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회관통融會貫通
한 뿌리에서 나온 나무는 같은 꽃을 피우고 같은 씨앗을 뿌리고, 싹을 튼 씨앗들은 똑같진 않으나 대체로 비슷한 나무로 자란다.
회남의 귤을 회북에 옮기면 탱자가 되기도 하지만, 그저 맛이 달라졌을 뿐 귤과 탱자는 비슷한 과일이다.
'운룡대구식의 무의武意는 일과 은.'
일逸은 아무런 근심과 걱정 없이 편한 상태를 말한다. 은隱은 잘 보이지 않게 숨거나 숨겨진 걸 말하는데, 희미함을 뜻하기도 한다.
'난화검법의 무의는 유와 현.'
유幽는 그윽하고 깊음을 뜻하고, 현賢은 어짊을 말한다. 상대를 깊이 끌어들이는 방식을 선호하고 공격보단 수비에 치중하는 난화검법과 꽤 어울린다.
'낙화검법은 오와 결.'
오傲는 꺾이지 않음을 뜻하고, 결潔은 깨끗함을 말한다. 공격 위주의 낙화검법은 쉬이 꺾이지 말아야 하고, 변화에 집착하여 군더더기가 많은 번잡한 검법이 되는 걸 경계해야 한다.
'셋은 다르나 다르지 않다.'
낙화검법의 수백 개 초식과 난화검법의 수십 개 초식이 구후영의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며 해체되고 조합되기를 반복했다. 구후영이 깨달은 운룡대구식의 작은 조각은 둘을 붙이는 아교로 사용되었다.
슉.
눈을 맞으며 가만히 서 있던 구후영이 갑자기 번개 같은 찌르기를 펼쳤다. 누가 봐도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고 대단한 찌르기인데, 정작 구후영 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천공교검을 천천히 회수했다.
'경공이 일취월장한 덕분에 초식을 펼침에 있어 여유가 커졌다.'
찌를 때와 휘두를 때의 자세가 다르고, 휘두름의 각도에 따라 또 자세가 다르다. 빠르게 찌를 때와 느리게 찌를 때의 자세 역시 다르며, 강하게 휘두를 때와 부드럽게 휘두를 때의 자세 역시 구분된다.
경공이 뛰어난 자는 빠르게 자세를 바꾸는 거로 초식의 위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구후영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경공을 배제해도 완전하고, 경공을 곁들이면 더욱 강해지는 검법을 찾아야 한다.'
구후영이 원하는 건 경공으로 몸을 빠르게 움직이지 않고 기본 보법만 사용해도 별 허점이 없는 완전한 검법이지 그저 위력만 강한 검법이 아니었다.
휙.
검을 가로로 휘두른 구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젓고, 젓다가 끄덕이기를 반복했다.
"괜찮을까요?"
멀리서 지켜보던 단아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마음이 단단한 아이니 괜찮을 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연무쌍의 얼굴에도 걱정이 가득했다.
"여의권을 가르쳤으면 좀 나아졌을려나."
여의권은 입문할 때 익히는 형이 있지만,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후부터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무공이다. 그 탓에 자질이 부족한 자는 암만 수련해도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구후영은 자질이 꽤 출중했지만, 이미 검법을 높은 수준으로 익힌 터라 연무쌍과 장선 모두 여의권을 가르치길 꺼렸다.
그런데 지금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고 깊은 고민에 빠진 구후영을 보니, 여의권을 가르치는 게 나았지 않나 싶은 마음이었다.
"그럼 저 아이는 여의권에 갇혔을 거요."
연무쌍이 장선의 말에 반박했다.
"갇힌다라."
연무쌍의 말을 중얼거리던 장선이 얼빠진 얼굴로 굳어버렸다. 그에 단아와 연무쌍이 기척을 죽이고 조용히 물러났다.
#
"영이는 아직이냐?"
반나절 동안 얼이 빠져 있던 장선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반 시진이나 여의권을 펼치며 난리를 피웠다.
큰 소동은 아니었지만, 주먹이 바람을 매섭게 가르는 소리에 놀란 왕경초와 공형선이 부산을 떨며 뛰쳐나왔고, 그 탓에 홍엽산장에 기거한 사람 모두가 깨고 말았다.
기왕 깬 김에 술이나 마시며 구경하자는 규찰대주의 제안에 화로가 지펴지고 술상이 차려졌고, 일행은 술과 화로의 열로 몸을 덥히면서 점점 정갈해지는 장선의 여의권을 감상했다.
