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엽산장紅葉山庄
송나라 때 일이다.
나라의 지원을 전혀 못 받는 상황에 양양을 육 년이나 지킨 여문환은 원의 황제 쿠빌라이의 친서를 받고 투항을 결심했다.
당시 양양과 가까운 번성의 성벽이 회회포回回砲(서양 투석기)에 무너지며 함락되었고, 번성의 백성들이 원나라 군사에 모조리 도륙당했다.
순망치한脣亡齒寒(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의 도리를 잘 아는 여문환은 양양의 백성을 건드리지 않는 조건으로 직접 성문을 열어 원나라 군대를 안으로 들였다.
원나라 군대는 비록 양양의 백성을 건드리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수십 년 동안 양양을 공략하며 원나라 병사도 수없이 죽었다. 당연히 원한이 작을 수 없고, 원나라 장수들은 친인이나 지인을 죽인 양양의 장수를 찾아 성안을 누볐다.
그러다 양양의 장수들이 복수산장福壽山庄에 숨었다는 제보를 받고 일제히 몰려갔다.
당시 복수산장의 장주인 구후긍이 상주 차림을 하고 홀로 대문을 가로막았다.
원나라 장수들이 칼로 베고 창으로 찌르고 활로 쐈으나 일절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감내하던 구후긍은 피를 너무 흘려 목숨이 얼마 안 남자 검으로 가슴을 찔러 자신을 대문에 못 박았다.
결국, 구후긍의 의기에 감탄한 원나라 장수들이 그대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복수산장 주변의 나무들이 가을만 되면 피처럼 붉은 단풍을 피워내 장원의 이름을 홍엽산장으로 바꿨다.
당시 복수산장에 숨었던 자들의 후손이 철혈방을 만들었고, 구후긍의 후손은 무공을 익히지 않더라도 대대로 금검당金劍堂과 은도당銀刀堂 다음 서열인 철추당의 부당주 자리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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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후영과 청빈은 말과 당나귀를 끌고 홍엽산장을 향해 걸었다.
"형님. 전 그냥 동생만 찾으면 됩니다."
구후영의 말에 청빈이 답답해서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누군가가 네 이름을 도둑질해 네 자리를 빼앗았는데, 그저 동생만 찾으면 된다고?"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제가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아무 기억도 없는 건 아닙니다. 저는 임신한 어머니와 함께 북원 기병에 끌려 대초원에 간 적이 있습니다. 북원 기병이 양양까지 와서 사람을 잡아갈 리 없잖습니까."
원이 패퇴하고 백 년도 더 지났다. 섬서와 하북과 산서면 몰라도, 호북의 양양까지 기병이 와서 사람을 잡아갈 리는 만무하다.
"양양에서 안 살았을지도 모르잖아."
구후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게 문젭니다. 어쩌면 어머니는 정실이 아니고 나랑 동생은 서출庶出(사생아)인지도 모릅니다."
처음엔 구후영도 자신의 뿌리를 찾았다는 생각으로 기쁨에 겨웠다. 청빈의 말에 따르면 자신하고 나이와 생일과 이름이 같은 철추당의 부당주는 구레나룻이 무성하고 구척장신에 가까워 절대 열일곱 살로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잃어버린 서신을 주운 누군가가 구후영의 행세를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깐 흥분했지만, 구후영도 곧 모순되는 점들을 발견했다.
자신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것과 어릴 때 살았던 곳이 양양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구후영의 아버지이자 철추당의 전대 부당주인 구후율이 죽기 전까지 양양에 살았음을 확인했기에 어머니가 밖에 몰래 둔 첩이고 자신과 동생이 서출이 아닌지 우려가 생겼다.
괜히 홍엽산장에 가서 자신이 구후영이라고 우기다간 망신만 당할 수 있으니 자룡을 찾으면 조용히 물러갈 작정이었다.
"동생은 이럴 때 답답하다니까. 정실이 따로 있으면 다른 구후영은 어떻게 철추당 부당주가 됐을까?"
구후영도 청빈의 말이 더 도리에 맞음은 알지만, 일말의 가능성이 남아있는 한 자신이 진짜 구후영이라고 나서고 싶진 않았다.
"이 문제는 좀 더 알아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일단은 신분을 숨긴 채 동생을 찾는 일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그저 거리에서 듣는 소문으론 홍엽산장과 구후율에게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기에 구후영은 좀 더 신중하기로 했다.
