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련대련對聯對練
무인은 대련對練을 통해 무공 고하를 가늠하고 자신의 미숙함을 찾으며, 문인은 대련對聯을 통해 학문의 깊이를 겨룬다.
소위 무武에는 이등이 없고 문文에는 일등이 없다는 말처럼 문인의 겨룸은 승패를 가르기 힘들지만, 번뜩이는 재치로 모두의 감탄을 받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자리가 다 찬 것 같은데, 주인이 오기 전에 대련聯을 해보는 건 어떻소? 내가 먼저 시작하지."
유일하게 네 명이 앉은 상에서 후덕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입을 열었다. 넷 모두 옷깃에 하얀 연꽃을 새긴 것이 동일 소속이 분명해 보였다.
"만리장성만리장."
萬里長城만리장성은 萬里만리로 長길다.
네 번째 글자를 기점으로 같은 글자를 반복하여 문장을 만드는 대구對句였다.
[저들은 마교에서 정통 중의 정통을 자랑하는 백련교 출신이네. 송나라 때 방랍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자들의 후손으로, 원나라에 시종 저항하여 마교 내에서 명분이 가장 강하네.]
용천의 전음에 구후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런데 그걸 다른 뜻으로 해석했는지 대구를 던진 중년 사내가 구후영을 지목했다.
"처음 보는 귀한 손님께서 뭔가 떠오른 것 같군."
구후영은 잠깐 고민하고 맑은 목소리로 문장을 지었다.
"고로황하고로황."
古老오랜 黃河황하는 古예부터 老늘 黃누랬다.
만리장 세 글자를 똑같은 뜻으로 반복한 중년 사내의 대구보다 수준이 훨씬 높은 응구應句였다. 이에 학문이 깊은 자들의 얼굴에 감탄하는 기색이 역력히 떠올랐다.
"현월궁전현월궁."
懸月달을 매단 宮殿궁전은 玄月宮현월궁이다. 이 문장은 '현월궁의 궁전에 달이 걸렸다'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현월궁의 궁주 중 한 명으로 보이네.]
눈과 입만 드러낸 하얀 가면을 쓴 여인이 무심하게 응구를 던지고 유유자적 술을 마셨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폭탄주의 향에 구후영은 침을 꼴깍 삼켰다.
"훌륭하군."
여인은 현을 음만 같은 다른 글자를 썼다. 분명히 구후영의 응구보다 수준이 떨어지건만,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흑발의 노인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깡마른 노인은 마교의 흑 장로네. 마교 정통이면서 천마의 심복이기도 하지.]
흑 장로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붉은 장포를 입었다. 몸매는 깡마르나 얼굴에 혈색이 돌고, 두 눈엔 정기가 가득하다. 코와 귀가 큼직한 걸 보니 병만 조심하면 장수할 상이었다.
"좌우 호법의 차례요."
[쌍둥이는 마교 호법이야. 무공이 어떤지는 나도 아는 바가 없네.]
생김새도 체격도 비슷한 쌍둥이지만, 구분하는 건 쉬웠다. 한 명은 오른손잡이고 한 명은 왼손잡이였다.
그런데 보통 왼손잡이가 왼쪽에 앉고 오른손잡이가 오른쪽에 앉는 것과 달리 둘은 반대로 앉았다. 그래서 손이 서로 부딪치는 일이 잦았다.
"형이 해."
동생의 말에 형이 오른손으로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한참 뒤에 겨우 입을 열었다.
"천산명교천산명."
天山천산의 明敎명교 덕분에 天山천산이 明밝다.
별로 대단한 응구가 아닌데 대련을 시작한 중년 사내가 기쁜 웃음을 지었다.
"내가 마지막인가?"
혼자 앉은 거구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분명히 흑 장로가 남았는데 자신이 마지막이라고 하자 구후영은 오리무중에 빠졌다.
"구절천마구절천."
九絶아홉 재주를 품은 天魔천마는 九아홉 모두 絶天하늘에 닿았다.
거구의 사내가 던진 응구에 현월궁에서 온 여인을 뺀 모든 사람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온갖 가설을 떠올리며 갈피를 못 잡던 구후영은 갑자기 마음이 갑갑해졌다. 다들 무슨 도깨비놀음인지 궁금한 건 둘째치고, 보잘것없는 자신이 마교의 장로와 호법과 현월궁의 궁주와 같은 상석에 앉은 상황이 너무 불안했다.
