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상당旗鼓相當
준산홍일峻山紅日 중생본색衆生本色
높은 산 위 붉은 해 아래 사람은 본색을 드러낸다.
원생욕사愿生慾死 음양일선陰陽一線
살려고 죽음을 불사하니 생사가 선 하나로 갈리누나.
"저자냐?"
원경이 느린 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질문했다.
"맞습니다."
"간다."
누구한테 하는 건지 모를 말을 뱉은 원경이 성큼 걸음으로 강석에게 다가갔다.
"응?"
가끔 그런 자들이 있다.
남과 똑같은 차림을 하고 딱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눈길을 주게 되는, 이래서 부처님이 인연이란 말을 만들었나 싶은.
"누구지?"
강석의 질문에 원경이 이를 드러내며 익살스럽게 웃었다.
"소림에서 내가 제일 강하다."
"그래?"
강석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난 마교에서 제일 잘 싸우는데."
"와라."
쿵!
간결한 대화를 끝으로 둘이 충돌했다.
'좋군.'
같은 생각을 떠올린 둘이 또다시 격돌했다. 일절 기교나 속임수 없이, 직선으로 달려 주먹으로 상대 몸을 때리고, 자기 몸으로 상대 주먹을 받았다.
쿵!
건장하다곤 하나 인간 둘이 부딪쳤을 뿐인데, 우두머리 자리를 두고 다투는 싸움소가 전력을 다해 충돌하는 모습이 연상됐다.
쿵!
여전히 수비 없이 공격에만 전념하며 격돌한 둘이 숨을 고르며 대화를 재개했다.
"나한권 같은데, 아닌 것 같고."
"십팔수나한신타十八手羅漢神打다. 지금은 잊힌 칠십이절기 중 하나지."
원경의 친절한 설명에 강석 역시 자기 무공을 소개했다.
"칠양권이다. 천강구절의 육양권보다 요만큼 더 강하달까."
둘은 속임수 하나 없이 진실하게 부딪쳤다. 그러나 그저 몸 튼튼하고 주먹 단단한 거 믿고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다.
내키는 대로 내지른 듯한 주먹질엔 상승의 무의가 깃들었고, 상대 주먹을 받을 때도 외공의 극의에 가까운 은밀한 몸짓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다들 서로 죽이는 데 혈안이 돼서 이리도 수준 높은 대결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다 쉬었겠지?"
원경의 도발에 강석이 씩 웃더니 강력한 돌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쿵!
"어!"
격돌하고 물러나는 둘의 귀에 수십 명인지 수백 명인지 모를 많은 자가 동시에 뱉은 감탄이 들렸다.
그러나 이미 상대 말고는 아무도 안중에 없던 둘은 주변을 잊은 채 충돌을 이어갔다.
#
"애송이가 많이 컸군."
원경과 강석이 첫 충돌을 했을 때였다.
"우리가 비겁하다고 생각지 마라. 우린 상대가 하나든 백이든 천이든, 늘 둘이다."
원경과 강석의 두 번째 충돌음이 방해했지만, 구후영은 상대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괜찮소."
구후영한테 다가온 건 백옥봉에서 일면식이 있는 쌍둥이 호법이었다.
"그럼."
말을 마친 쌍둥이 호법이 동시에 구후영을 덮쳤다.
좌우천사左右穿梭.
양쪽으로 오는 둘을 막으려고 태극권의 초식인 좌우천사를 펼치며 구후영의 몸통에 빈틈이 드러났다.
천교지합天巧地合.
그에 두 호법은 고민도 없이 천교지합의 합격술을 펼쳐 구후영의 가슴에 드러난 허점을 강하게 찔렀다.
그러나.
'이상하다.'
구후영의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며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흡!"
아니나 다를까.
입을 다물고 코로 숨을 크게 들이켠 구후영의 양손이 기괴하게 움직이며 왼손은 난화검법의 춘풍불지春風拂枝라고 이름을 붙인 초식을, 오른손은 낙화검법에 속한 춘난화개春暖花開의 초식을 펼쳤다.
'양패구상인가?'
구후영의 양손이 쌍둥이 호법의 단전에 각각 닿는 순간, 둘이 전력을 다한 천교지합의 공격도 구후영의 양쪽 가슴에 적중했다.
누가 봐도 목숨 하나로 둘을 바꾸는 장렬한 희생으로 보였다.
물론, 쌍둥이의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하!"
구후영은 마지막 순간 입까지 벌려 큰 숨을 빠르게 토했고, 그와 동시에 가슴이 뒤로 쑥 당겨졌다.
