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파만파一波萬波
집 없는 거지가 무더기로 죽어도 누구 하나 눈길 안 주지만, 자금성 깊은 곳에 계시면서 백성에게 평생 용안 한 번 안 비치는 황제께서 재채기라도 하면 천하 약방의 약값이 오른다는 말이 있다.
사람에 따라 파급력이 다르다는 뜻인데, 명의 힘이 닿지 않는 천산에서 벌어진 사건이 중원 곳곳에 풍랑을 일으켰다.
"서둘러야 합니다."
혈포규찰대가 당분간 살 장소를 마련하느라 먼저 떠났던 단아가 불안한 소식을 들고 돌아왔다.
"철혈방이 철혈대회를 소집했습니다."
"그거 우리 장문이랑 무슨 상관인데?"
곁에서 듣던 규찰대주가 질문했다.
"내가 홍엽산장의 장주요."
너무 의외의 말이었는지 규찰대주가 입을 딱 벌리고 아무 말도 못 했다.
"자룡한테 비밀로 해주시오."
"알았다."
자룡은 현재 일류의 경지에 드는 매우 중요한 시기에 처했다. 가족을 찾은 일을 알려주면 집중력이 흔들려 자칫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기에, 구후영은 여태껏 비밀로 했다.
"단 소저께선 어떤 고견이 있습니까?"
구후영의 질문에 단아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철혈대회를 발의한 건 허수아비 방주입니다. 금검당이나 은도당이라면 어느 정도 짐작하겠지만, 방주는 외부에 철저히 가려진 인물이어서 어떤 추측도 힘듭니다. 철혈대회에 가서 임기응변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철혈대회에 가서요?"
"대회 참석을 요구하는 청첩이 홍엽산장에도 갔습니다."
구후영이 아무런 대꾸도 없자 단아가 말을 보탰다.
"아무래도 장선 당주나 연무쌍 대협의 참석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기어이 홍엽산장을 끌어들이겠단 말이지?'
갑자기 치민 화에 구후영의 기세가 돌연 폭발했다.
'대단하다.'
안 좋게 생각하면 자제력이 부족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마음에 따라 기세가 발산하고 내공이 움직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기에 단아와 규찰대주는 감탄하는 마음이 앞섰다.
"실태를 보였습니다."
깜짝 놀란 구후영이 급히 기세를 거뒀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던 기세가 금세 수그러들자 둘의 놀라움은 배가 되었다.
'타고난 데다가 노력도 만만치 않게 했구나.'
기세의 발산은 타고난 재능이 크게 작용한다. 일류의 경지에도 들지 못한 자가 절정에 비견하는 기세를 발산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러나 기세를 거둬들이는 일은 깊은 수양과 높은 경지가 필수다.
태어날 때부터 수양을 갖춘 사람은 없고, 경지 역시 가만히 누워 입만 벌리고 있으면 절로 떨어지는 공짜가 아니다.
"나도 가지."
규찰대주는 구후영의 모습을 보고 문득 철혈대회가 엄청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싫소."
구후영이 세상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그래도 귀찮은 일이 천지사방에 널렸는데, 규찰대주가 한 숟가락 보태려 하자 겨우 가라앉힌 화가 불쑥 고개를 치켜들었다.
"난세엔 힘이 중요하다. 칼날이 네 턱밑까지 왔는데 피 묻은 칼 똥 묻은 칼 가릴 때냐?"
규찰대주가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호통쳤다.
"대주의 말이 맞습니다. 지금은 없는 가시라도 만들어서 보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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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가 준비한 건 호북녹림연맹의 맹주를 맡았던 흑호채의 산채였다.
백 명에 가까운 규모의 흑호채가 자리를 잡았던 곳답게 깨끗한 물이 흐르고 산짐승이 가득해 먹고 마실 걱정이 없다. 가장 가까운 마을이 수십 리 밖이고 도시에 가려면 백 리 넘게 걸어야지만, 대부분이 일류의 경지를 넘은 혈포규찰대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고맙다."
산채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규찰대주가 감사 인사를 했다. 혈포규찰대의 대원들도 명절을 맞은 아이처럼 신나게 뛰어다녔다.
유독 구후영만 얼굴이 어두웠다.
"이만 출발하는 게 좋겠소."
홍엽산장이 당장 위험한 게 아님을 머리로는 알지만, 구후영은 조바심이 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래."
구후영의 마음을 헤아린 규찰대주가 군말 없이 짐을 쌌다.
