 옹기종기한 봉우리가 수십 개는 되었다.
"유 태감. 우문가도 선비의 한 갈래입니다."
다행히 우문강현이 유근의 갑갑함을 한 번에 날렸다.
"저도 직접 와본 적은 없지만, 찾아가는 길은 들어서 잘 압니다."
유근의 얼굴에 졌던 주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우문 천호의 공은 잊지 않고 폐하께 주상하겠소."
우문강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섰다.
그에 모용용은 마음이 복잡했다.
'모용연이 고분을 찾았을까?'
모용용의 계획은 몹시나 대담했다.
배후가 유근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갖고 놀 정도라는 가정 아래 짠 계획으로, 모용용 자신도 처음 듣는 불로장생의 비법이 대백산에 있다고 했다.
다행히 모용용의 바람대로 소마귀 역시 대백산을 언급해 장단을 맞췄다.
가장 어려운 첫 조각을 제대로 끼웠다.
여기서 모용용은 유근이 대백산까지 살아서 갈 가능성이 적다고 여겼다. 비록 명의 신하를 자처하는 부족이 적지 않지만, 진심으로 명에 복속한 부족은 하나도 없다.
이들이 갑자기 나타난 금의위를 곱게 놔두지 않을 건 분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흑갑호위의 대단함을 직접 목격했기에 만일의 경우도 대비해야 했고, 대책으로 모용연을 미리 대백산에 가서 기다리게 했다.
배후의 음모가 완성되기 위해선 불로장생의 비법을 그럴듯하게 꾸며 고분의 어딘가에 숨겨야 할 텐데, 모용연이 그걸 가로채면 유근은 물론이고 배후의 음모에도 차질을 줄 수 있다.
거기에 모용용이 직접 황궁에 가서 불로장생의 비법을 바칠 수 있다면 최고의 결과다. 무너진 모용세가를 당장 재건하는 일은 불가하겠지만, 불씨라도 이어갈 수 있는 게 어딘가.
물론, 최고의 결과를 얻기 위해선 선결돼야 하는 조건이 너무 많았다.
배후가 모용용의 생각대로 움직여야 하고, 모용연이 배후가 숨긴 책자를 찾아내야 하고, 유근이 죽는 동시에 모용용 자신은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
게다가 모용연이 모용용을 신임해야 한다.
사실 모용용은 지금도 모용연을 믿지 못했다. 최고의 결과를 위해서 억지로 믿으려 노력할 뿐이다.
그리고 현재 변수가 하나 더 늘었다.
동굴을 찾은 그날, 두 명의 흑갑호위가 동굴 어구를 지킨다는 생각에 모두 숙면에 푹 빠졌다.
모용용 역시 그랬으나, 밤중에 갑자기 깼다.
다른 사람이 모두 곤히 자는 걸 확인한 모용용은 몰래 숨겼던 날카로운 돌에 손목을 묶은 밧줄을 비벼 끊었고, 곤히 자는 소마귀를 목 졸라 죽였다.
모용용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고리는 모용연이다. 모용용은 소마귀를 본 모용연이 변심할까 봐 걱정되었고, 기회가 생기자 혈육의 정이고 뭐고 다 잊고 망설임 없이 목을 졸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 혈도를 짚이고 기절했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양손은 뒤로 묶여 있었다.
그리고 밤새 소마귀를 지켜봤냐는 유근의 질문에 우문강현이 고개를 끄덕인 걸 보고 자신의 혈도를 짚은 자가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뒷배 쪽이면 소마귀가 죽는 걸 그냥 두고 보진 않았을 텐데.'
우문강현이 배후에 대백산을 알린 자라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소마귀의 죽음을 방치한 걸 보고 믿음이 흔들렸다.
그래서 두려웠다.
이번 일에 또 다른 세력이 끼어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허술한 계획이 언제든 망가질 것 같아서.
'지금 도주할까?'
지금 도망치면 유근이 쓸모가 다한 자신을 굳이 쫓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유근과 우문강현 그리고 흑갑호위까지 다 죽어야 자신이 불로장생의 비법을 바쳐 공을 세울 수 있음을 상기하고 억지로 용기를 냈다.
'가문을 위해서야. 가주로서 가문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건 마땅한 일이지.'
이를 꽉 악문 모용용이 지친 몸을 이끌고 유근의 뒤를 쫓았다.
- 작가의말
역시 떡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평소 머리 안 쓰던 모용용은 계획을 세워도 엉성하게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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