'나 때문은 아닐 테고.'
백번 양보해서 구후영이 홍엽산장의 장주이고 신검과 친분이 있음을 마교가 안다고 쳐도 그게 상석에 앉힐 이유가 전혀 되진 않는다.
그렇다면 용천 때문이란 건데, 마교가 상석에 모실 정도의 인물이 청첩을 위조할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이다.
'나랑 우연히 만난 게 아닌가?'
사실 용천이 구후영에게 접근한 건 우연도 필연도 아니다. 어떻게든 청첩을 가진 자에게 빌붙으려 했는데, 혼자 움직이는 사람이 구후영뿐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뿐이다.
[잘 듣게. 흑 장로는 천강구절 편이고, 백련교와 쌍둥이 호법은 반대편이네. 덩치 큰 놈과 현월궁의 여인은 아직 중립으로 보이네.]
갑자기 귀에 울린 전음이 구후영의 난잡한 추리를 멈춰버렸다.
[나는 딱히 누구 편이 아니고, 그저 싸움을 말리려고 왔네. 소형제가 날 돕는다면 나도 소형제가 하는 일을 전력으로 도울 테니 어떻게든 다툼이 안 일게 애써 주게.]
용천이 한 말이 무슨 의민지 몰라 구후영이 더 어리둥절해 있던 그때, 수염을 짧게 다듬은 미공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교의 교주 대리를 맡은 배산이오. 보잘것없는 견자犬子(자신의 아들을 낮춰 부르는 겸손의 말)의 생일잔치에 원로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신 손님들께 감격의 말을 전하오."
손님들도 분분히 일어서서 배산의 인사에 답례했다.
"내가 늦은 나이에 아들을 얻고 보니 아이가 살아갈 강호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자주 치밀었소. 증오와 원한이 아닌 좀 더 질서 있는 강호를 아이들에게 물려줘야 하는 게 아닌지 싶어 견자의 생일을 빌미로 현 강호의 기둥들을 감히 천산으로 모셨소."
그때, 옷깃에 매화 문양을 새긴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배산 공자의 훌륭한 말씀 중에 죄송한데, 강호의 질서는 결국 힘과 명분에 따른 게 아니오?"
"그건 맞소. 강호뿐이 아니라 세상 어디가 힘과 명분에 따른 질서 아니겠소. 내가 원하는 건 힘을 가늠하는 과정에 불필요한 살육을 줄이고, 불가피하게 생긴 원한을 해소할 방도를 무림 동도 여러분과 마음을 합쳐 마련코자요."
구후영은 배산에게 큰 호감을 느꼈다. 배산이 저런 생각을 하게 된 데 어떤 배경이 있고 무슨 속 꿍꿍이를 숨겼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나날이 약해지는 마교를 보호하기 위함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배산의 제안 자체가 훌륭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그 질서가 이뤄져야 하는 거 아니오?"
배산은 화산파의 의도를 몰라 궁금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슨 질서 말이오?"
"어쨌든 명교가 주인이고 우리가 객이니 자리 배치에 불만이 없었소. 상석에 앉은 분들이 대부분 명교 출신인 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오. 그런데."
화산을 대표하여 온 사내가 눈길을 용천과 구후영에게 보냈다.
"이제 일류의 경지로 보이는 청년과 외공만 익힌 노인은 무슨 이유로 상석에 앉은 거요?"
배산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아무래도 자리 배치에 관해 담당자의 전음을 듣는 듯했다.
"두 분의 존성대명이 궁금하오."
전음으로 제대로 된 해명을 듣지 못했는지, 배산이 용천과 구후영의 이름을 물었다.
"태원부 낙화문의 구후영이오."
구후영은 용천이 대문에서 말한 유수문이란 이름을 댈지 잠깐 고민했으나, 솔직히 얘기하기로 했다.
"용천이오."
배산이 잠깐 고민하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산서 무림에서 최근 연합을 추진한다던데, 두 분은 산서 무림을 대표해 온 것이오?"
"대표라기보단 발로 뛰고 말을 전하는 사람이오."
용천이 겸손을 떠는 척하며 구후영을 앞질러 대답했다.
"언제부터 산서 무림이 강호에서 이리 융숭한 대접을 받은 거요?"
화산을 대표해 온 세 사내 중에 가장 젊어 보이는 자가 앉은 자리에서 말했다. 서른 정도로 보이는 사내는 최근 경지가 크게 올랐는지 기세가 다소 광폭했다.