그 탓에 천교지합의 공격이 결국 구후영을 적중하긴 했으나, 쌍둥이 호법은 발경할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뒤늦게 단전 부위를 가격하는 구후영의 손을 무시하고 모은 내공을 전부 손바닥을 통해 터뜨리긴 했으나, 위력이 예상했던 반에도 못 미쳤고.
구후영이 백팔나한진의 무시무시한 공격을 상대하며 깨우쳤던 방식으로 기운을 흘려버린 바람에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다.
"어!"
흉흉한 기세로 구후영을 덮치던 쌍둥이 호법이 실 끊어진 연처럼 뒤로 훨훨 날자 뒤쪽에 있어 미처 전투에 합류하지 못한 마교 무인들이 동시에 경탄을 질렀다.
'불길하다.'
용전향이 몸을 날려 쌍둥이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양손으로 받아냈다. 바로 반응한 것도 그렇고 몸놀림이 부드러운 것도 그렇고, 평소라면 박수를 받아 마땅한 대단한 경공이지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어떻게 됐습니까?"
구후영에게 대결을 신청했다가 배산의 말 몇 마디에 부당주 직을 박탈당했던 원칠이 다가가 질문했다.
"허우대는 멀쩡한데."
용전향이 낮게 속삭였다.
"허좌대는 단전을 잃었다."
쌍둥이 중 춘난화개에 당한 허좌대는 단전이 사라졌다. 그러나 춘풍불지에 당한 허우대라고 용전향의 말처럼 멀쩡한 건 아니었다.
기절한 건 허좌대와 똑같고, 단전은 있으나 내공을 전부 잃었다.
"비열한 놈. 독을 쓰다니!"
용전향의 말을 들은 원칠이 호통쳤다. 그에 조금씩 수그러들던 마교의 기세가 금세 불타올랐다.
덕분에 사기의 저하는 겨우 막았지만, 용전향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진짜 천마의 제자가 아닐까?'
허우대와 허좌대는 일월팔황무극신공日月八荒無極神功을 익혔다.
혼자서는 절대 못 익히고, 반드시 체질이 같으나 내공의 성질은 상반된 두 명이 처음부터 함께 수련해야 하는 이 신공은 무려 주나라 시절의 글자로 천산의 암벽에 적혀 있었다.
허우대와 허좌대는 쌍둥이여서 체질이 같은데, 하나는 음기가 강하고 하나는 양기가 강했다. 게다가 한 명은 오른손잡이고 한 명은 왼손잡이다.
거기에 타고난 재능 역시 출중하여 인간의 무공이 아니라는 일월팔황무극신공을 소성의 경지까지 익혀내는 데 성공했다.
개인의 실력은 용전향은 물론이고 원칠보다도 아래지만, 둘이 함께 출수하면 천마도 세 초식 정도는 피해야 했다.
덕분에 둘은 부족한 실력에도 마교에서 매우 존귀한 광명우호법光明右護法과 흑암좌호법黑暗左護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 둘이 각개격파도 아니고, 수십 합을 겨루며 부족한 실력 때문에 파탄을 보인 것도 아닌.
첫 격돌에 하나는 내공이 사라지고 하나는 단전을 잃었다.
이는 구후영이 천마를 능가하는 천재거나, 미리 천마한테서 천교지합의 합격술을 파훼하는 법을 들어 익혔다는 추론밖에 없는데.
둘 중 어느 것도 용전향이 바라는 바는 아니다.
'저놈을 묶어야 한다.'
생각 같아선 전력을 다해 구후영부터 죽이고 싶지만, 검종을 지우는 게 우선이다.
"네 분께 부탁드립니다."
결정을 마친 용전향이 몸을 돌려 열 살 아이 정도로 작은 체구와 주름 가득한 얼굴을 천으로 가린 네 노인에게 허리를 숙였다.
"약속을 꼭 지키시게."
교도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약속으로 겨우 모신 백련교의 장로들이었다. 원래는 기종이 약속을 어기는 거에 대비해 숨긴 전력이었는데, 지금은 그걸 따질 계제가 전혀 아니었다.
"목숨 바쳐 반드시 숙원을 완수하겠습니다."
#
'대단하군.'
물 만난 고기, 꽃 만난 나비처럼 날뛰는 옥무영의 모습을 보며 막불위가 감탄했다.
물론, 마교 고수 세 명을 상대하면서도 전장 여기저기를 여유 갖고 살피는 막불위 역시 칭찬받아 마땅했다.
깡.
일검에 마교 고수 세 명을 밀어낸 막불위가 훌쩍 경공을 펼쳐 사라졌다. 그에 마교 고수들은 허탈한 웃음을 짓고 다른 상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는 사이, 막불위는 궁지에 몰린 화산 제자의 목숨을 구한 다음, 목덜미를 잡아 안전한 후방으로 던졌다.
