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迂餘曲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있다. 키운 개가 주인을 문다는 말도 있다. 마찬가지로 강호엔 노인과 여자와 아이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날카로운 병장기보단 방심이 더 위험하다는 뜻으로, 늘 사건은 경계를 전혀 안 받던 자로부터 시작한다.
"이 동 모가 철혈방 방주로 수십 년 지냈는데, 오늘에야 처음으로 뭔가 그럴듯한 일을 한 것 같소."
두 개의 연명장에 모두 서명한 동엽이 호탕하게 말했다.
"여기 앉은 여러분과 비교하기조차 미안한 하찮은 놈이지만, 오늘 같은 날에 호기 한 번 부려보겠소. 이 동 모가 여러분께 술 한잔 권하오."
말을 마친 동엽이 사발을 들어 가득 담긴 술을 꿀꺽꿀꺽 삼켰다.
"그래. 남자라면 이래야지."
동엽의 호기에 감염됐는지 왕경초가 벌떡 일어나 마찬가지로 잔을 시원하게 비웠다. 그에 남은 사람도 분분히 잔을 들어 동엽의 권주에 응했다.
"자, 어디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소?"
늘 움츠린 몸으로 눈치만 보던 건 딴 사람이었다는 듯이, 동엽이 기세 좋게 외쳤다.
"이리 주시오."
왕경초의 말에 동엽이 두 개의 연명장과 붓을 들고 은도당 쪽에 갔다.
"동 방주가 철혈방을 위하는 마음이 이토록 깊은 줄 몰랐소. 위험을 가장 먼저 감지한 것도 동 방주고,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잡은 것도 동 방주요. 이후 이 왕 모는 동 방주를 친구로 여기겠소."
말을 마친 왕경초가 두 장의 연명장에 서명했다. 그에 철추당을 대표한 사내와 두 단주도 군말 없이 서명을 완성했다.
연명장을 받은 동엽은 자리로 돌아가 붓에 먹을 듬뿍 찍은 다음, 금검당 쪽으로 갔다.
"왕 당주, 그간 금검당과 은도당 사이에 많은 마찰이 있었소. 연명장 하나 만든다고 그 모든 일이 없던 게 되진 않을 거요. 그러나 철혈방과 우리 모두의 명운이 걸린 일을 앞두고 잠시 내려놓는 건 안 될 것도 없다고 보오."
술 때문인지 아니면 동엽의 말 때문인지, 공형선도 오랜만에 피 끓는 기분이 들었다.
"동 방주의 노고에 감사하고, 왕 당주와도 단둘이 즐겁게 술잔을 기울일 날이 빨리 오길 기대하오."
말을 마친 공형선이 연명장에 서명했다. 이어서 금검당을 따르는 단주들도 차례로 붓을 받아 서명했다.
"먹이 없군."
금검당 쪽에서 서열이 가장 낮은 마 단주의 차례가 왔을 때 붓에 먹이 모자랐다.
"먹을 갖다 드리겠소."
동엽이 말했다.
"아니오. 내가 가겠소."
명색이 방주인 동엽에게 먹 심부름을 시키기 뭣했는지, 마 단주가 연명장과 붓을 들고 동엽이 앉은 자리로 갔다.
'제일 영향력이 없는 인물이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합쳤다. 커다란 압박에 금검당과 은도당이 손잡는 게 필연적인 일이 되긴 했으나, 적절한 기회에 분위기를 만들어 물꼬를 튼 건 동엽이다.'
구후영은 동엽에게 감탄하는 마음이 드는 동시에, 깊은 고뇌에 빠졌다.
'이제 남은 과제는 역모가 아닌 다른 길을 고르는 건데, 해낼 수 있을까?'
갑갑한 마음에 구후영은 연무쌍을 바라봤다. 그러나 연무쌍 역시 명확한 생각이 없는 눈치였다.
'이만 작별하고 떠나야 하나?'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동엽의 자리에 가서 붓에 먹을 찍던 마 단주가 갑자기 동엽을 공격했다.
"뭐야!"
마 단주의 장법에 맞은 동엽이 허망하게 날아갔다. 그에 모든 사람이 몸을 일으켰으나,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술에 산공독이 들었소."
마 단주의 말에 다들 운기를 시도했다. 술 먹은 지 얼마 안 되어 내공이 움직이긴 하나, 평소보다 훨씬 힘든 느낌이었다.
"놈!"
다들 분노에 불타는 눈으로 동엽을 노려볼 때.
또 이변이 일어났다.
