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법대결拳法對決
한 발을 내밀며 양 주먹을 함께 내지르자 그 기세가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도 뒤집을 듯했다. 뒤로 물러나는 척하다가 갑자기 몸을 비틀어 공격할 땐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는 느낌이다. 자잘한 동작으로 견제에 전념하다 불시에 내지른 주먹은 달을 가르는 유성을 닮았고, 상대를 압박하며 틈을 찾는 연환권은 잘 갈린 비수처럼 예리하다.
무림인이라면 한 번쯤 들어본 여의권을 장선이 극의에 가깝게 펼쳐냈다. 철혈방의 부름을 받고 온 자들은 물론이고, 복장표국을 도우러 온 자들도 암암리에 감탄했다.
"무공이 궁금하오."
한바탕 몰아치고도 별 이득을 얻지 못한 장선이 공격을 멈추고 질문했다.
"사목권四木拳입니다. 춘류春柳와 하죽夏竹과 추백秋柏과 동송冬松의 사류四流가 있습니다."
무당의 이유극강에 못 미치지만, 춘류는 흐느적거리는 봄버들처럼 상대의 해일과 산사태같이 강한 공격을 잘 비껴냈다.
가을과 겨울의 대나무는 쉽게 쪼개지지만, 생명력이 가득한 여름의 대나무는 질기다. 하죽은 상대의 빈틈없는 연환권을 단단히 버텨냈다.
자작나무는 가을에 화려한 단풍을 피워낸다. 추백은 환권의 일종으로 구후영이 새로 배운 난화검법과 마찬가지로 상대 공격을 억제했다.
동송은 겨울의 소나무처럼 홀로 푸르다. 앞의 셋이 수비에 치중했다면 동송은 공격으로 공격에 맞섰다.
거의 수비만 하여 그다지 돋보이진 않았지만, 배월교주가 선보인 권법도 수준이 매우 높았다.
'만만치 않은데.'
연무장의 대부분 사람은 장선이 큰 우위를 차지했다고 여겼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여의권은 공격과 수비의 전환이 매끄럽고 공격 방식의 전환도 부드러우며, 대부분 틀에 박힌 권법과 달리 초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같은 사부한테 배워도 익힌 자의 성정에 따라 완전히 다른 권법처럼 보이기도 하여 여의권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배월교주의 사목권을 상대하며 겉보기엔 여의로우나 실상은 꽁꽁 묶여있었다.
상대는 마치 장선과 수백 번 대련한 사람처럼 모든 변화에 적절히 대처했다.
'무당을 이기려고 변화를 추가했는데 실수한 것 같구나.'
원래 장선의 여의권은 공격 일변도에 빠름을 추구했다. 그러다 무당의 장권과 십단금 등을 경험하고 부족함을 느껴 변화를 많이 넣었는데, 배월교주와 대결하다 보니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손을 섞기도 전에 얕본 건 미안하오. 이제부터 제대로 하겠소."
"그럼 저도 우려 없이 무공을 펼쳐보겠습니다."
둘이 다시 붙었다. 장선은 쓸데없는 변화를 빼고 빠르고 강한 권법을 펼쳤다.
"동생. 저 둘의 권법이 태극권보다 어떤 거 같아?"
"형님. 제가 무슨 자격으로 태극권은 물론이고 저런 고수들의 무공을 평가합니까."
"평가가 아니고 그냥 견해라고 하자."
구후영이 조금 고루한 면이 있는 걸 아는 청빈이기에 순한 단어로 바꿨다.
"제 부족한 소견으로는."
구후영은 취화봉의 지하 동굴에서 신검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단어를 선택했다. 그저 생각하는 것과 입으로 뱉는 건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고수들이 웬만해선 거짓말을 안 하는 게, 실언하면 마음에 응어리가 생겨 내공과 초식 수련에 지장을 준다.
물론, 가벼운 성정을 타고난 자들은 거짓을 밥 먹듯 해도 괜찮다.
"태극권엔 의도가 없고 저 둘의 권법은 의도가 잘 보이는 것 같습니다."
여의권이든 사목권이든 상대를 이기려는 의도가 선명했다. 상대를 이기는 방법에 관해선 서로 생각이 다른 듯하지만, 나를 보호하고 상대를 이기려는 요지는 명확했다.