"갑시다."
일행은 구후영의 은근한 재촉으로 급히 출발했다. 구후영과 자룡과 단아와 규찰대주 외에도 네 명이 함께 산채를 떠나 동남쪽으로 부지런히 달렸다.
"형, 어딜 가는 거야?"
"가보면 알아."
양양까지 백 리가 넘은 길을 경공을 펼쳐 달려야 한다. 갓 일류의 경지에 든 자룡이 괜히 실수하여 내상이라도 입을까 봐 구후영은 홍엽산장에 도착하고서야 진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저기에."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며 약 육십 리 정도 달리니 마을이 하나 나타났다.
"잠시 들르겠습니다."
구후영은 잠깐이라도 지체하는 게 별로 달갑지 않았으나, 어차피 중간중간 쉬어야 하기에 딱히 반대하진 않았다.
일행은 꽤 규모가 되는 마을에서 미행米行을 찾았다.
"쌀 여덟 포대. 천 다섯 필. 솜 열 포대."
단아의 말에 미행 주인이 황급히 점원들을 불러 쌀과 천과 솜을 꺼내게 했다. 단아는 규찰대의 네 대원에게 쌀과 천과 솜을 들고 산채로 돌아가라고 했다.
"싸울 사람이 필요했던 게 아니었어?"
네 명을 차출하란 말에 가장 강한 자들로 골라 뽑았던 규찰대주가 맥 빠진 얼굴로 툴툴거렸다.
"절정고수 두 명이 더 있으니까 굳이 저들까지 필요친 않아요."
싸우러 가는 줄 알고 신났던 네 대원이 개운치 않은 얼굴로 눈치를 보다가 결국엔 짐을 메고 산채로 돌아갔고, 남은 넷만 양양으로 달렸다.
'미행이 천이랑 솜은 팔지 않을 테니, 분명히 미리 준비한 거겠지?'
별거 아닌 일이나 구후영은 깨닫는 바가 컸다.
'철혈대회 얘기를 듣고부터 난 그저 걱정뿐이었다. 분명히 당장 걱정할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 철혈대회 얘기를 듣기 전부터도 난 딱히 무슨 생각이 있지 않았다. 그저 철혈방과 화산의 일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한때는 가장 골칫거리였던 용호표국이 오히려 뒷순위로 밀려났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예 무시당하고 있었다.
'시야가 넓지 못해서다. 그렇다고 하나의 일에 잘 집중하는 것도 아니다.'
구후영은 당면한 모든 일을 염두에 두고 효율적으로 움직일 만큼 계획적인 사람이 아니고, 딱 하나의 일만 붙잡고 철저히 해결하는 사람도 아니다.
여러 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서 허둥지둥하며 이것도 저것도 제대로 못 해내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형편없는 사람인 건 아니다.'
계획성이나 준비성은 엉망이지만, 위급한 일에 갑자기 맞닥뜨렸을 때의 대처는 구후영 본인이 생각해도 꽤 훌륭했다.
'매번 일이 지나고 준비가 부족했던 자신을 질책했지. 사실 이쯤 되면 날 바꾸기보단 이대로 인정하는 게 맞는다.'
더 훌륭하고 완벽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것보단 자신의 장단점을 솔직히 인정하여 받아들이고, 그걸 바탕으로 자신의 방식으로 위기에 대처하는 사람이 되는 게 나은 것 같았다.
'규찰대주의 명쾌함이나 단 소저의 세밀함을 부러워하고 배우려 하기보단, 나대로 행동하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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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여기 태원부보다 더 멋있어."
아는 도시라곤 기억이 희미한 대동부와 제대로 구경도 못 해본 태원부뿐인 촌놈이 입을 헤벌리고 감탄했다.
"마음에 들어?"
"응."
양양의 거리는 새해를 맞이하려고 집마다 단장한 덕분에 볼거리가 많았다. 거기에 홀딱 빠진 자룡은 형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촉촉하고 부드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럼, 여기서 살래?"
신난 나머지 자룡은 구후영의 질문을 듣지 못했다.
"여기 잠깐 들르죠."
홍엽산장으로 향하던 중에 단아가 일행을 멈춰 세웠다.
"여긴?"
"양양 최고의 포목점입니다."
셋은 영문도 모르고 단아를 따라 포목점에 들어갔다.
"내가 말한 옷은 준비됐지?"
"아무렴요. 반드시 마음에 드실 겁니다."
포목점 주인의 손짓에 점원들이 황급히 옷 세 벌을 대령했다.
