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화합陰陽和合
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이 되어 동動(움직임)하니 이를 양陽이라 이르렀다. 동이 극極에 달해 정靜(멈춤)하니 이를 음이라 일컫는데, 정이 극에 달하며 다시 동했다. 정과 동이 서로 뿌리가 되며 음과 양으로 구분되니 이로써 양의兩儀가 생겼다.
음과 양은 기본적으로 대립하나 서로 뿌리가 되고 같은 태극에서 출발했기에 화합하기도 한다.
하늘이 양이면 땅이 음이고 낮이 양이면 밤이 음이다. 사내가 양이면 계집이 음이다.
하늘과 땅도 천애해각天涯海角에서 하나로 만나고 낮과 밤도 새벽과 황혼으로 만난다. 사내와 계집은 총각總角과 두관豆冠 나이에 만나 하나가 된다.
태극이 음양으로 나뉘고 음양이 만물을 낳았다. 마찬가지로 사내와 계집이 만나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도가는 음과 양이 만나는 힘이 생명을 창조할 정도로 강하고 위대하다고 여겼고, 음양이 만나는 횟수는 많으나 생명을 잉태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음에 착안하여 음양화합의 힘을 낭비하지 않고 본신의 힘을 기르는 데 쓰기로 했다.
음양화합은 초기엔 그저 방중술 정도로 여겨졌으나 시간이 흐르며 혈도와 운기 등을 결합하여 신속히 발전했다.
그러나 성공에 급급한 자들이 채음보양采陰補陽이나 채양보음采陽補陰으로 세간의 지탄을 받으며 기세가 주춤했고, 나라에서 일부일처제를 법으로 정하고 축첩을 명문으로 금지하면서부터 빠르게 쇠락했다.
채음보양이나 채양보음은 화합이 아닌 갈취다. 이 방문좌도旁門左道의 술은 당하는 자의 원기에 큰 손상을 끼치고 심지어 목숨까지 위태롭게 한다.
그러나 더 치명적인 건 축첩 금지령이었다.
음과 양의 화합이 그렇게 쉬웠으면 애초에 태극이 둘로 갈라질 이유도 없었다. 음과 양이 화합하여 서로에게 더 큰 힘을 주려면 조건이 까다롭다.
먼저 남과 여 모두 음양화합의 술을 비슷한 경지로 익혀야 한다. 둘의 경지에 차이가 현격하면 높은 쪽이 일방적으로 이득이고 낮은 쪽은 손해만 본다.
다음으론 품은 기운이 중요하다. 경지가 같다고 무조건 화합이 이뤄지는 건 아니다. 품은 기운의 성질이 서로 맞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두 조건 외에도 세세하게 따질 부분이 엄청 많다. 그렇기에 일부일처제가 확고히 자리를 잡은 지금, 자신의 경지와 기운에 맞춰 상대를 바꿔가며 음양화합을 수련하긴 몹시 힘들다.
백화궁이 대별산의 산간벽지에 자리를 잡은 이유다.
사형이라는 자가 오밤중에 순진한 사매를 꼬드긴 이유이기도 하고.
"사형, 멈춰요! 사형!"
경지가 높은 사형이 사매의 기운을 사정없이 갈취했다.
"멈추긴 뭘 멈춰. 네 기운을 흡수하지 않으면 난 내일 사부한테 불려가 진원을 잃고 마른 시체가 된다."
"사부가 알면 용서치 않을 거예요."
"사부가 모를 줄 알아? 사부의 묵인이 없으면 우리가 이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백화궁의 문제는 궁주가 최고수라는 것이다.
궁주의 경지가 독보적이어서 남자들은 일방적으로 기운을 뺏긴다. 궁주의 부름을 받은 제자 대부분이 시름시름 앓다가 며칠 안에 싸늘한 시체로 식어갔다.
이에 남제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짜냈다.
이들은 평소에는 기운이 맞고 경지가 비슷한 여제자와 수련하지만, 사부의 부름이 있는 즉시 순진하고 뭘 모르는 어린 제자를 꼬드겨 기운을 갈취해 사부의 마수에서 목숨을 지키기로 했다.
모든 사람에게 효과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남제자들이 죽는 일이 확 줄었다.
"여자끼리는 안 되니까 사부가 우릴 이용해서 너희 기운을 뺏는 거야. 나도 처음엔 우리 머리에서 나온 궁리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사부가 누군가에게 언질을 준 걸지도 모르지. 큭!"