"동생은 내 일엔 그렇게 맞는 말만 하더니 정작 자기 일은 왜 이렇게 어물쩍거리는 거야."
"송구합니다."
구후영이 사과하자 청빈도 더 따지기 어려웠다. 그러는 사이 홍엽산장이 가까워져 왔다.
송에서 원으로 바뀌고 원에서 명으로 바뀌는 전란에도 전혀 손상을 안 입은 예스럽고 질박質朴한 장원이었다.
'전혀 기억나지 않아.'
구후영은 자신의 뿌리를 찾았는지도 모른다는 흥분과 너무 생소하게 느껴지는 홍엽산장의 경관에서 오는 실망이 뒤섞여 마음이 복잡했다.
'어머니 말투도 전혀 양양 억양이 아니었고.'
홍엽산장의 정문이 가까워져 올수록 구후영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그게 못마땅했는지 청빈이 오른손으로 구후영의 소매를 잡아 강하게 이끌었다.
둘은 곧 홍엽산장의 대문 앞에 섰다.
"소문이 사실이었어."
둘은 홍엽산장에 어떻게 들어갈지 고민하다가 오늘 큰 행사가 벌어진다는 소문을 듣고 며칠 기다렸다. 과연, 병장기를 휴대한 무인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장원에 들어가는 데도 문지기가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자신감을 얻은 둘도 말과 당나귀를 끌고 대문으로 갔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다른 무인은 그대로 통과시키던 문지기가 둘에게 질문했다.
"무당에서 왔소."
청빈의 대답에 문지기가 종이에 글자를 쓱쓱 적어 건넸다. 필체가 부드러운 걸 보니 문지기를 하기엔 아까운 자였다.
"말이 훌륭해 보입니다. 혹시 무례한 자가 자기 말이라고 우길지도 모르니 이걸 꼭 갖고 다니십시오."
종이를 받아서 확인하니 무당에서 온 손님이라는 글귀와 구후영과 청빈의 차림새 및 말과 당나귀의 특징을 간략히 적은 내용이었다.
"감사하오."
아니나 다를까.
둘이 말과 당나귀를 끌고 문 안에 들어가자 수많은 탐욕스러운 눈길이 달라붙었다.
구후영과 청빈은 갑자기 집중된 이목에 어찌할 바를 몰라 어색한 얼굴로 대문 근처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둘과 달리 혈총은 사람들의 관심에 신나서 껑충거리며 춤췄다. 그에 홍엽산장에 모인 무인들이 박수와 환호로 보답했다.
"마구간은 저쪽에 있소."
다행히 호원 무사로 보이는 사내가 다가와서 마구간의 위치를 알려줬다. 구후영과 청빈은 사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움직여 말과 당나귀를 마사에 묶어뒀다.
"이젠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작 홍엽산장에 들어오긴 했으나 책만 읽고 경험이 적은 구후영은 물론이고, 살행은 스무 번도 넘게 나갔으나 정상적인 강호 경험이 전혀 없는 청빈도 막막한 기분이었다.
"지금 우리가 의심하는 건 그때 내가 봤던 사내들이잖아. 네가 필체는 기억한다고 하니 일단 그들의 서신 따위를 찾는 게 먼저일 것 같다."
"철추당 부당주와 네 명의 대주라고 하니, 우선 누가 글자를 익혔는지부터 알아야겠습니다. 틀린 글자가 두 개나 있는 걸 보면 글을 제대로 익힌 자는 아닙니다."
"그럼 네가 좀 알아보거라."
"제가요?"
구후영이 막막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얼굴 낭비하지 말고 어린 하녀를 찾아 물어봐. 아마 안 물어본 것까지 다 알려주지 못해 안달일 거야."
구후영보단 낫지만, 자객 훈련만 받은 청빈도 달리 뾰족한 수는 없었다.
"제가 말주변이 별로라서. 차라리 형님께서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하긴. 네가 '성현께서 이르길' 이러면 아무리 잘생겨도 대화하고픈 마음이 사라지겠다."
청빈의 말에 불현듯 청월이 떠오른 구후영은 속이 조금 갑갑해졌다.
다행히 고개를 젖히고 심호흡을 하자 심마가 괴롭힘을 바로 멈췄다.