마 단주가 갑자기 동엽의 자리에 앉았고, 거의 동시에 의자가 뒤로 확 젖혀졌다.
기관 돌아가는 소리에 사람들이 주의를 돌렸을 땐 마 단주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고, 두 장의 연명장도 종적을 감췄다.
쿵!
동시에 무거운 물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불길한 느낌을 받은 구후영은 바로 달려서 방문을 당겼다.
"철판이오."
어느새 내려온 철판이 밖으로 나가는 길을 봉쇄했다.
"여기도 마찬가지요."
창문을 열어 확인한 누군가가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구후영은 바로 천공교검을 휘둘러 바닥을 때렸다. 바닥에 깐 나무가 부서져 사라지고 시커먼 철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도 마찬가지겠지?"
평소라면 경공으로 도약해서 바로 확인했을 텐데, 산공독의 약효가 점점 세지면서 다들 운기가 잘 안 되었다.
"저놈은 뭔가 알 거야."
잠시 동엽의 호기에 감동했던 자신이 떠올랐는지, 왕경초가 살짝 충혈된 눈을 부라렸다.
"오지 마."
동엽이 가슴께를 더듬으며 말했다. 마 단주의 공격에 숨이 잠깐 멈췄는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진천뢰다. 오지 말라니까."
동엽이 가슴에서 꺼낸 건 어른 주먹보다 큰 시커먼 철구였다.
"공 당주. 저거 진천뢰가 맞소?"
진천뢰는 병장국兵仗局 산하의 화기서火器署에서만 만드는 물건이다. 개인이 사사로이 취급하면 역모죄로 구족을 멸한다.
"맞는 거 같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진천뢰를 만드는 데 쓰는 철을 공급하는 곳이 천하에 셋인데 금검당도 그중 하나다. 공형선은 진천뢰의 실물뿐이 아니라 터지는 모습도 본 사람이다.
"여기서 터뜨리면 백 갑자의 내공이어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오."
그때.
"동 방주가 원하는 게 뭐요?"
구후영이 나섰다.
"글쎄. 목숨 부지하는 거?"
"그럼 지금 무슨 상황인지 우리한테 알려주는 게 순서 아닐까?"
"역시. 홍엽산장의 핏줄답군."
동엽이 구후영의 태연함에 감탄했다.
"현재 얼마나 위급한 상황인지 알려줘야 우리도 서두를 게 아니오."
"그래.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속 시원하게 다 말하지."
심호흡으로 숨을 고른 동엽이 진실을 털어놓았다.
"사실 나랑 마 단주는 같은 편이다."
"언제부터?"
"예전부터 쭉."
동엽의 실토에 왕경초와 공형선이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시간이 없으니 옛날 일은 간단히 하겠다. 구후 장주의 부친과 조부를 죽인 건 마 단주의 짓이다. 정확히는 마 단주의 아버지가 한 일이지."
구후영은 잇몸에 힘이 들어갔으나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은마단이 금검당 밑으로 들어가는 조건으로 부당주 자리에 앉힌 육비나타는 마 단주와 사형제의 관계다. 누가 사형이고 누가 사제인지는 나도 모르지만."
동엽의 말에 공형선의 얼굴이 시퍼렇게 굳었다.
"공 당주가 그땐 마 단주를 견제한답시고 육비나타를 부 당주로 점지한 거 같은데, 둘은 그저 사이가 안 좋은 척했던 것뿐이다."
"마 단주가 왜?"
"사실 마 단주도 장기판의 말일 뿐이다. 성이 마 씨니 말 노릇을 하는 게 천성일지도. 크큭."
"지난 얘긴 됐고, 당면한 일부터 해결하는 게 어떻소."
동엽이 횡설수설하는 느낌을 받은 구후영이 적절히 끼어들었다.
"지금 이 방은 철판으로 감싸졌다. 저 의자는 일회용 기관으로, 한 번 뒤로 돌리면 다신 올라오지 않게 설계됐다."
동엽이 앉았던 의자는 회전하며 사라졌다.
"마 단주는 연명장을 들고 가서 우리가 역모를 도모했다고 고발할 거야."
"연명장엔 역모에 관한 말이 한 글자도 없었다."
어느새 냉정을 회복한 공형선이 차갑게 말했다.
"그간 오가며 대문에 건 편액은 다들 봤겠지?"
사람들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거 진우량이 쓴 거다."
연명장에 진우량이 손수 쓴 편액까지. 이 둘이면 역모죄로 모는 게 일도 아니다.