"푸른색은 구후 공자의 것이고, 검은색은 자룡의 것입니다. 연한 하늘색은 대주 옷입니다."
"목욕물도 준비됐습니다."
포목점 주인이 양손을 맞잡아 비비면서 말했다. 그 모습이 꼭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았다.
"현재 연 대협과 장 당주가 있고, 저도 장원 주변에 사람을 심었습니다. 그러니 조급해 마시고 어서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시지요."
단아의 말에 구후영은 순순히 목욕하러 들어갔다.
'형이 돈 많은 여자를 물었구나.'
마찬가지로 점원을 따라 목욕하러 들어가던 자룡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기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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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셨습니까? 장주."
구후영이 나타나자 문지기가 바로 대문을 활짝 열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 모습에 자룡이 깜짝 놀라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추운 날씨에 수고가 많네."
문지기에게 공치사한 구후영이 안으로 성큼성큼 걷다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단 소저께서 앞장서시지요."
홍엽산장이 웬만한 크기가 아니긴 하나, 자신의 장원 안에서도 길을 못 찾는 모습에 단아가 못 참고 푹 웃어버렸다.
"장주? 뭐야. 왜 형을 장주라고 부르는데? 이 큰 장원은 또 뭐고?"
홍엽산장에 도착하며 걱정이 싹 가신 덕분인지 구후영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형이 여길 샀어."
"응? 형 거지잖아."
"형이 마보를 얻어 검을 잔뜩 샀던 일 기억나지?"
"응."
"그때 망아지가 하루에 삼천 리를 달리는 명마가 됐어."
"그 망아지를 팔아서 이 장원을 산 거야?"
"그럼."
"근데 왜?"
"응?"
"태원부에도 좋은 장원이 많은데, 왜 하필 여기까지 와서 산 거야?"
"여기가 크잖아."
"그럼 사부랑 사숙은? 사형제들은?"
곁에서 둘의 대화를 듣던 단아가 탄식했다.
"구후 공자는 거짓말 하나 제대로 못 하네요."
"부끄럽습니다."
그에 자룡이 전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형이 거짓말도 해?"
"하하."
다들 자룡의 말에 즐겁게 웃던 중.
"장주를 뵙습니다."
순찰을 하던 호원무사들이 멈춰서 구후영에게 인사했다.
"수고가 많소. 혹시 대부인이 어디 계시는지 아시오?"
"연 대협과 장 당주와 함께 의사당에서 담소를 나누고 계십니다. 사람을 보내 알릴까요?"
"됐네. 직접 가지."
호원무사들은 마저 순찰하고, 일행은 단아의 인솔을 받아 의사당으로 향했다.
"알았다."
접객당을 통과해 의사당으로 조용히 걷던 중에, 자룡이 갑자기 손뼉을 쳤다.
"여기가 누나 장원이구나. 형이랑 누나가 혼인한 거고."
예상치 못한 말에 구후영은 얼굴이 빨개지고 단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하. 그래. 그래."
유독 규찰대주만 신나서 즐겁게 웃어댔다.
"구후 공자는 잘하지도 못하는 거짓말을 해서 오해만 만드네요."
"미안합니다."
대화하는 사이, 어느새 의사당에 도착했다. 구후영은 직접 문고리를 당겨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할머니."
구후영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으나 내공이 실려 셋의 귀에 똑똑히 전해졌다.
"영아!"
심각한 얼굴로 장선과 연무쌍과 대화하던 대부인이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오다가.
우뚝 멈췄다.
"자룡. 우리 할머니다. 어서 인사드려."
"응?"
"여기가 우리 집이고, 저분이 우리 할머니다."
급작스러운 전개에 어안이 벙벙했던 자룡은 뒤늦게야 구후영이 말한 의미를 깨달았다.
"할머니!"
곰 같은 덩치로 달려간 자룡이 대부인의 품에 쏙 안겨 엉엉 울었다. 그에 대부인의 눈에서도 커다란 눈물이 실 끊어진 구슬처럼 뚝뚝 떨어졌다.
- 작가의말
‘내가 완벽해지기보단, 부족한 부분을 다른 사람으로 채우는 게 답이다.’
해결책을 찾은 구후영은 머리가 시원해졌다.
‘그런데.’
새로운 고민이 구후영을 덮쳤다.
‘단 소저와 규찰대주 중에서 누굴 선택해야지?’
결정 장애가 온 구후영은 결국 뜬눈으로 밤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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