"무슨 속셈이오?"
마교 무인을 죽이고 한숨 돌리는 막불위에게 검종의 장로가 다가와 속삭여 질문했다.
"이 상황에 내 꿍꿍이가 궁금하오?"
막불위의 말에 검종 장로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네 아버지를 죽인 게 내 사형인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내 동생은 모르니까 괜히 떠벌이지 마시오."
막불위의 태평한 대답에 검종 장로는 마음이 더더욱 갑갑했다.
강호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는 종종 있어도 원수를 은혜로 갚는 자는 없었다.
"여유가 있으니 간단히 말하지."
강석과 원경은 해가 동산으로 지든 장강이 서쪽으로 흐르든 상관하지 않을 기세로 둘만의 대결에 푹 빠졌고, 구후영은 네 명의 고수를 뒤에 달고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옥무영은 얍삽한 얼굴로 팽팽하게 맞선 자들의 전투에 끼어들어 어부지리를 취했다.
여전히 화산 제자가 다치고 죽어갔지만, 현재 상황은 대체로 팽팽하다고 할 수 있다.
"난 검종이 최대한 많이 살아서 기종이랑 싸우길 바라오."
여전히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지만, 막불위의 눈만큼은 어두운 밤에 단 하나 켜진 횃불처럼 뜨겁게 빛났다.
"아버지의 아들로서, 종남의 장문으로서 이게 최선이라고 판단했소."
'이제 와서 누굴 탓하랴.'
막불위의 솔직한 대답에 화산 장로는 오히려 걱정이 가셨다.
'어떻게든 살아남고, 기종을 처리해 화산을 차지하고, 절치부심해 강해져서 종남한테 밀리지 말아야지.'
"아직이요?"
화산 장로가 떠나기 무섭게 옥무영이 다가왔다.
"방해꾼이 없으면 도착할 시간이긴 하지."
막불위의 대답에 옥무영이 넌지시 말했다.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은데, 믿음은 있나 보오."
"내 계획에 따르면 따르는 대로, 안 따르면 안 따르는 대로."
막불위가 오묘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이번 일에 대비해 여든 개가 넘은 상황을 상정해 대응책을 준비했소. 그러니 중요한 순간에 내 말을 따라주시기 바라오."
"내가 솔직히 까다로운 성격이라서 친구 한 명 없는데."
구후영이나 원경은 친구라기보단 돌봐야 하는 어린 동생 혹은 조카 느낌이다. 굳이 친구 한 명 뽑자면, 사부인 신검이 가장 가깝다.
"당신은 마음에 드는군."
"나도 당신이 마음에 드오. 그러니 당신을 위해 준비한 선물 기대하기 바라오."
서로 마음이 통했는지, 둘이 동시에 경공을 펼쳐 사라졌다.
옥무영은 화산 장로와 대결하는 마교 고수를 측면에서 덮쳤고, 막불위는 세 명의 합공을 받아 궁지에 몰린 화산 장로의 막내 손자를 구했다.
한편.
"당신이 죽으면 이 싸움이 끝나는가?"
네 명의 노고수는 확실히 성가셨다. 이들은 구후영을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고, 그저 묶어두려 했다.
넷의 끈질긴 방해로 구후영은 수십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용전향을 앞에 둘 수 있었다.
"글쎄. 방장이 죽는다고 소림이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신앙으로 뭉친 무리라."
용전향이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는 사이 네 명의 노인이 구후영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수비 태세를 단단히 했다.
"증원이 없으면 우리가 이길 것 같은데."
구후영이 말로 용전향을 흔들었다.
"충원이 없는 건 그쪽도 마찬가질걸. 혹시나 해서 벼랑 쪽에 대단한 분을 모셨지."
용전향의 말에 구후영은 검을 잡은 손아귀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이 좋은 머리를 이런 나쁜 짓에만 쓰다니. 도대체 사람이 문제인가 세상이 문제인가.'
- 작가의말
기고상당 - 맞수의 실력이 상당하다.
일월팔황무극신공은 이 글의 세계관에선 아무도 홀로 익혀내지 못하는 무공입니다. 쌍둥이는 그나마 둘이 나눠 익혔지만, 그 탓에 혼자서는 반쪽짜리 무인입니다. 합쳤을 땐 어마어마한 위력을 자랑하지만, 개개인의 실력이 부족한 탓에 장기전엔 또 약합니다.
쌍둥이 중 누가 더 강하냐고 물으신다면, 그나마 멀쩡한 허우대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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