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멸조欺師滅祖
예전에 어떤 총명하기 그지없는 스님이 있어 어린 나이에 수백 권의 불경을 줄줄 외울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불경을 읽어도 스님의 고뇌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에 스님은 부처님께 간절히 빌었다. 모든 고뇌가 사라지게 해달라고.
스님의 정성이 갸륵했는지 백 일째 되는 날 부처가 꿈에 현신했다. 부처는 절간 바로 뒤의 산꼭대기에 해답을 뒀으니 날이 밝거든 찾아보라고 했다.
새벽에 잠에서 깬 스님은 기쁜 마음으로 잠시도 쉬지 않고 단숨에 산꼭대기에 올랐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부처가 말한 해답이 보이지 않았다.
스님은 염불도 건너뛰고 날이 저물 때까지 해답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엔 배고픔과 피곤을 못 이겨 바위에 기대 잠들었는데, 꿈에 부처가 나타났다.
화가 잔뜩 난 스님은 해답이 도대체 어딨느냐고 부처를 추궁했다.
그에 부처가 물었다.
산에 올라오는 길에 샘물을 보았느냐.
산에 올라오는 길에 나무를 보았느냐.
산에 올라오는 길에 바람을 보았느냐.
산에 올라오는 길에 나비를 보았느냐.
스님은 모든 질문에 '아니오'로 대답했다.
해답은 산꼭대기에 있는 게 아니라 네 마음에 있다. 산꼭대기까지 오르면서 네가 주변을 살폈더라면, 주변에 비춰 자신까지 살폈다면 이미 해답을 찾았을 것이다.
위 이야기는 소림 제자들이 칠십이절기를 쉽게 익히는 비결을 알려달라고 했을 때 공유 스님이 들려준 얘기다.
"정 그러시면 제자라도 받아주십시오."
아무리 가르침을 달라고 간청해도 칼같이 거절하는 공유에게 소림은 결국 제자를 들이라고 요구를 바꿨다.
"딱지치기로 날 이기는 사람이 있으면 제자로 받겠다."
거절에 지친 공유는 읽던 불경을 찢어 딱지를 만들고는 자신과 딱지치기해서 이기는 사람이면 누구든 제자로 받는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공유는 늘 선공을 고집했고, 단번에 상대의 딱지를 넘겨버렸다.
그렇게 십 년이나 공유를 이기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다들 낙심하던 차에, 정식 승호僧號조차 받지 못한 어린 동자승이 나섰다.
동자승은 자신의 딱지 위에 무거운 돌을 놓는 거로 공유의 선공을 버텨냈고, 공유 역시 똑같이 딱지 위에 돌을 올리자 공유의 딱지를 돌 밑에서 뽑아낸 다음 손으로 뒤집고는 자신이 이겼다고 우겨댔는데.
놀랍게도 공유가 패배를 인정하며 동자승을 제자로 받았다.
#
"계율원주는 어서 원경을 찾아내서 공유 사숙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지 확인하시오."
방장의 지시에 계율원주와 계도승 열 명이 연무장을 떠났고.
한참 후에 계율원주 혼자서 돌아와 방장의 귀에 짧게 속삭였다.
"참담한 일이오."
계율원주의 보고를 들은 방장이 깊이 탄식했다.
"원경이 방금 사부를 시해한 사실을 시인했소."
방장의 발언에 연무장이 잠깐 고요해졌다가 일제히 들끓었다.
방금까지 다들 소림이 최근 상승세인 무당의 기세를 누르려고 무림대회를 열었다고 확신했는데, 갑자기 공유를 해친 흉수가 소림 제자라고 순순히 인정하자 커다란 혼란이 온 것이었다.
'의형이 진짜 흉수일까?'
구후영 역시 예상을 벗어난 흐름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소림은 진심으로 흉수를 찾으려 했던 걸까?'
'아니라면, 소림이 왜 자기 제자를 흉수로 몰지?'
'왜 또 굳이 무림대회를 열어서 일을 키웠을까?'
구후영이 온갖 생각으로 갈팡질팡하던 그때, 옥무영이 나섰다.
"무당은 혐의를 벗은 거요?"
한 선생이 서신으로 죽여달라고 지목한 둘은 다름 아닌 구후영과 원경이었다.
소림의 수뇌부는 원경을 사지로 유인해 자멸시키기로 했고, 구후영은 원철이 대결을 핑계로 죽이기로 했다.
그런데 그만 원철이 지고 말았다.