그때, 대문 근처에 널려있던 자들이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우리도 가자."
"우린 우리 일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의심을 받아. 하인이나 하녀도 손님이 모인 곳에 있을 테니까 너든 나든 기회가 생기면 철추당의 네 대주 중에 누가 제일 무공이 강하고 누가 제일 학식이 있냐는 질문으로 글 익힌 자를 찾아내자."
청빈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지 알려주자 구후영도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
그런데 사람들을 따라 홍엽산장의 거대한 연무장에 도착하니 다른 난관이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무장의 분위기는 전혀 화기애애하지 않았고, 병장기를 패용한 자들이 서로 노려보며 양쪽으로 갈라졌다.
"분위기를 보니 양쪽이 대치하는 상황인데, 어디로 갈지 난감하구나."
"예를 따지면 동쪽이 주인이고 서쪽이 객입니다."
"그럼 우린 서쪽으로 가자. 그래야 처음 보는 얼굴이라고 의심 안 하지."
구후영과 청빈은 서쪽으로 갔다. 아직 올 사람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나, 일단 서쪽에 사람이 훨씬 많았다.
"형님. 이쪽을 이끄는 자 중에 복장표국이 있습니다."
구후영이 강호 경험이 부족하다지만, 낙화문과 용호표국의 관계 때문에 복장표국이나 진원표국을 비롯한 큰 표국의 깃발은 잘 안다.
복장표국은 비휴貔貅를 깃발 도안으로 썼다. 비휴는 용과 봉황과 거북 그리고 기린과 함께 오대 서수瑞獸(상서로운 짐승)로 꼽히는데, 곰과 범을 합친 것 같은 모습이다.
삿된 것을 물리치고 하늘의 녹을 받아먹으며 백 가지 고뇌를 풀어주는 상서로운 짐승이면서 용맹한 무사를 상징한다.
장사치이자 무인인 표국에 딱 들어맞고, 복장표국의 이름에도 잘 맞는 짐승이다.
"이끄는 자인지 어떻게 아느냐?"
"여러 깃발이 있는데 복장표국과 달을 그린 깃발이 중군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여기서도 자칫 불청객인 게 들킬 수 있겠구나."
"저 삼각 깃발은 산인散人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저희는 저기로 가죠."
구후영과 청빈은 군대로 치면 후군 말미인 곳으로 갔다.
적이 기습하면 목숨으로 잠깐 저지하고 숙영할 때 도랑을 파고 울타리를 세우고 땔나무를 장만하는 등 잡일을 하는 자들의 자리다. 그러다 사활을 건 중요한 전투에서 달랑 몽둥이나 죽창 하나 던져주고 포로들과 함께 가장 앞에서 돌격하게 한다.
다행히 강호의 싸움은 군대와 달라 후미가 오히려 가장 안전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움직이자."
후미에 간 둘이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던 중.
"복장표국 온휴 표국주와 배월교拜月敎 교주께서 드십니다."
내공이 잔뜩 실린 여인의 외침이 연무장에 우렁차게 퍼졌다.
갈도喝道에 이어 비단옷으로 차려입은 온휴가 세 아들과 함께 등장했다. 비록 중원 삼대 표국의 말미를 차지하고 고수가 적다는 평가도 받지만, 온휴는 절정에 이른 무인이고 세 아들도 기상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배월교로 불린 무리는 여인이 대부분이고 사내가 적었다. 여인은 물론이고 사내들까지 면사로 얼굴을 가려 신비한 분위기를 풀풀 풍겼다. 특히 가장 앞에서 걷는 배월교주의 기세가 남은 일행을 압도할 정도로 단단해 보였다.
모두 사십 명 정도 되는 복장표국과 배월교 일행은 서쪽으로 움직여 중군에 해당하는 자리에 앉았다.
단, 전군 자리가 비어 있어 중군이 전군과 다름없지만 말이다.
"철추당 장선 당주 외 팔 명이 드십니다."
복장표국과 배월교의 일행이 미처 다 앉기도 전에 철추당의 당주 장선이 친위대를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등장했다.
'부당주와 네 대주는 왜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지?'
아무리 훑어도 홍엽산장의 구후영과 네 대주가 보이지 않자 청빈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 작가의말
재벌가, 출생의 비밀, 주인공과 이름 생일이 같은 캐릭터.
담백한 무협을 쓴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막장드라마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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