그렇게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장선이 여의권을 멈췄고, 그제야 연무장 구석에서 검을 든 채 가만히 서 있는 구후영이 일행의 눈에 들어왔다.
"큰 걸 깨달으려는지 오래 걸립니다."
연무쌍의 말에 화로에 젖은 옷을 말리던 장선이 탄식했다.
"팔꿈치는 안으로 굽는다더니. 자기 조카 치켜세우려고 사형을 깎아내리는구나."
"사형은 철추당 당주가 되기 전부터 여의권의 끝을 밟았는데 이제야 겨우 문턱을 넘었잖소. 이십 년도 더 넘은 기간이 걸렸으니 당연히 내 조카보다 훨씬 대단한 걸 깨닫지 않으셨겠소?"
연무쌍은 평소와 달리 일부러 말투에 격식까지 차려가며 전력을 다해 장선을 놀렸다.
"그래. 연무쌍이 입만 여물고 주먹은 아직 여리다는 걸 깨닫긴 했지."
새벽이 밝으며 술이 동나자 사람들은 여전히 꼼짝도 안 하는 구후영을 내버려 두고 각자 취침하러 방으로 돌아갔다.
#
"슬슬 깨워야 하지 않을까?"
처음엔 그래도 가끔 검을 휘두르기라도 했다. 그러나 사흘째부턴 얼음 조각상이라도 된 듯 미동도 없이 서 있기만 했다.
"그러다 평생 원망받으면 어쩌려고."
"저 어린 나이에 무슨 깨달을 게 저리 많을까?"
장선과 연무쌍의 대화에 단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많은 게 아니라 깊은 겁니다."
"교주가 오셨군."
홍엽산장에 복귀할 때마다 중요한 소식을 들고 왔던 단아다. 더러는 아니지만, 대부분 유용하고 희망적인 소식이어서 연무쌍과 장선은 단아의 출현을 더없이 반겼다.
"이젠 말씀드려도 괜찮을 것 같군요. 마교 총단에서 무당 대장로 현현자와 내공 대결을 벌인 청년이 바로 구후 공자입니다."
예상도 못 한 소식에 장선과 연무쌍 모두 입을 쩍 벌리고 아무런 대꾸도 못 했다.
"무당이 입단속을 단단히 해서 소문이 이제야 호북까지 전해졌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오?"
"구후 공자가 고작 백 일 사이에 일류와 절정의 경지를 연이어 밟은 게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그제야 연무쌍과 장선도 처음 만났을 때 내공의 양만 많았지 정작 경지는 일류에도 이르지 못했던 구후영이 현재 자신들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수준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왜 이상하게 생각 안 했지?"
둘은 구후영의 경지가 계단 오르듯이 뛴 것보다 자신들이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던 사실이 더 놀라웠다.
"자연스러웠으니깐요."
구후영의 기도氣度나 자세나 눈빛 모두가 절정인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기도가 강하거나 약했어도, 자세에 힘이 들어가거나 어정쩡했어도, 눈빛이 깊거나 조금이라도 불안했어도, 이들은 구후영의 상태에 유의했을 것이다.
"아직 약관도 안 된 아이가 어떻게."
"그만큼 고생한 거겠죠."
셋이 대화하는 사이.
툭.
손에 들고 있던 천공교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동시에 구후영이 느린 걸음으로 연무장 중앙으로 걸었다.
"일단 두 분이 호법을 서 주십시오.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연무장 주변을 비우겠습니다."
말을 마친 단아가 경공을 펼쳐 사라지자 연무쌍과 장선도 곧 연무장 담장 위에 올라가 낯선 자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계했다.
그러는 사이, 퀭한 눈으로 연무장 중앙에 이른 구후영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
구후영의 춤에서 여의권을 본 연무쌍이 저도 모르게 경탄했다.
"어?"
호법을 서려 나왔던 공형선은 구후영의 춤에서 자신의 검법이 보이자 깜짝 놀랐다.
"허!"
왕경초 역시 구후영의 춤에서 가전 무공인 광풍도법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짧은 창을 무기로 쓰는 양 단주는 구후영의 춤에서 창법을 봤고, 실전에서 거의 쓸모가 없다고 평가받는 육양권법만 익힌 규찰대주는 구후영의 춤에서 직선을 보았다.
사목권을 익힌 단아는 구후영의 춤에서 숲을 보았고, 대부인은 구후영의 춤에서 홍엽산장이 견뎌낸 장구한 세월을 보았다.