원철의 실패에 방장은 우문현을 내세워 혹시나 해서 준비한 계책으로 어떻게든 구후영을 흉수로 몰아가려 했다. 여래신장을 펼친 원철을 가볍게 이긴 구후영이고, 공유의 제자인 원경과 결의형제고, 천공교검의 주인이기도 하기에 아주 억지 주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진행 과정에 방장은 문득 구후영이 경공을 펼쳐 도주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떠올랐다.
구후영이 오명과 겨룰 때는 물론이고 원철과 첫 대결을 펼칠 때 역시 어마어마한 수준의 경공을 보여줬기에 아주 기우는 아니었다.
그에 방장은 이미 죽었거나 곧 죽을 것이 확실한 원경을 흉수로 지목하기로 했다.
공유의 죽음을 구후영의 단독 소행으로 몰면 소림과 구후영 사이의 사건으로 끝나는데, 원경이 흉수면 기사멸조의 죄가 성립되어 강호 전체의 일이 되므로.
혹여 구후영이 도주하더라도 소림뿐이 아닌 강호 전체가 쫓고 죽이려 할 것이다.
이러한 속셈으로 방장은 계율원주를 보내 원경이 사지에 들어갔는지 확인한 다음 독단으로 계획을 변경했고.
"그렇소."
이젠 한 선생의 요구와 무관해진 무당이 끼어들어 방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깊이 생각지 않고 옥무영의 말에 수긍했다.
"그렇다면 무당은 이만 돌아가겠소."
유일하게 훼방꾼이 될 수 있는 무당이 떠난다고 하자 방장은 속으로 환호하며 접객화상에게 배웅을 지시했다.
"오해가 생긴 부분에 관해선 당분간 무당에 정식으로 해명하겠소. 사제, 이만 손님을 바래시게."
그런데 부처님이 노하셨는지, 일은 방장이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았다.
"사제, 이제부터 네가 무당의 임시장문이다."
옥무영이 송문검을 끌러 무당 제자들이 모인 쪽에 던지며 야비한 얼굴로 히죽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요?"
얼떨결에 송문검을 받은 사제가 떨떠름한 얼굴로 질문했다.
"나는 장문이 된 이후 무당을 위해 노심초사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오늘 소림의 행사를 보고 내가 얼마나 게으르고 무능했는지 끝내 깨달았다."
옥무영이 대놓고 소림을 비아냥댔다.
"문제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소림처럼 할 자신이 없다는 거다. 그러니 이만 장문 자리를 내놓아야지 않겠느냐."
'큰 사고를 칠 눈빛이다.'
옥무영의 눈을 확인한 사제가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예전부터 옥무영을 좋아했고, 바뀐 다음엔 더 좋았는데.
'이제 겨우 장문다운 장문이 되나 싶었는데, 참으로 안타깝구나.'
출발하기 전에 장문이 사고 못 치게 잘 처사하라던 사부의 신신당부가 떠올랐다.
"옥 대협께선 부디 보중하시오. 무당은 이만 소림과 무림대회의 강호 동도들께 작별을 고하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당 제자들이 자리를 차고 일어나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제길. 장로들이 여차하면 날 버리라고 지시했구나.'
옥무영이 예상했던 걸 장로들이라고 몰랐을 리 없으니, 아무래도 여차하면 옥무영을 버리고 무당을 보전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했을 것이다.
'뭐, 처지가 바뀌면 나라도 똑같이 했겠지.'
무당의 냉정한 대처에 약간의 섭섭함을 느끼긴 했으나, 옥무영은 곧장 심정을 수습하고 소림 방장을 향해 호기롭게 외쳤다.
"쑥스럽지만, 다시 소개하겠소. 풍옥문의 소문주 옥무영이오. 풍옥문은 문주인 풍불지 대협과 구후영과 내 제자까지 총 네 명이 소속돼 있소."
그제야 옥무영한테 놀아났음을 깨달은 방장은 이를 꽉 깨물었다.
사대신협 중에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건 신장이다. 홍기영은 내공이 마르지 않고 공수가 완벽히 조화하여 무인으로서 완성되었다는 평가다.
세력이 가장 큰 건 신도다. 팽창회는 군과 관은 물론이고 강호에도 인맥이 탄탄한 팽가의 직계다.
그러나 강호에서 진정 두려워하는 건 신창과 신검이다.
악불형은 성격이 거칠고 사람이 단순하여 종종 사고를 일으킨 바람에 사대신협 중에서 가장 악명이 높다. 풍불지는 평소 격이 없어 무골호인처럼 보이는데, 정작 검을 뽑으면 상대가 누구든 손속에 자비가 없고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
'신검을 잊고 있었구나.'