이대로는 기운을 뺏기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자가 사내의 팔을 물었다. 그러나 기운을 갈취당하는 중이어서 세게 물지 못해 짧은 비명으로 끝났다.
"내 말 잘 들어. 내 손으로 널 죽이진 않을 테니 일이 끝나면 멀리 떠나라. 내 마지막 배려다."
그때.
"낭자. 내가 그대를 구하겠소."
구후영이 나타났다.
남녀의 일을 잘 모르는 구후영이지만, 본능적으로 부끄러운 일임을 직감하고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러나 밝아진 귀는 둘의 대화를 고스란히 들었고, 여자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의협심이 솟아 결국엔 끼어들었다.
"엇!"
그러나 옷섶을 헤치고 가슴을 다 드러낸 여자의 모습에 당황하여 눈을 질끈 감았다.
"넌 조금 있다 보자."
사내가 기운을 갈취하던 걸 그만두고 방해꾼을 공격했다.
'느껴진다.'
여자의 알몸을 보기 민망했던 구후영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런데 밝아진 청각과 예민해진 감각 덕분에 상대의 움직임이 눈으로 보듯이 그려졌다.
구후영은 느낌으로 사내의 장법을 피하면서 천공교검을 휘둘렀다. 급한 것도 있고 구후영이 눈을 감았다고 얕본 것도 있어 공격을 서둘렀던 사내는 그만 머리 가죽을 베이고 말았다.
화들짝 놀란 사내는 황급히 물러나 여인의 혈도를 짚은 다음,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구후영에게 접근했다.
'호흡이 거칠다.'
사내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려 애썼으나 숨이 몹시 거칠었다. 덕분에 구후영은 눈을 감았음에도 상대가 손에 잡힐 듯해 점점 여유가 늘었다.
반면, 사내는 거친 숨소리만큼 마음이 다급했다.
'빨리 해결해야 한다.'
사내는 구후영하고만 싸우는 게 아니다. 구후영의 방해로 여인한테서 갈취하고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기운이 안에서 말썽을 부리고 있다.
원래는 갈취한 기운을 안정시켜서 품고 있다가 내일 사부한테 넘겨줘야 하는데, 이대로는 어렵게 갈취한 기운이 다 날아가는 건 물론이고, 어쩌면 반발로 본인의 기운까지 소모될 수 있다.
'안 그러면 내 목숨이 위태하다.'
그저 보기엔 눈을 감은 구후영이 아주 불리한 상황이지만, 실속을 살피면 구후영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근데 눈은 왜 감았지?'
어려서부터 백화궁에서 자란 사내는 구후영이 여자의 알몸을 안 보려고 눈을 감은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유를 모른다고 유리하게 써먹지 못하는 건 아니다.
사내는 일격필살을 목적으로 하던 강한 장법 대신 백화요란百花繞亂의 초식으로 구후영을 상대했다.
'그런다고 모를 것 같아?'
사내는 내부에서 기운이 충돌하는 바람에 호흡은 물론 동작까지 거칠었다. 비록 세밀한 초식으로 바꾸긴 했으나 구후영은 사내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했다.
그러나 싸움이 길어지자 구후영도 슬슬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상대에게 지원군이라도 오면.'
상대에게 아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구후영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뒷걸음쳤다. 여인의 모습이 안 보이는 곳으로 사내를 유인한 다음 눈을 뜨고 제대로 상대할 생각이었다.
그걸 알았는지 사내가 구후영이 함부로 물러나지 못하게 장법으로 견제했고, 구후영은 다양한 초식으로 갖은 견제를 뚫으며 꾸준히 뒤로 움직였다.
'눈만 뜨면 내가 이긴다.'
사내는 내공이 깊으나 기운의 충돌 때문에 그 우위를 발휘하지 못했다. 구후영은 눈을 감고도 별 위협을 느끼지 못했기에 여인이 안 보이는 곳으로 가기만 하면 자신이 필승이라고 생각했다.
아쉽게도 그건 구후영의 오산이었다.
"어엇!"
뒷걸음치던 구후영은 갑자기 발아래가 휑한 느낌이 들었다. 황급히 한 발로 균형을 잡으며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데, 사내가 장법으로 심장을 공격했다.
구후영은 본능적으로 천공교검을 움직여 심장을 공격하는 상대의 손바닥을 막았다.
"악!"
미처 장법을 거두지 못한 사내의 손이 천공교검에 잘렸다. 그러나 기뻐할 새도 없이 구후영의 몸이 밑으로 훅 떨어졌다.
