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무중五里霧中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눈엔 천 송이 꽃이 흩날리고,
만신창이가 된 가슴엔 매정하게 떠난 임 아른거리고,
애꿎은 뱃속엔 독한 술로 슬픔이 무럭무럭 자라누나.
대부인과 자룡이 어찌나 슬피 우는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규찰대주마저 살짝 고개를 돌려 연신 눈물을 훔쳤다.
"조카. 섭섭해하지 마."
"네?"
연무쌍의 뜬금없는 말에 소매로 눈물을 닦던 구후영이 의문을 표했다.
"저 아이가 고모부를 빼닮았어."
연무쌍은 구후영과 만났을 때보다 훨씬 슬퍼하는 대부인 때문에 구후영이 괜히 섭섭할까 봐 나선 것이었다.
"이해합니다."
당시 대부인은 진짜 구후영을 찾은 기쁨이 있었지만, 정들었던 가짜 구후영의 죽음과 또 다른 혈육인 자룡이 행방불명인 걱정이 있었다.
마음껏 기뻐할 수 없었고, 마음껏 슬퍼하기도 그런 상황이었다.
이젠 자룡까지 찾아 시름이 푹 놓였고, 점점 흐릿해지던 그리운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자 그만 무너지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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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중원 어디에 가도 피할 수 없는 파도입니다."
두 손주를 모두 찾은 대부인은 더 바랄 게 없어 홍엽산장을 비운 채 어딘가 숨어 지내자고 했다.
"낙화문은 용호표국과 화산과 엮였고, 홍엽산장은 철혈방과 엮였고, 저는 마교와 엮였습니다."
구후영이 독한 마음을 먹어 낙화문을 버린다고 쳐도, 심지어 홍엽산장마저 버린다고 쳐도 가장 위험한 마교와의 관계가 남았다.
"맞습니다. 차라리 잘 해결하여 철혈방을 홍엽산장의 힘으로 바꾸면 다가올 난세에 더욱더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단아가 말했다. 그에 대부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젊은 사람들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럼 철혈대회에 참석하는 거로 하고 대안을 짜보죠."
구후영의 말에 장선이 고개를 저었다.
"대안을 세우려고 해도 아는 게 없다. 이번 대회는 철혈방주가 소집했다. 소집 이유는 금검당과 은도당의 당주 정도만 알겠지."
"철혈대회는 천 명 이상이 참석하는 대규모 집회라고 들었습니다. 생업에 바쁜 사람을 천 명 이상 모으는 게 쉽지 않을 테니, 누군가가 원한다고 함부로 열 수 있는 건 아니겠죠?"
단아의 질문에 장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주와 삼당의 당주, 오단의 단주가 발의권이 있고, 아홉 명 중에 여섯 명이 동의해야 비로소 열리는 대회요. 하는 일은 발의자가 제출한 안건을 토론하는 건데, 그건 사실상 중요하지 않고, 처음부터 금검당과 은도당이 다투는 장이 되어버렸소."
허수아비 방주는 단 한 번도 철혈대회를 소집한 적 없다. 이번이 처음이다.
철추당 역시 발의한 적 없다. 은자만 적당히 쥐여주면 원하는 대로 해주는 허수아비 방주를 빼고 철추당에 손들어줄 세력이 전무하기 때문이었다.
금검당이나 은도당은 확고한 세 개 세력이 있어 남은 셋을 회유하면 되는데, 허수아비 방주야 뇌물만 주면 되니, 철추당과 은마단隱馬團을 설득하는 게 일이었다.
철추당과 은마단은 그간 중립을 지키며 철혈대회를 소집할 때마다 톡톡히 이득을 챙겼는데, 은마단이 결국 금검당 밑으로 들어간 후엔 철혈대회가 소집된 적이 없었다.
철혈대회를 열 가망이 사라진 은도당이 소집 제안이 있을 때마다 어떻게든 철추당을 설득해 방해한 탓이었다.
"그럼 진짜 의외군요."
그간 조용히 있던 허수아비 방주가 철혈대회를 소집한 것도 이상하지만, 금검당과 은도당 모두 동의한 것 역시 그저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금검당이나 은도당 모두 상대가 허수아비 방주를 사주해서 철혈대회를 소집하는 게 아니란 확신이 있단 뜻인데. 허수아비 방주는 어떻게 양측에 확신을 줬을까요?"
단아의 말에 구후영과 규찰대주는 물론, 연무쌍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에 장선이 속으로 한탄했다.
