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이불혹迷而不惑
자무산 위에 구름이 낮게 깔렸다. 산바람이 그런 구름을 양 떼 몰듯이 한곳에 모았다. 조우한 구름이 서로 반갑게 포옹했다.
그리고 빗줄기가 쏟아졌다.
미처 풀지 못한 회포가 굵은 빗줄기가 되어 자무산을 두드렸다. 산바람에 흔들린 빗줄기는 불규칙한 소리로 장원에서 이뤄지는 비밀스러운 대화를 더욱더 은밀하게 덮었다.
'이렇게 된 일이구나.'
구후영은 셋의 대화에서 귀를 떼고 혼자 생각에 푹 빠졌다.
막불위는 종남 장문이 되자마자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약 십 년에 걸쳐 청성산의 전답과 도관 그리고 장원을 사들인 것이다.
이는 막 부인의 도움이 컸다.
막 부인의 가까운 친척 중 하나가 성도부의 지부대인이다.
산이 높고 황제가 멀면 장수가 왕이라는 말이 있다. 성도부는 토번을 지척에 둔 탓에 꽤 많은 군대가 주둔했고, 군을 이끄는 장수들은 품계가 자신보다 높은 지부대인을 눈 아래로 봤다.
이들만 휘어잡으면 변경에 속하는 성도부의 지부대인이 왕처럼 지낼 수 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지부대인과 막불위는 장단이 맞았다. 막불위는 금선탈각으로 신분을 바꿔 당당히 살 것을 바랐고, 지부대인은 종남의 힘을 빌려 자신을 얕보는 장수들을 굴복하길 원했다.
그렇게 십 년에 걸쳐 조심스럽게 준비를 마치고 막불위는 동창에 고개를 조아렸다.
금선탈각은 매미가 허물만 벗고 떠나는 걸 말한다. 본체가 떠나기 전에 남길 허물을 골라야 했고, 막불위는 자신의 독단에 대한 반응을 통해 나름대로 옥석을 가렸다.
그렇게 반대하는 자들은 막 부인이 조심스럽게 설득해서 은밀하게 청성산에 보내고, 막불위를 지지하는 자들은 끝까지 종남의 이름으로 남는 게 원래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원래 칠 년에서 십 년 정도의 기한을 잡고 천천히 시행할 생각이었는데, 화산 기종이 꿍꿍이를 품고 종남에 중요한 정보를 흘렸다.
관문을 넘어 들어온 북원 기병이 화산이 보유한 점포들은 그대로 두고 종남의 것만 약탈할 거란 정보에 막불위는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점포들에서 나오는 재물이 아니면 종남은 채 일 년도 못 버틸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문제라면, 막불위가 평범한 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막불위는 화산 기종의 바람대로 움직이긴 했으나 예상대로 움직이진 않았다.
막불위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과 종남칠검을 데리고 화산 검종을 돕기로 했다.
거기에서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죽고, 혼란한 틈을 타 종남 제자들이 일거에 청성으로 넘어간다.
화산의 싸움에 끼지 못하고 청성에도 못 간 자들은 남아서 종남의 허울을 유지하다가 서서히 사라지는 역할이었다.
막불위를 따르지 않는 종남칠검이 화산에서 죽는 역할로 낙점받은 건 이들이 강호에 이름과 얼굴이 알려진 탓이었다.
그런 상황에 갑자기 안물이 사람을 통해 서신을 보냈다.
구후영 등이 칠 년근 설련을 얻으러 종남에 간다고.
막불위는 그 서신에서 자신의 계획이 탄로 났음을 깨달았다. 아니면 평소 왕래가 없던 안물이 뜬금없이 서신을 보내 맥락없는 소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 막불위는 급하게 계획을 수정했다. 괜히 무시했다가 자신의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것보단 서신을 보낸 자의 뜻에 맞춰 움직이기로 했다.
'우리도 죽이려 했었구나.'
막불위의 계획이 틀어진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구후영 일행이 생각보다 강했고, 하나는 흑철의 돌발행동이었다.
계획이 틀어질 변수가 둘이나 있고, 개중 하나는 갈피조차 잡기 힘들었다. 막불위는 다급히 계획을 수정했고, 그 결과가 현재 상황이다.
'안물을 움직인 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하다.'
안물의 머리에 벌레를 심은 것만 해도 평범한 짓이 아니다. 안물이 구후영에게 치료를 부탁한 것도 혹시 시킨 대로 해도 자기 머리에 든 벌레를 제거해주지 않을까 봐 걱정되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니 벌레를 제거한 후에도 누군지 모를 배후의 지시에 충실히 따랐고, 홀몸으로 도망치기까지 했다.