태극권엔 그게 없었다. 주먹에 오행을 넣어 무공으로 만들었다지만, 구후영도 정학이 그리 말하니 그런가 보다 했지 태극권이 무공으로서 얼마나 대단한지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깊이 고민한 보람 없이 마음에 있던 말을 뱉었다.
'의도가 없다라.'
구후영은 무심하게 뱉은 말이지만, 듣는 청빈에겐 천지를 깨우는 봄날의 우레였다.
'뭔지 모르지만, 참으로 적절한 평가다.'
청빈은 머리가 간질거려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구후영이 대결에 깊이 빠진 듯해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함정을 파셨군요."
두 번째 격돌을 마친 둘이 대화했다.
"무슨 소리요?"
"비슷한 공격을 너무 많이 반복했습니다."
비슷한 공격을 반복하며 상대가 틈을 찌르길 기다렸는데, 배월교주는 나이가 어려도 어리숙하진 않았다.
"들켰소? 역시 나는 머리를 안 쓰는 게 나은 것 같소."
"장 당주의 권법을 보니 뒤에서 이런 꿍꿍이를 꾸밀 사람 같지는 않군요. 혹시 짚이는 세력이 있습니까?"
"글쎄. 잘 모르겠소."
장선은 얼떨결에 있다고 대답하려 했으나 제때 정신을 차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도로 삼켰다.
'설마 이 모든 게 황실의 음모인가?'
훨씬 위험한 마교가 잘 버텨준 덕분에 화를 면했지만, 철혈방도 황실이 이를 가는 강호 문파 중 하나다.
"이번엔 소녀가 공격해 보겠습니다."
호흡을 고른 둘이 다시 격돌했다. 처음 두 번은 수비에만 치중하던 배월교주가 매서운 공격을 선보였다.
가지를 부러뜨리고 나무를 통째로 쪼개는 엄동설한에도 푸르게 버티는 소나무처럼, 배월교주는 장선이 어떻게 반격하든 개의치 않고 공격을 면면부절 이어갔다.
여의권에만 감탄하던 자들도 끝내 배월교주가 지금까지 그 대단한 여의권에 한 치 양보도 없이 맞선 사실을 떠올렸다.
'넷이 따로가 아니야.'
배월교주가 공격에만 치중하는 듯했지만, 춘류와 하죽과 추백의 권의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난 왜 여러 초식은 하나로 합치고 싶어 하면서 정작 검법과 검법은 기를 쓰고 구분하려 했을까?'
구후영의 머릿속에 다시 낙화검법과 유일검법이 둥실 떴다.
안문도의 철방에서 완벽에 가까운 망치질을 보고 무아지경에 잠깐 빠졌으나, 명인의 부름에 금방 깬 탓에 뭘 얻진 못했다.
다행히 배월교주가 네 개의 전혀 다른 권의를 한데 섞은 모습을 보며 다시 떠올린 덕분에 소중한 깨달음을 덧없이 흘려보내진 않았다.
'관건은 취사取捨다.'
무조건 얻으려고만 하면 안 된다. 하나를 얻고 반 개만 버려도 감지덕지해야 하고, 하나를 얻고 하나를 버리는 걸 당연시해야 한다.
'풍 대협이 가르친 것도 있지.'
참결, 자결, 벽결, 요결, 도결.
'검이 너무 예리해서 요결과 도결 수련이 잘되지 않는다.'
밑에서 위로 베는 건 어려운 일이다. 검의 무게 때문인데, 천공교검이 너무 예리해 구후영으로선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도결은 반대다. 검이 너무 예리하기에 베지 않고 상대를 흔드는 게 너무 힘들다. 검을 매우 평평하게 들지 않으면 웬만해선 베어버린다.
이렇듯 검 때문에 하나는 너무 쉽고 하나는 너무 어려워 수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가끔은 답답한 나머지 요결과 도결만큼은 검을 바꿔 수련할까 고민도 했었는데, 구후영이 아직 검을 바꿔가며 수련해도 경지를 지킬 정도의 수준엔 이르지 못했다.
'유일검법을 낙화검법에 섞으려면 낙화검법의 검의를 더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지엽枝葉(곁가지)만 건드리고 근본은 그대로 둘 수 있다.'
깊이 고민했지만, 결국엔 아직 경지와 검법에 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결론만 얻었다.
"와!"
