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행서안西行西安
자고봉추비적요自古逢秋悲寂寥
자고로 가을이 오면 슬프고 외롭고 공허하다 하는데,
아언추일승춘조我言秋日勝春朝
나는 가을이 봄보다 낫다고 본다.
청공일학배운상晴空一鶴排雲上
맑게 갠 하늘을 한 마리 학이 구름을 헤치고 나르니,
편인시정도벽소便引詩情到碧霄
시상을 끌고 푸른 하늘로 가누나.
그날, 산서 무림은 연합을 이루지 못했다. 연합의 발의자나 다름없는 용호표국이 끝까지 맹주 자리를 놓으려 하지 않았고, 구후영 역시 양보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결국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는데, 용호표국이 마음이 맞는 문파들만 연락해 연합을 구성한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돌았다.
아무래도 낙화문을 빼고 갈 생각인 듯했지만, 구후영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풍불지는 연무쌍이나 공형선을 따위라고 불러도 될 거물이다. 연무쌍의 조카이고 공형선과 친분이 있다고 해도 한 번 해볼까 이런 마음을 언뜻 품을 수 있지만, 풍불지와 친분이 있는 구후영을 건드리는 건 담진웅에게 간을 백 개 줘도 엄두조차 못 낼 일이다.
대신, 낙화문에 새로운 어려움이 찾아왔다.
며칠 사이에 소문이 퍼지며 아이를 낙화문에 입문시키고 싶다며 찾아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아 한동안 고생했다.
찾아온 대부분이 힘의 흐름에 민감하고 소식이 빠른 소위 있는 집안이어서 무작정 내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원하는 대로 해줄 수도 없었다.
호비 등이 낙화문을 떠날 때 어린 제자만 버리고 가서 나이가 제일 많은 아이가 열두 살이고 제일 어린 두유손은 열 살이다. 장문인마저 이제 약관을 바라보고 있으니 제자를 받기엔 시기상조다.
구후영은 임초현과 상의해 내년 가을에 제자를 받을 계획이라는 말로 끈질기게 사정하는 손님들을 어렵게 돌려보냈다.
거기에 영약을 어떻게든 구해보려고 귀찮게 하는 문파나 무인도 소수가 아니었다. 이들은 자식을 낙화문에 입문시키려는 부모들보다 훨씬 끈질겼다.
다행히 구후영이 검으로 조각한 무시무시하게 생긴 석룡石龍이 연무장 앞에 딱 버티고 서서 커다란 눈알을 부라린 덕분에 소란까지 이어진 자는 드물었다.
아예 없진 않았고.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하겠지.'
귀찮은 일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자금 면에선 보석을 세공해 파는 거로 막대한 수익을 꾸준히 낼 예정이고, 돈이 모이는 족족 전답을 사들이고 있어 보석을 소진한 뒤도 안심이다.
두전이 백화궁에서 조제법을 찾아 자양단이라고 이름을 지은 영약이 안정적으로 수급되어 제자들의 실력 향상에도 보장이 있다.
명성도 크게 올랐다.
원래대로라면 아무리 연무쌍이 오고 풍불지가 와도 크게 소문이 나지 않는다. 임초현의 초청을 받고 온 자들이 아무리 떠들고 다녀도 듣는 사람이 허풍이라며 웃고 말았을 거다.
그런데 용호표국의 농간으로 백 명이 넘은 산서 무림에서 힘깨나 쓴다는 자들이 왔고, 이들이 돌아가면서 소문낸 바람에 며칠 사이 산서 전역에 낙화문의 이름이 퍼졌다.
철혈방의 금검당 당주가 직접 찾아와서 사죄하고 연무쌍이 삼촌이며 소림 방장의 사제와 의형제인 구후영이 신검의 가르침을 받은 검법 고수라는 소문을 산서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낙화문은 불과 며칠 사이에 부와 명성을 겸비한 문파가 되어 자질이 출중하고 심성이 바른 제자를 가려 받아 규모를 키우는 일만 남았다.
'자룡만 찾으면 모든 게 원만하다.'
구후영은 생각만으로도 즐거워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대협, 저기서 배를 타고 동관에서 내려 위하를 역행하면 됩니다."
구후영을 마차로 황하까지 태운 마부가 말했다.
"고생이 많았소. 이건 노전이오."
"아닙니다. 상 의원도 관을 준비하라던 제 마누라 목숨을 구해주셨는데요. 돈 받으면 소인이 천벌 받습니다."