'종남의 계획도 알고 있었다는 건데. 화산 기종이 종남에 정보를 흘린 사실도 알고.'
구후영은 아는 게 하나 없이 사방이 캄캄한데, 누군지 모를 대단한 배후는 모르는 게 없는 듯했다.
물론, 이토록 암울한 상황에도 구후영은 낙심하지 않았다.
'살인이 잘한 건 아니지만,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구후영은 옥녀봉 꼭대기에서 수십 명의 낯선 사람을 죽였다. 원칠처럼 초면이 아닌 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구후영이 옥녀봉에 가지 않았다면 평생 볼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마교가 낙화문과 연원이 있는 화산 검종을 죽이러 간 건 잘못이지만, 구후영이 회초리를 들 자격은 없다.
그게 내내 마음에 걸렸는데, 이젠 아니었다.
'나랑 무관한 일에 끼어들어 불필요하게 살생했다고 생각했는데.'
무관한 일이 아니었다. 구후영은 물론이고, 마교와 종남과 화산 모두 계획의 일환이었다.
'살인이 옳은 건 아니지만, 그거로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사십에 이르러야 불혹을 이룬다고 하는데, 난 이제 겨우 약관 아닌가.'
혼란스러운 건 여전하다. 그러나 혼란에 빠져 계속 헤맬 수는 없었다.
'모르는 일을 억지로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혼란스럽다고 흔들리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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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군을 따르던 자들의 시신을 화산에 버리며 겸사겸사 마교 제자들에게 종남의 옷을 입힐 겁니다."
여인이 막불손과 옥무영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종남은 태을산에 남은 수십 명 빼고 화산에서 전멸당한 게 됩니다."
"마교가 아니라고 하면."
"마교의 말을 누가 믿습니까? 게다가 실패한 마당에 나서서 공을 부풀리지 못할망정, 우리가 부풀려준 공을 아니라고 부정하겠습니까?"
여인의 따끔한 질책에 막불손이 겨우 열었던 입을 꾹 다물었다.
"시숙을 비롯한 종남칠검은 함께 청성으로 가야 합니다. 대신."
시종 거침없던 여인이 잠시 머뭇거렸다.
"얼굴을 훼손해야 합니다. 사용하는 검을 바꾸고 초식도 변형해야 합니다."
"그러하지."
예상외로 막불손이 순순히 수긍했다.
"그리고 여기 옥 장문과 단독으로 할 얘기가 있으니, 두 분은 이만 나가주십시오."
여인의 말에 구후영은 바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고, 막불손은 잠깐 주저하다가 구후영의 뒤를 따랐다.
"밖에 누구 없느냐. 가서 구슬勾膝이를 데려오거라."
여인의 외침이 끝나고 잠시 후,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잘생긴 아이가 방에 들어왔다.
"소자 막구슬이 어머님께 문안 올립니다."
"여긴 무당 장문 옥무영 대협이다."
"옥 대협의 명성은 귀에 못 박히게 들었는데 이리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그래, 반갑구나."
구슬은 무릎을 굽힌다는 뜻이다. 그런데 성이 붙으며 무릎을 꿇지 말라는 뜻이 되었다.
"막 장문은 남자를 좋아합니다."
인사를 끝낸 막구슬을 그대로 세워둔 채, 여인이 말했다.
"그게 무슨."
"천마는 종남을 몇 번 방문한 적 있는데, 막 장문은 우연히 천마를 본 순간 사랑에 빠졌습니다."
"어허, 아이 앞에서 무슨 망발이오."
진심으로 당황한 옥무영이 뻘게진 얼굴로 여인을 말렸다.
"아이도 아는 일입니다."
옥무영은 아이의 태연한 기색을 확인하고 손을 저어 얼굴의 열기를 식혔다.
"그래서 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가정을 이뤄야 장문이 될 수 있기에 저랑 혼인하긴 했으나, 절 단 한번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여인의 말에 옥무영의 뻘겋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얘졌다.
"이 아이는 옥 대협의 아들입니다."
그런 옥무영에게 여인이 쐐기를 콱 박았다.
"아니, 어떻게."
"세상일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백날 노력해도 안 되던 일이 우연히 성공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옥무영은 여인과 십여 년 전에 만나 하룻밤을 보냈다.
"죄책감을 느끼진 마세요. 어차피 막 장문도 아는 일이었습니다."
여인의 말에 옥무영은 놀란 가슴을 애써 달랬다.
"사실 막 장문이 부추긴 부분도 없진 않습니다. 두 분이 체형이나 얼굴이 닮아 아이를 낳아도 의심을 안 받을 것 같았으니깐요."