'어떻게 사내자식들이 어린 여아 하나를 못 당하지?'
규찰대주야 완전히 외인이니 그렇다 치고, 구후영도 철혈방에 관해 아는 게 없으니 조금 실망하고 말 수 있으나, 전대 당주의 친자식이자 홍엽산장에 살다시피 한 연무쌍까지 단아보다 상황 파악이 느린 걸 보면서 은근히 속 터지는 장선이었다.
"이번 사안이 철혈방의 안위에 연관됐다는 뜻이겠죠. 굳이 홍엽산장까지 부른 걸 봐선 철혈방 전체의 힘을 모아야 하는 중대 사안 같습니다."
구후영이 요점을 정확히 집자 장선의 얼굴에 드디어 미소가 떠올랐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대부인이 속으로 한탄했다.
'멍청한 것들이 여아 하나한테 놀아나는구나.'
상황 파악을 끝낸 단아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 리 없다. 단아는 일부러 구후영이 활약하도록 필요한 정보만 던지고 뒤로 물러난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구후영의 영민함을 기뻐하는 장선을 보자 한심해 견디기 힘든 대부인이었다.
"그리고."
구후영이 한참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이게 함정일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합니다."
"함정? 무인이 천 명 넘게 참석하는데 무슨 함정을 팔 수 있지?"
장선이 궁금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질문했다.
"방주가 꼭두각시라면 조종할 수 있는 게 철혈방 사람뿐인 건 아니잖습니까."
"그리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단아가 질문했다.
"먼저 산서 무림의 동향을 보면, 용호표국의 담진웅이 뭔가 들은 게 있는지 연합을 구성했습니다. 그때 가장 깊은 곳에서 움직인다는 말했는데, 아무래도 이번 사태가 황궁에서 시작한 것 같습니다."
구후영의 말에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음엔 마교에서 겪은 일입니다. 화산과 무당을 비롯한 문파들이 어떻게든 전쟁을 일으키려 했고, 종남을 비롯해 소수만 말리려고 애썼습니다. 화산과 무당은 물론 수많은 문파의 이해득실이 일치하진 않을 테니, 분명히 이 모두의 뜻을 모을 만한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고개를 끄덕여 구후영의 말에 동의했다.
"철혈대회에서 철혈방을 어떻게 하려는 함정일 가능성은 작습니다. 제 생각엔 어쩌면 철혈대회의 안건 자체가 함정일 수 있습니다."
"조카. 좀 더 자세히 말해봐."
쭉 듣기만 하던 연무쌍이 구후영을 다그쳤다.
"마교가 무너지면 다음 순서는 종남과 철혈방입니다. 비록 마교의 분란이 잠시 종식되긴 했으나, 그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거지 불씨가 완전히 꺼진 건 아닙니다. 그럼 언젠가는 종남과 철혈방 차례가 온다는 건데, 이런 상황에서 철혈방은 어떤 출로를 모색해야 할까요?"
"납작 엎드려 모든 걸 바치고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거나."
낮게 중얼거리던 장선이 차마 말로 못 뱉겠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종남과 마교와 연합해서 반란을 일으키거나."
단아가 장선 대신 남은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건 아닐 거요."
다들 고개를 주억거리는 가운데, 연무쌍만 반대 의견이었다.
"삼촌은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금검당과 은도당이 반란처럼 어마어마한 일을 함께 도모할 리 없으니까."
연무쌍이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금검당과 은도당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습니까? 철혈방이 생긴 지 백 년이 넘는데 여전히 물과 불처럼 어울리지 못하는 건 조금 이상합니다."
구후영의 질문에 장선이 대답했다.
"홍건군이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켰을 때 철혈방은 소명왕을 지지했다. 소명왕이 송나라 황실 혈통이라고 주장했고 국호도 송으로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금검당은 개인적으로 주원장을 지지했고, 은도당은 진우량을 지지했다."
금검당은 호남의 철을 절강과 강소에 갖다 팔았는데, 절강은 주원장이고 강소는 장사성이었다. 금검당은 둘 모두와 줄을 대고 있다가 마지막 순간에 장사성의 줄을 끊고 주원장을 전력으로 도왔다.
명이 선 이후 황실이 철혈방을 가만둔 데는 금검당의 이유도 어느 정도 있었다.