모함하려는 대상이 무당이라면 또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철혈방은 두 개만으로도 넉넉하다.
"여길 나가려면 그나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게 어디요?"
구후영의 질문에 동엽이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내가 해보지."
말을 마친 구후영이 경공을 펼쳐 높이 뛰었다.
"허!"
산공독으로 다들 운기가 되지 않는 마당에 구후영이 일 장이 넘은 높이까지 뛰자 다들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면엔 놀란 나머지 아무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
천장까지 거의 닿았던 구후영의 몸이 갑자기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동엽에게 화살처럼 쏘아졌다.
'어떻게?'
구후영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다가오자 동엽은 당황한 나머지 굳어버렸다.
그러는 사이, 구후영은 천공교검을 휘둘러 동엽의 손목을 자른 다음, 잘린 손에서 떨어지는 진천뢰를 왼손으로 잡았다.
"가만히 있어."
구후영은 착지하자마자 바로 침을 꺼내 동엽의 손목에 꽂아 지혈하고 통증까지 차단한 다음, 깨끗한 천으로 잘린 손목을 감싸줬다.
"마 단주는 왜 당신을 배신했지?"
침으로 통증이 차단되었고, 처치가 빨라 출혈도 적은 덕분에 동엽은 바로 정신을 차렸다.
"산공독은 원래 계획에 없었던 일이오."
"왜 산공독을 탔지?"
"철혈방에 속한 사람만 수천 명이오. 거기 딸린 식솔까지 합치면 만 명이 훌쩍 넘고, 친척과 친우까지 다하면 십만도 넘소. 이들 모두를 반역 도당으로 몰아 죽이는 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오."
"그럼?"
"여기 있는 사람만 죽이고 멈추려 했소. 홍엽산장에 청첩을 보낸 것도 역모 소리가 안 나왔으면 해서 내가 몰래 꾸민 짓이오."
동엽은 홍엽산장에 속한 불청객이 있으면 누구도 역모 얘기를 안 꺼낼 줄로 알고 청첩을 보낸 거였다.
"마 단주가 역모하자고 날 계속 꼬드긴 것부터 너희 함정이었구나."
공형선이 탄식했다.
"맞소."
"그런데 왜 굳이 산공독이 필요했고, 연명장도 필요했지?"
"기관을 발동하는 데 시간이 걸리오. 마 단주 말고 은도당 쪽에도 간세가 한 명 있소. 그래서 안전하게 산공독을 탄 술을 먹여 내공을 잃게 한 다음 기관을 발동하려 했는데, 아무도 술을 안 마시고 마 단주도 계속 눈치를 주니까 어쩔 수 없이 연명장 얘기를 꺼낸 거요."
다 내려놨는지 동엽은 공형선이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했다.
"아까 대문에서 우릴 마중 나왔을 때 전음을 보낸 사람은?"
구후영이 갑자기 던진 질문에 동엽이 고개를 저었다.
"누군지 모르오. 전음으로만 지시를 받아서 나이나 성별도 전혀 짐작 가지 않소."
"혹시 접객을 맡은 사낸가?"
동엽은 그저 고개를 흔들었다.
"혹시 밖에서 이 철판을 뜯어낼 수 있는가?"
잠자코 있던 왕경초가 불쑥 질문했다.
"당신 수하들을 기대하는 모양인데, 지금쯤 그들도 갇혔을 거요. 마 단주는 당신들뿐이 아니라 오늘 철혈대회에 온 모든 사람을 죽이려고 했소. 그래서 내가 산공독을 탄 거요. 당신들만 죽이고 천여 명의 무고한 사람은 살리려고."
"철판 두께는?"
"일 척이 넘소. 그나마 무게 때문에 천장의 철판을 제일 얇게 만들었는데, 한 뼘 정도니까 반 척은 넘을 거요."
동엽의 말에 다들 낯빛이 어두워졌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오."
구후영이 말했다.
"내공을 회복한 다음, 벽을 밀어 무너뜨리면 되오. 철판을 깨는 건 어려운 일이나, 벽을 넘어뜨려 해체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소."
"그게 언제일지 알고. 산공독은 보통 며칠씩 가는데."
"내가 침술을 알아 산공독을 뺄 수 있소. 그런데 문제가 있소."
구후영이 연무쌍의 등 혈도들에 침을 꽂으며 말했다.
"은도당 쪽 간세가 누군지 잡아내야 하오."
- 작가의말
마피아1 - 동엽
마피아2 - 마 단주
마피아3 - ?
시민 8명의 분전이 필요합니다.
Comment '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