배산은 어색한 얼굴로 대답을 아꼈다. 뱉은 말은 쏟은 물과 같아 도로 담으려면 엄청난 수고를 들여야 한다. 현재 교주의 직책을 대리하는 배산으로선 단어는 물론 말투까지 세심을 기울여야 했다.
그때, 대련을 제안했던 중년 사내가 입을 열었다.
"명교 육엽당六葉堂 당주 용전향이오. 화산 고인高人의 소견엔 저 둘을 쫓는 대신 누구를 상석에 앉혀야 한다고 보오?"
그에 대답한 건 화산이 아닌 종남의 무인이었다.
"마교의 일에 외인이 왈가왈부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소. 여기 주인은 배산 공자이니 손님인 우리는 주인의 뜻에 따르겠소."
상대가 던진 가시덤불을 교묘하게 돌려주는 동시에, 자리 배치에 불만인 화산을 깎아내리는 일거양득의 훌륭한 대응이었다.
이에 구후영도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마교라고 부르는 자들은 천마 편이고, 명교로 부르는 자들은 반대편이구나.'
마교는 천마가 교주가 되며 바꾼 이름이다. 마교로 부르는 자들은 천마를 지지하고, 명교로 부르는 자들은 천마의 세력을 마교에서 축출하길 바라는 게 분명하다.
종남은 마교가 건재해야 조정의 견제를 덜 받기에 당연히 천마를 지지하고, 마교와 중원 무림 간의 평화를 추진하려는 배산의 편이다.
싸움이 일어 마교가 망하기라도 하면 조정의 칼날이 일 순위로 종남, 이 순위로 철혈방에 향할 게 불 보듯 뻔하니까.
종남이 망하기를 바라는 화산은 당연히 배산의 반대편이고.
'용 선배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싸움을 말려야 한다.'
앞날이 밝은 낙화문 입장에선 강호에 큰 풍랑이 이는 일이 전혀 반갑지 않다.
"부족한 몸이 여기 주인이긴 하나, 지혜와 경험은 여러 선배와 비교할 바가 아니오. 쉬이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니 마교 어르신의 지혜를 빌리고자 하오. 흑 장로께선 어떤 고견이 있습니까?"
"나이만 먹은 일개 무부가 뭘 알겠소. 그냥 하던 대로 마교의 땅에선 마교의 법에 따르고, 배산 공자의 장원에선 배산 공자의 뜻에 따라야지."
흑 장로의 말에 용전향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거면 굳이 중원 무림의 바쁜 분들을 불러 놓고 평화를 이루네 뭐네 할 거 있소? 그냥 쭉 하던 대로 하면 되지."
[옭매듭에 걸렸군. 차라리 처음부터 우리가 상석에서 일어나는 게 나았네.]
구후영은 용천의 전음에 동의하지 않았다. 용천과 구후영이 일어나 상석을 비워도 그 자리에 누가 앉느냐로 한바탕 싸웠을 게 분명하다.
'이 일을 해결하면 배산 공자도 내 청을 거절하지 않겠지?'
자룡을 빼내는 데 배산의 도움이 꼭 필요한 점, 그게 아니어도 마교와 중원 무림의 싸움이 일어나는 걸 꼭 말려야 하는 낙화문 장문의 입장, 거기에 싸움을 말리는 걸 도우면 구후영의 일을 전력으로 돕겠다던 용천의 약속.
여러 이유가 겹쳐서 구후영은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했다.
"화산에서 온 세 분은 기종氣宗이오 검종劍宗이오?"
자리에서 일어난 구후영이 질문했다.
"난 기종이고 이 둘은 검종이오. 그게 왜 궁금하오?"
배산의 말을 끊고 자리 배치에 불만을 표했던 사내가 대답했다.
구후영은 사내의 말을 무시한 채 품에서 장문검을 꺼냈다.
"낙화문 장문 구후영이오. 화산 검종의 두 제자는 장문검에 예를 표하시오."
갑자기 구후영이 별 시답잖아 보이는 짧은 검을 꺼내면서 화산파에 예를 올리라고 하자 강호 경력이 풍부한 자들도 영문을 몰라 크게 수군거렸다.
"화산 검종의 전중광이 낙화문 장문께 대련을 청하오."
이제껏 조용히 있던 사내가 일어서며 말했다.
- 작가의말
대련으로 시작해서 대련으로 끝나는 제곧내의 정직함.
Comment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