은도당은 당주와 진우량이 동향이라는 이유로 군자금을 제공하며 도왔는데, 결국 주원장에게 패하며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진우량이 패망한 후 금검당이 철혈방을 통째로 삼키려는 시도가 있었고, 원래부터 잘 섞이지 못했던 둘의 원한이 한결 깊어진 계기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긴 하나, 결국엔 철혈방을 혼자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이군요."
장선의 긴 얘기를 단아가 한 문장으로 줄였다.
"차라리 철혈방이 이대로 망하길 바라야 할까요?"
구후영이 한탄했다.
구후영은 철혈대회에서 철혈방의 존속을 위해 모든 역량을 합치려고 하면 어느 정도 호응할 생각이 있었다. 철혈방 같은 문파가 망한다고 모든 영향력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게 아니기에, 홍엽산장의 입장에선 철혈방이 당장 망해 없어지는 것보다 같은 편으로 건재하는 게 낫다.
"둘이 합심하면 얘기가 달라지긴 할 텐데, 그게 가능한지 모르겠어요."
단아가 말했다.
"철혈방주의 안건이 둘의 마음을 합칠 정도로 대단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을 것 같소."
말은 그렇게 했으나, 정작 연무쌍 본인도 안 믿는 눈치였다.
"다들 피곤할 테니 오늘은 이만 마치는 게 좋겠소."
다들 엄청나게 애썼으나 정보의 부재로 결국 탁상공론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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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하세요?"
정자에 앉아 먼 산을 멍하니 바라보는 구후영에게 단아가 질문했다.
"제가 홍엽산장에 온 지 이틀이 지났습니다."
"네."
"아무도 안 찾아오네요. 홍엽산장의 장주가 나타났는데 말이죠."
"좋은 일이 아니군요."
철혈대회에 홍엽산장의 힘이 필요하다면 금검당이든 은도당이든 누구라도 왔어야 한다.
"필요도 없는데 불렀다는 건."
"들러리나 서라는 뜻이겠죠?"
단아의 말에 구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저었다.
"제물로 삼으려는 걸 수도 있죠. 반역을 결심한 거라면 충정忠貞의 상징인 홍엽산장이란 구심점은 오히려 방해될 테니깐요."
괜히 달라지고 나아지려고 애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기로 마음먹은 뒤, 구후영은 머리가 맑아지며 사물이 훨씬 명확하게 보였다.
덕분에 예전엔 전혀 보지 못하던 구석까지 살필 수 있었다.
"그럼 홍엽산장의 방비를 강화해야겠네요."
"네?"
"저들이 청첩을 보낸 건 구후 공자가 나타나기 전입니다. 당연히 장 당주나 연 대협이 참석할 거로 예상했을 겁니다."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
범을 밖으로 유인한 후 빈 산을 터는 계책을 이르는 말이다.
"그렇다고 철혈대회에 불참할 수도 없어요. 그러면 오히려 빌미를 줄 뿐이죠."
단아의 말에 구후영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단 소저는 어떤 고견이 있습니까?"
"구후 공자의 생각을 먼저 듣고 싶군요."
"할머니를 안전한 곳에 은밀히 모시고, 남은 사람은 일부가 홍엽산장을 지키고 일부는 철혈대회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구체적인 인선은요?"
"아직 거기까진 고민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규찰대주와 자룡이 대부인을 모시고 흑호채로 가는 겁니다."
단아의 말에 구후영이 손뼉을 짝 쳤다.
"묘책입니다."
"철혈대회는 구후 공자와 연 대협이 가는 게 좋습니다. 두 분 다 철혈방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한 분은 홍엽산장의 장주고 한 분은 전대 철추당주의 아들입니다."
"그럼."
"저는 장 당주를 도와 홍엽산장을 지킬게요. 저와 장 당주는 서로의 장점을 최대화할 수 있으니 홍엽산장을 지키는 데 누구보다 적합합니다."
- 작가의말
뒷부분 비축분을 엎기로 했습니다. 작위적인 느낌이 강해서 도무지 이어가기 힘들군요. 덕분에 비축분에 비상등이 들어왔습니다.
게다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최근 컨디션이 좋지 못해(코로나는 아니고요) 댓글을 엉뚱한 사람한테 달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바로 발견하고 삭제했지만 말이죠.
이러한 사정으로, 매일 연재 대신 하루 정해서 7편을 한꺼번에 올리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7편 올리는 건 같으나 제게 심리적인 여유가 생기는 거죠.
비축분 갈아엎는 진도와 컨디션이 돌아오는지 좀 더 지켜보고 정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댓글로 더 나은 의견 주시면 신중히 고민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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