"오는 길에야 내가 있어서 안 굶었지. 돌아가는 길엔 돈이 있어야 뭘 사 먹을 거 아니오. 남은 건 아이들한테 따뜻한 옷이나 사 입히시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소인이 죽어 귀신이 돼도 꼭 갚겠습니다."
아이 딸린 가난하고 천한 홀아비한테 시집올 여자는 없다. 구후영은 그저 여인 한 명의 목숨을 구한 거지만, 사내 입장에선 자신과 아이들의 인생도 함께 구원받았다.
그런데 작은 수고에도 큰돈을 주니 감격으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은혜는 안 갚아도 되니 착하고 바르게 사시오."
#
황하를 타고 동관에 도착한 구후영은 쉬지도 않고 바로 위하의 나루터를 찾았다.
"공자, 어디 가십니까?"
장알이 잔뜩 박힌 사공들이 꿀을 본 개미처럼 떼를 지어 달려들었다.
"서안부까지 가는데."
서안부란 말에 대부분 사공이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서안부까지 가려면 위하의 흐름을 역행해야 한다.
당장은 괜찮으나, 서안부가 가까울수록 물살이 세 큰 배는 무거워서 역행하지 못하고, 작은 배는 가벼워서 역행하지 못한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배 중에서도 사공이 한두 명인 배도 손님을 태우고 역행하지 못한다.
결국,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배 중에 사공이 네 명 이상인 자들만 남았다.
"당장 출발해야 하오."
이어지는 구후영의 말에 또 몇몇이 떠났다. 사공이 여럿이다 보니 각자 사정이란 게 있기 마련이고, 그 사정 때문에 당장 출발하기 어려운 배들이 있었다.
"공자, 음식만 장만하면 당장 출발할 수 있습니다."
구후영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 마지막 남은 사공의 배에 탔다.
은자 한 냥을 받은 네 사공은 구후영을 태우고 호호탕탕하게 흐르는 위하를 거꾸로 거슬렀다.
갈지자를 그리며 안정적으로 역행하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은 구후영은 낙화검법의 검의를 떠올렸다. 수비도 거의 공격으로 대체하는 낙화검법은 역류를 맞는 일이 잦아 느리나 꾸준히 상류로 역행하는 배의 움직임과 꽤 닮았다.
'난화검법은 상대에 맞춰 함정을 파는 검법이고, 낙화검법은 상대보단 자신을 주체로 펼치는 검법이다. 이 역시 태극이 아니겠는가.'
구후영이 불쑥불쑥 떠오르는 생각들을 차분히 정리하던 그때.
회색 인영이 갑자기 나타났다. 사공들의 부담을 덜려고 배 중앙에 가만히 앉아 있던 구후영은 배를 덮치는 회색 인영을 발견하고 급히 등에 멘 검 자루를 잡았다.
그런데 상대가 날개라도 돋친 듯 빨라서 미처 검을 뽑기도 전에 배에 닿았다.
톡.
다행히 회색 인영은 발끝으로 뱃전을 살짝 디딘 후 바로 떠났다. 배 위의 누군가를 노린 게 아니라 강을 건너는 디딤돌로 사용한 거였다.
구후영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검 자루에서 손을 뗄 때, 청색 인영이 불쑥 나타났다. 다행히 청색 인영도 회색 인영과 마찬가지로 뱃전을 발로 톡 찍은 다음 새처럼 날아서 사라졌다.
"와. 우와. 와!"
사공들이 노 젓는 것도 잊고 입을 헤벌린 채 감탄을 연발했다.
그러나 구후영보다 놀라진 않았다.
'배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더 경악할 만한 일도 있었다.
두전은 경공을 정식으로 배운 적 없고 산을 타며 몸소 체득했다. 그 탓에 빠르기나 은밀함은 괜찮은 수준인데 전체적으로 안 배운 티가 확연했다.
두전한테서 배운 구후영 역시 경공에 대한 조예가 별로 깊지 못했는데, 쇄악곡에서 정학의 제운종을 봤고 태원부로 가는 여정 동안 단아가 경공을 펼치는 모습도 봤다.
덕분에 안목만큼은 꽤 높은 편이다.
'어떻게 점점 빨라질 수 있지?'
구후영은 실력보다 훨씬 높은 안목으로 특이점을 정확히 포착했다. 갑자기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진 둘은 최고점을 찍고 몸이 하강할 때 오히려 속도가 빨라졌다.