갑자기 터진 감탄에 구후영이 상념에서 깼다. 급히 주의를 대결하는 쪽으로 돌리니, 어깨 부위의 옷이 찢긴 장선과 손에 천 한 조각을 든 배월교주의 모습이 보였다.
"형님, 어떻게 된 겁니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하다가 이렇게 하니까 저렇게 됐다."
격동한 청빈이 직접 둘의 역할을 하며 생동하게 표현한 덕분에 구후영도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있었다.
배월교주는 두 번째 격돌 이후 장선이 함정을 팠다고 나무랐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배월교주는 처음부터 함정을 파고 있었다.
"사목권이라고 하지 않았소?"
"맞습니다. 마지막 일격은 저만 압니다."
"마지막 나무는 무엇이오?"
"겨울의 추위에 맞서는 게 소나무뿐인 건 아니잖습니까. 동매冬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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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두 대결은 복장표국의 표국주 온휴와 대표두인 온휴의 장자가 나서서 연이어 패배했다.
장선이 지는 바람에 모양새는 좋지 못했지만, 대부분 사람이 예상했던 것처럼 대결 자체는 철혈방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동생, 내 생각을 말해볼 테니, 맞는지 판단해줘."
청빈이 말했다.
"복장표국과 배월교는 일부러 패배했다. 내 말이 맞아?"
청빈의 말에 구후영의 더부룩하던 속이 순식간에 상쾌해졌다.
"형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듯합니다."
"그치. 아무래도 철혈방에 와서 시비를 걸려다가 증거가 부족하니 알아서 숙인 것 같지?"
구후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거면 연속 두 번 지고 말지, 왜 굳이 배월교주가 장 당주를 이겼을까요?"
"나도 아까부터 여기서 계속 걸렸어. 동생의 고견은 뭔가?"
"저들이 나오면 알지 않겠습니까?"
대결을 마치고 양측의 수뇌들만 안으로 들어갔다.
"너 혹시 뭐 걸리는 거 있어?"
구후영이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청빈이 질문했다.
"걱정되는 부분이 있긴 한데, 저도 그저 기우였으면 좋겠습니다."
복장표국과 배월교는 반박 가능한 빈약한 증인과 증거를 갖고 철혈방의 본거지인 양양을 방문했다. 대결에선 복장표국이 연이어 패배하며 결국 졌지만, 배월교주가 장선을 이겨 기선제압을 했다.
힘이 최고인 강호다. 힘만 최고인 건 아니지만, 결국엔 힘의 논리로 돌아간다. 철혈방이 이빨 빠진 맹수도 아니고, 아직 건재한데 이렇게 공공연히 시비를 건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배월교주가 장선을 이긴 건 우리한테도 따끔한 독침이 있음을 보여주는 거고, 사람들 앞에서 꺼내지 않은 증인과 증거를 안에서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혹시 저들이 직접 관련자만 죽여서 입막음하고 자기들끼리 몰래 합의하고 일을 무마하면."
네 대주가 죽어버리면 단서가 영영 끊길지도 모른다.
'이런.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구나.'
청빈은 재밌는 구경에 신나서 구후영의 사정을 잊었던 게 너무 미안했다. 형 소리를 들으며 공경을 받으면서 정작 형 노릇은 전혀 못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칫 잘못해서 동생의 행방을 영영 잃을까 봐 걱정이 태산입니다."
동생 걱정에 구후영의 머리도 평소처럼 잘 돌아가지 않았다.
"어쩌긴. 일단 안에 들어가서 따져야지."
청빈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지금 당장 들어가서 따지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히 인지했다.
"그럼 형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구후영의 말에 청빈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동시에 가슴이 호연지기로 가득 찼다.
'이 못난 몸을 형이라 부르며 믿고 따르는 동생이 있는데 죽음 따위가 두려울까. 오늘 목이 잘리더라도 할 말은 다 하고 눈을 감겠다.'
청빈은 구후영을 끌고 홍엽산장의 객당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누구시오?"
"무당에서 왔소. 철추당의 네 대주에 관해 요긴하게 드릴 말씀이 있다고 안에 전하시오. 거부하면 여기 수백 명 영웅호걸이 다 듣게 큰 소리로 말하겠소."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객당의 문을 지키던 무사 중 한 명이 날렵하게 안으로 달려갔다.
- 작가의말
청빈 : 안 만나주면 언론에 터뜨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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