옥무영의 조상은 종남 출신이고, 막불위의 가문 역시 대대로 종남에 속했다. 수백 년 전에 피가 섞였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소자, 생부께 인사 올립니다."
아이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자 옥무영은 멍하던 머리가 갑자기 맑아졌다.
'대를 이을 수 있게 됐구나.'
음기나 양기가 강한 체질은 오래 살지 못한다. 그렇기에 풍옥문은 아들을 둘씩 낳는 경우가 드물었다.
자식을 먼저 보내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는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으니까.
그 탓에 풍가는 풍불지에서 대가 끊겼고, 옥가 역시 옥무영에서 대가 끊길 예정이었다.
이대로 풍옥문도 끝이구나 했는데, 뜻밖에 아들이 생겼다.
어리벙벙한 가운데도 기쁜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서 일어나 가까이 오거라."
옥무영은 다가온 아이의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봤다.
'할머니를 많이 닮았구나.'
아이 얼굴은 옥무영보단 옥무영의 어머니를 더 닮았다.
'근골도 좋고.'
근육이 유연하고 힘줄은 튼튼하다. 뼈야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아 판단하긴 어려우나, 골격 자체는 훌륭하다.
'다리가 곧고 팔이 길고 손아귀가 단단하고 손목도 굵고.'
검 익히기엔 정말 좋은 신체 조건이었다.
'사부보단 사제가 낫다.'
이제 만난 지 반 각도 안 되었건만, 옥무영은 벌써 아이의 사부를 풍불지로 할지 구후영으로 할지 고민하며 온갖 상상에 빠졌다.
"그래서 말인데."
여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옥무영의 즐거운 상상을 잘라 버렸다.
"저랑 혼인하고 청성파 장문이 될 생각은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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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돼서, 난 청성으로 가기로 했다."
여인과 깊은 대화를 마친 옥무영이 구후영과 원경을 불러 놓고 작별을 고했다.
"잘됐군요."
구후영이 부인과 아들을 한꺼번에 얻은 옥무영에게 축하를 보냈다.
"형님께 더 많이 배우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신변 정리가 끝나면 꼭 청성에 가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우리 꼭 자주 보자."
구후영과 원경과 거듭 포옹한 옥무영이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종남의 무리와 함께 떠났다.
커다란 장원엔 졸지에 구후영과 원경 그리고 취연만 남았다.
"막 장문은 참 대단한 사람이군요."
시커먼 구름이 달을 가리고 빗줄기가 시야를 방해하는 상황에도 구후영은 멀어지는 옥무영의 등을 끝까지 주시했다.
"갑자기 왜?"
"사형이 신검의 제자인 걸 알고 십 년도 더 전부터 연결고리를 만들었잖습니까."
막구슬이 옥무영의 자식인지는 알 바가 없다. 옥무영의 아이일 수도 있고 막불위의 아이일 수도 있고, 어쩌면 다른 사내의 아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실이 어떻든 간에, 종남이란 허울을 벗고 청성이란 새 옷을 입은 전진교의 후예들은 신검의 제자를 장문으로 모시게 되었고, 신검이란 어마어마한 뒷배가 생겼다.
"강호엔 대단한 사람이 많은 것 같구나."
"강호뿐이겠습니까."
군과 관과 황실에도 대단한 자들이 득실거린다.
"이제부터라도 정신을 차려야죠. 계속 휘둘리기 싫으면 말입니다."
옥무영의 뒷모습이 끝내 사라진 곳을 일별하며 구후영이 마음을 거듭 다졌다.
- 작가의말
미이불혹 - 어리벙벙하긴 하나 그거로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있는 표현은 아니고, 제가 미혹이란 단어를 쪼개서 만들었습니다.
막불위가 준비한 선물 삼종세트(부인, 아들, 장문 자리)를 옥무영이 수령함으로써 종남 파트가 끝났습니다. 구후영의 추측과 달리 막불위는 구후영과 옥무영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옥무영이 살아서 청성파 장문이 돼야 했으니깐요.
이 파트는 조금 더 느린 호흡과 긴 분량으로 쓸까 고민도 해봤습니다. 그러나 답을 보여주기보단 질문을 던지는 내용 위주기에 주관적 설명은 최대한 줄이기로 했습니다. 부족한 필력 탓에 글의 흐름이 부실하게 느껴진 게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미리 말씀드렸듯이, 3부의 마지막 파트는 10월 초에 일괄로 올려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는 눈 수술로 한층 진해진 쌍꺼풀을 감상하러 거울 앞으로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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