휙. 휘릭.
처음엔 느리고 맥없던 구후영의 춤에 내공이 실리면서 점점 빨라지고 힘도 생겼다.
그에 연무장을 두껍게 덮은 눈이 허공에 날렸다.
"아!"
어느새 허공으로 떠오른 눈가루가 구후영의 모습을 흐릿하게 만들자 경지가 부족한 자들이 안타까움에 탄성을 질렀다. 아무리 눈에 내공을 집중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탓이다.
물론, 경지가 높은 자들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구후영의 모습은 마치 광풍에 흩날리는 눈꽃과 같이 빠르고 종잡을 수 없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훅, 후욱.
커다란 바람을 일으키며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던 구후영이 조금씩 느려졌다. 일각 동안 끊임없이 느려진 구후영은 결국 달팽이가 뒤돌아보며 비웃을 정도로 굼뜨게 움직였다.
그런데도 허공에 흩날리는 눈가루들은 여전히 바닥에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정학에게서 태극권을 배웠다는 게 사실인가?'
느려진 구후영을 바라보며 왕경초가 고민했다.
당시 왕경초가 철추당과 손잡고 금검당을 치려 했던 건, 구후영에 관한 소문이 너무 과장되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살렸다는 것부터가 코웃음이 나왔다. 구후영이 연무쌍과 동수를 이뤘다는 말 역시 우스웠는데, 정학한테서 태극권을 배운 덕분이란 말은 그저 거짓말을 완성하려고 보탠 거짓말로 들렸다.
대놓고 얘기하고 다닐 일은 아니나, 철혈방과 마교가 마음으로 맺어진 동맹임을 똑똑한 자들은 다 안다. 천마가 홍엽산장을 노린 바람에 구후영이 무당에 숨어 지냈다는 말도 웬만큼 멍청하지 않으면 지어내기 힘들다.
이러한 이유로 왕경초는 홍엽산장을 핍박해 함께 금검당을 치기로 했었다. 구후영이 갑자기 사라진 바람에 실패했으나, 여태껏 그때 내린 결정이 정확했다고 여겼었는데.
'실패한 게 천만다행이었구나.'
구후영이 태극권을 완숙하게 펼치는 모습을 보니 어쩌면 그 거짓말 같은 소문들이 전부 진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떠올렸다.
'풍불지에 악불형에 혈포규찰대까지.'
공형선 역시 생각이 많아졌다.
'사대신협이 공동 제자를 키운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천마를 이기기 위해 사대신협에게서 검과 창과 도와 장법을 배운 어마어마한 후기지수가 있다는 소문이 한때 무성했다.
천강구절이 명교로 가서 교주가 되고 이름을 마교로 바꾼 사실이 전해지자 배신감을 느낀 자들이 꾸며낸 거짓으로 판명 나긴 했으나, 공형선 입장에선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안 맞긴 하는데, 사대신협이 제자 한 명만 들인다는 법도 없으니.'
규찰대주가 왜 이 무리에 끼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지만, 공형선은 딱히 나은 해석이 없어 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후."
태극권으로 춤을 마무리한 구후영이 숨을 길게 길게 내쉬었다.
그에 따라 허공에 흩날리던 흰 가루들이 하나둘 바닥에 가라앉았다.
"하하하."
구경하던 사람들이 어이없는 나머지 큰 웃음을 터뜨렸다.
구후영이 숨을 내쉬는 사이 허공에 떴던 눈가루가 바닥에 떨어지며, 흑백이 분명한 태극 문양을 만들었다.
반은 눈으로 하얗고 반은 연무장 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시커먼 이 태극 문양은, 지름이 무려 오 장이 넘었다.
분명히 구후영이 뭔가 대단한 일을 했는데, 그 결과로 눈 장난을 한 것과 같은 결과가 되어 사람들은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야, 나랑 대결하자."
구후영의 눈에 정기가 돌아온 걸 확인한 규찰대주가 강하게 졸랐다.
"방금 깨달음을 얻어 힘 조절이 미숙하오."
구후영의 거절에 규찰대주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 작가의말
규찰대주는 소듕한 전력입니다. 당연히 아껴야죠.
원래 다음 글은 ‘이혼으로 새로운 인생 사는 천재’ 였습니다.
비운의 천재가 혼을 젊은 육신에 옮겨 새로운 삶을 사는 개그물이었는데, 최근 강호정담을 보니 제목에 이혼이나 천재 들어간 걸 극혐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새로운 소재를 찾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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