강노지말强弩之末이라고, 활로 쏜 화살도 마지막에 가면 힘이 떨어지며 느려지는 게 상식이다. 배를 디딤돌 삼아 강을 건넌 두 남녀가 보여준 모습은 분명히 뭔가 대단한 재주를 부린 게 틀림없다.
"정신 차려."
나이 든 사공의 호통에 남은 자들이 황급히 노를 젓기 시작했다. 덕분에 강물에 떠내려가던 배가 조금씩 느려졌다. 어느 정도 물의 흐름을 따라잡자 배는 다시 갈지자를 그리며 천천히 상류로 갔다.
"공자. 오늘 여기서 쉬는 게 좋겠습니다."
날이 저물려 하자 사공들은 가까운 나루터에 배를 댔다.
"넌 가서 공자가 쉴 방을 좀 알아보아라."
중원에는 객잔이 없는 곳이 있는 곳보다 훨씬 많다. 그럴 때는 엽전 두 푼을 주고 방을 빌려 숙박하는 게 일반적이다.
"네."
제일 어려 보이는 사공이 나루터 근처에 보이는 마을로 달려갔다.
"공자, 혹시 길을 다그쳐야 합니까?"
집 얻으러 간 자를 기다리는 중에 나이 든 사공이 질문했다.
"그렇소. 시월 초하루까지 서안부에 도착해야 하오."
"그럼 내일부터 좀 더 서두르겠습니다."
#
낮에 본 경공의 풀리지 않는 의문을 고민하느라 새벽에야 겨우 잠든 구후영이지만,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않았다.
대신.
"이런 잡놈들이!"
분노는 여실히 느끼는 중이다.
아침에 일어나 나루터에 갔더니 배도 사공도 없었다. 선수금으로 받은 은자 한 냥을 들고 튄 것이었다.
'다 경계하지 않은 내 탓이다.'
구후영은 남 탓을 해봐야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분노를 다스렸다.
'질문이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아무런 예상도 못 했으니.'
어제 갈 길이 급하냐고 물었던 건 언제 튈지 시기를 가늠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좋은 경험 했다고 치자.'
길잡이 형제가 구후영이 하루 이틀 늦는다고 매정하게 떠나진 않겠지만, 한시라도 자룡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구후영은 사기꾼들을 징치하러 가지 않기로 했다.
'차라리 경공을 펼쳐 달리는 게 낫다.'
쭉 위하를 따라 달리면 서안부 근처에 도착한다. 강을 가까이 두고 움직이면 길 잃을 걱정도 전혀 없고, 경공으로 달리면 오히려 배보다 빠르다.
'그러고 보니 일부러 맞은편에 배를 댔구나.'
구후영은 위하의 북쪽에서 배를 탔다. 네 사공은 구후영을 위하의 남쪽에 내렸다. 설사 구후영이 돌아가더라도 강을 건너기 위해선 배를 타야 하고, 그사이 사기를 친 뱃놈들이 알아서 몸을 숨길 것이다.
'뭐, 강호 문파들도 별로 다르지 않으니.'
구후영은 용호표국과 산서 무림의 문파들을 떠올리며 남은 화를 마저 가라앉혔다. 구후영이 장문직을 승계하는 날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면, 방금 당한 것보다 수백 수천 배는 억울했을 것이다.
'약하면 당하고 어리석으면 당하는 게 세상이다. 약하지 않고 어리석지 않더라도 방심하면 당하는 게 강호다.'
구후영은 자신이 좀 더 경각심을 갖추기로 했다. 그러나 천성이란 게 있어 그게 잘될지는 본인도 별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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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놈의 하늘아!"
위하를 끼고 달리면 길을 절대 안 잃을 거란 구후영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단.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야!"
위하에 흘러드는 넓고 커다란 강이 구후영의 발길을 방해했다.
구후영의 경공으론 단숨에 강을 건널 수 없고, 몸에 지닌 전표나 장문검 때문에 수영으로 건너는 것도 선택 사항이 아니다.
'강이 좁아지는 곳을 찾을까? 아니면 뗏목을 만들까?'
잠깐 고민한 구후영은 뗏목을 만들기로 했다. 강이 어디서 좁아지는지 모르기에 차라리 뗏목이 확실해 보였다.
'큰 나무 여섯 개 정도만 묶어도 강을 건너는 건 문제없다.'
마음을 굳힌 구후영은 곧고 굵은 나무가 보이는 가까운 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작가의말
자나 깨나 사기 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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