'멍청이.'
구후영은 목숨 걸린 일에도 예를 따져 눈을 감았던 자신을 호되게 욕하며 급히 개안했다.
약 이십 장 거리에 있는 바닥이 반갑게 마중 나왔다.
'물이 있다.'
구후영은 천공교검을 손에서 놓고 양팔을 쫙 폈다. 다리도 한껏 벌린 다음 어깨와 허리에 힘을 주며 물로 보이는 곳으로 움직이려 했다.
배운 적도 어디서 들은 적도 없지만, 구후영의 필사의 몸짓은 효과가 있어 조금씩 물이 고인 쪽으로 움직였다.
'다신 이런 멍청한 짓을 하지 말아야지.'
귀로 첨벙 소리를 듣고 살갗으로 물의 차가움을 느끼며 구후영은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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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게 아니었나?'
정신을 차린 구후영은 자신이 마른 땅에 누워있음을 발견했다.
"깼는가?"
갑자기 울리는 맑은 목소리에 구후영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켜 검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등엔 빈 검집만 있었다.
"진정하게. 해칠 생각이 없으니."
상대에게 악의가 없는 듯해 보이자 구후영도 경계를 살짝 풀었다.
"여긴 어딥니까?"
지하도시의 공동과 비슷한 크기인데 거기와 달리 순수한 자연이었고, 어딘가 빛이 들어오는 곳이 있는지 지하도시의 공동처럼 어둡진 않았다.
"여긴 취화봉 안의 동굴이네. 여기로 떨어지는 구멍이 합쳐서 셋 있는데, 젊은 친구가 나랑 같은 구멍으로 떨어졌어.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 게지."
옷이 해져서 거의 알몸이나 다름없으나 얼굴이 청수한 중년이 자상한 웃음을 지었다. 살집은 별로 없지만, 몸이 탄탄해 보였다.
기색도 태연한 것이 어려움에 빠진 사람 같지 않았다.
"여기 사람이 자주 떨어집니까?"
"보름에 한 번 정도? 보통은 여자가 떨어지는데 이번엔 남자여서 나도 깜짝 놀랐네. 혹시 백화궁에 무슨 변고라도 생긴 건가?"
"잘 모릅니다. 저는 순하로 가다가 길을 잃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순하? 저기 반송장이 된 친구가 아마 순하에 산다고 그랬지?"
그제야 구후영은 들릴락 말락 한 숨소리로 세 번째 사람을 발견했다.
"저 분은 언제 떨어졌습니까?"
"한 달 정도 됐을까? 처음엔 그래도 말 몇 마디 나눴는데 요샌 도통 입을 안 열어."
구후영은 거의 죽어가는 사내에게 다가가 이마에 손을 댔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계란을 지져도 될 정도로 뜨거웠다.
구후영은 꼭 감은 눈을 억지로 벌려 눈동자를 확인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는 사람인가?"
중년 사내가 질문했다.
"네. 제가 순하에서 찾으려던 사람입니다."
"장소가 좀 별로지만, 만나려던 사람을 만나게 한 걸 보면 하늘이 젊은 친구가 하는 일을 응원하나 보오."
'어쩌면 자룡이 멀쩡하게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너무 의기소침하지 말자.'
중년 사내 덕분에 우울하던 기분이 어느 정도 가셨다. 구후영은 조금은 개운한 마음으로 약초꾼의 치료를 시작했다.
"솜씨가 훌륭하군."
중년 사내가 구후영을 칭찬했다. 의술을 알아서가 아니고, 침 꽂을 때 힘을 균일하게 쓰는 구후영의 솜씨에 감탄한 거였다.
"그런데 선생은 무슨 일로 여기 오게 됐습니까?"
마지막 침을 꽂은 구후영이 질문했다.
"말하기 부끄럽구먼. 이 나이에도 나비랍시고 꽃을 찾아 헤매다가 그만 백화궁의 말벌에게 쏘였네. 그런 그대는 또 무슨 사연이 있는가?"
"저는 이 사람한테 용건이 있어서 순하로 가다가 그만."
구후영은 위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들려줬다.
"잘했네. 바르게 살면 당장은 손해일지 몰라도 길게 보면 이득이라네."
자신의 멍청한 행동에 후회막심이던 구후영은 중년 사내의 칭찬에 기분이 묘해졌다.
"저자랑은 또 무슨 사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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