방장이 선뜻 놔준 덕분에 옥무영은 무당이란 굴레를 벗고 신검이란 날개를 달았다.
"풍옥문을 대표해 소림에 질문하겠소. 진정 내 사제가 공유 스님을 살해하는 일에 가담했다고 여기시오?"
대부분 문파에 무당과 싸울지 신검과 싸울지 고르라고 하면 고민할 수밖에 없으나, 중원 최강의 문파인 소림에겐 단연코 무당이 편하다.
소림이 무당보다 확실히 강하고 고수도 많으며, 둘이 강호에서 차지한 지위 때문에 적절한 선에서 싸움이 멈출 수밖에 없다.
반면, 경공이 천하제일로 알려진 신검과 싸우면 소림은 커다란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옥무영은 방장이 구후영의 혐의도 벗겨줄 줄 알았는데.
"소림은 약 사 년 전에 원경을 술과 고기를 탐해 계율을 누차 어긴 벌로 오대산에 보냈소. 부름이 있기 전에는 오대산을 떠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얼마 전에 원경이 사문의 명을 어기고 사사로이 소림에 돌아왔고, 며칠 뒤에 공유 사숙이 살해당했소."
전혀 다른 얘기를 했고.
"원경이 방금 자신이 흉수임을 시인했으나 공유 사숙을 살해한 검이 누구의 것이고 어떻게 얻었는지, 왜 사부를 시해했는지는 침묵하고 있소. 조사가 부실해 애꿎은 무당을 끌어들여 곤란하게 만든 점은 소림의 이름을 걸고 진심으로 사과하오."
무당에 사과하는 척하면서.
"소림은 구후 소협이 원경의 천인공노할 기사멸조의 행위에 직접적인 도움을 줬거나 검을 빌려주는 간접적인 도움을 줬다고 판단하오."
오히려 구후영의 혐의를 키웠다
"사제의 검은 무당의 해검지에서 분실했소. 이건 확실하오."
"다시 무당을 불러 확인해보시겠소?"
이번엔 옥무영의 이가 갈릴 차례였다.
신검이란 날개를 달면 소림이 구후영을 함부로 못 건드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천공교검의 분실을 증명해줄 무당이란 아군만 잃었다.
'도대체 사제가 소림에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까지 나오지?'
"게다가 분실한 검을 되찾지 못했다는 말은 어찌 믿으란 말이오?"
방장과 옥무영의 대화를 들으며 최종필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코가 간지러웠다.
'냄새가 난다.'
이름 석 자도 모양을 외워서 겨우 쓰는 최종필이지만, 사건을 수사할 땐 세상 누구도 안 부러울 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갔다.
'시궁창 냄새가.'
길잡이 형제와 함께 죽개방주를 만났던 일, 소림이 죽개방주를 죽인 일, 소림이 길잡이 형제를 데려간 일.
이 모든 게 우연이면 최종필은 할복할 의향도 있었다.
'결국엔 화씨 형제를 찾아야 하나?'
최종필이 소림에 온 건 자신을 장선에게 이어줄 길잡이 형제 때문이었다. 공유의 시신도 길잡이 형제를 찾는 과정에 우연히 봤던 거고, 계도승에 쫓기다가 뜻밖에 구후영과 만난 다음엔 원수나 다름없는 둘을 잠깐 잊었었다.
'이대로도 좋은데.'
귀찮음과 위험을 무릅쓰고 소림에 몰래 들어와서 길잡이 형제를 찾은 게 다 장선과 연줄이 닿기 위함인데, 더 확실한 구후영의 줄을 잡았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원경 스님은 어디 계시오?"
억울하게 몰리고 있음에도 구후영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에 최종필이 마음을 바꿨다.
'문제는 자꾸 돕고 싶단 말이지.'
"도주의 염려가 있어 구후 소협을 포박하는 게 순서 아닌가 싶은데, 손님들의 생각이 궁금하오."
방장의 말에 사람들이 술렁이는 틈을 타서 최종필이 몰래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사나이 최종필, 어떻게든 공을 세워 반드시 장 대협의 제자가 되어 여의권을 꼭 배우고야 만다.'
- 작가의말
시작할 때 이야기는 제가 꾸며낸 건데, 예전에 어디서 본 건가 싶기도 합니다. 혹시 비슷한 이야기를 보신 분 계시면 댓글로 출처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옥화 님이 추천 글을 써주셨습니다. 연재를 잠시 중단할 염려가 있는데도 믿고 추천해주시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꼭 완결을 이뤄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끝으로, 딱지치기해서 이기면 10만 원 주는 게 아니었나요?
Comment '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