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마준걸駿馬俊傑
귀는 대나무 순처럼 뾰족하고 크고 단단한 네 발굽은 바람이 깃든 듯 가볍다. 눈은 달 숨은 밤의 초롱처럼 빛나고 커다란 콧구멍이 넓적한 얼굴에 반듯하게 박혔다.
가슴은 넓지도 좁지도 않고 울룩불룩하며 허리는 실하다. 다리는 위가 굵고 발목으로 갈수록 가는데, 푸른 힘줄이 툭툭 불거졌다.
잡티 하나 없이 갈기부터 꼬리까지 모두 붉어 마치 가을의 들판에 번지는 들불 같다.
그러한 준마 위엔 기세가 헌앙한 청년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의 얼굴에 하늘의 가장 밝은 별을 따다 박은 듯한 눈이 강인하게 빛났다.
오른쪽 어깨에 낙화落花를 수 놓은 푸른 장포를 입었는데, 왼쪽 어깨 위로 좋은 가죽을 감은 검 자루가 삐쭉 튀어나왔다.
'철혈방이라. 나랑 아무런 연관도 없는 문파가 왜?'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자꾸 고개를 돌리게 하는 준마는 다름 아닌 이제 두 살에 접어들어 여전히 성장 중인 혈총이고, 혈총에 탄 준걸은 당연히 구후영이다.
혈총은 아직 클 날이 일 년이나 남았는데 벌써 웬만한 말보다 덩치가 좋다. 게다가 두전이 말에 좋은 약초를 잔뜩 먹여 힘도 무게가 이천 근 넘는 물소보다 셌다.
구후영은 수련을 한 번 할 때마다 예전엔 상상하기도 힘든 막대한 양의 내공을 단전에 쌓으며 눈에 정기가 흘러넘쳤다.
"워, 워워."
갈림길이 나타나자 구후영은 말을 세웠다. 그러곤 품에서 종이를 꺼내 내용을 확인했다.
'열세 번째 갈림길에선 오른쪽으로.'
구후영이 본 종이는 다름이 아니라 하오문이 준 지침서였다.
어린 제자들이 내공 수련에 갓 입문했기에 임초현이 늘 지켜봐야 하고, 두전 역시 자양단에 필요하나 약방에서 취급하지 않는 약초의 효능이 물오른 시기라 바쁘다.
게다가 혈총만큼 빠르게 달리는 말이 없어 고심 끝에 구후영 혼자서 양양으로 가기로 했고, 길치인 구후영을 위해 태원 하오문에서 지침서를 작성했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어느 걸 고를지 적어줬고, 하루에 천 리는 몰라도 육백 리는 달리는 혈총 덕분에 이틀 만에 벌써 절반 이상의 여정을 완성했다.
"가자!"
오른쪽 갈림길로 조금 달리자 넓은 관도가 나타났다. 신이 난 혈총이 달리는 발굽에 힘을 한층 실었다.
그때.
"살려줘!"
뾰족하게 울린 비명이 혈총과 구후영의 귀에 닿았다.
"야, 팔 제대로 잡아!"
"그게 쉽나. 무공 익힌 년인데."
일반인보다 훨씬 밝은 귀 덕분에 꽤 먼 거리에서 이뤄진 대화 내용이 똑똑히 들렸다.
'환한 대낮에 관도 변에서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벌인다고?'
구후영은 왼손으로 혈총의 목을 툭 쳤다. 그에 혈총이 속도를 조금씩 줄였다. 속도가 어느 정도 줄자 구후영은 안장에서 훌쩍 뛰어내려 기척이 들리는 곳으로 경공을 펼쳐 달렸다.
"멈춰!"
여인을 겁탈하려던 사내들이 구후영의 외침을 듣고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늦었다.
구후영은 자신을 등진 두 사내의 대추혈을 왼손과 오른손으로 때렸다.
대추혈은 요혈 중의 요혈이어서 의원들이 환자를 치료할 때도 잘 건드리지 않는 혈도다. 구후영은 내공이 없었던 때에 요혈을 노리던 습관이 남아서 그대로 했던 건데, 대추혈을 맞은 두 사내가 피를 토하며 즉사했다.
"뭐야!"
여인의 허리띠를 풀려고 애쓰던 두 사내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구후영은 달리던 기세 그대로 접근해 장법으로 매듭을 풀려다가 일어난 사내의 견정혈과 여인의 팔을 누르던 사내의 단중혈을 때렸다.
단중혈을 맞은 사내는 칠공으로 피를 흘리며 즉사했고, 견정혈을 맞은 사내는 그대로 엎어져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괜찮으시오?"
구후영의 부축을 받고 일어난 여인이 발을 들어 꿈틀거리는 사내의 머리를 걷어찼다. 머리를 차인 사내는 몸을 크게 펄떡인 다음 잘게 떨더니 끝내 축 늘어졌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제야 안심한 여인이 눈물을 훔치더니 넙죽 엎드려 구후영에게 절했다. 그런데 절을 마치고 몸을 일으키던 여인이 갑자기 입으로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구후영은 황급히 여인의 손목을 잡고 진맥했다.
'간맥이 약하고 심맥이 강하다. 독이구나.'
"낭자. 무슨 독인지 아시오?"
이미 혼절한 여인은 구후영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구후영은 어쩔 수 없이 손가락으로 여인의 입가 거품을 묻혀 냄새를 맡았다.
비릿한 내가 났지만, 크게 역하진 않았다.
'강한 독은 아니구나.'
구체적으로 무슨 독인지 모르지만, 치명적이진 않았다.
"난 의원이요. 의원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니 무례하다고 나무라지 마시오."
기절한 여인에게 정중하게 말한 구후영은 여인의 상의를 올리고 등에 침을 꽂았다.
명문혈에 꽂은 대침은 독을 빼는 용도고 왼쪽 등의 여섯 개 침은 심맥을 보호하는 용도다. 그리고 간맥의 기운을 돋우려고 허리의 혈도들에도 침 몇 개를 꽂았다.
예전이라면 여기서 조치가 끝났겠으나, 지금의 구후영은 내공이 있다. 구후영은 왼손으로 여인의 목을 잡아 몸을 고정하고 오른손을 폐유혈에 대고 내공을 주입했다.
명문혈에 꽂은 대침뿐이 아니라 여인의 날숨을 통해서도 독이 일부 배출되었다.
'살렸다.'
등에 꽂은 은침이 밝은색으로 변했다. 여전히 몸에 독이 조금은 남았겠지만, 목숨에 지장이 없는 건 물론이고 건강에도 별 영향이 없다.
어쩌면 술을 취하도록 마시는 게 지금 여인의 몸에 남은 독보다 더 건강을 해칠지도 모른다.
치료를 마친 구후영은 침을 뽑고 여인의 옷매무시를 단정히 한 다음 진맥했다.
'다행이다.'
진맥으로 여인이 잘 회복하고 있음을 확인한 구후영이 미소를 지었다.
'내공이 있어 참 다행이다.'
장방선생과 달리 독이 온몸에 퍼졌기에 침술로는 한계가 있다. 다행히 내공이 있어 독을 원하는 곳으로 모은 덕분에 철저히 배출했다.
'약으로 치료하면 보름 이상 걸렸을 텐데, 내공은 반 각도 안 걸리는구나.'
구후영이 내공의 위대함에 흠뻑 빠져있던 그때.
"음적! 내 칼을 받아라."
쩌렁쩌렁 울리는 외침과 함께 나타난 여인이 날 길이가 일 척밖에 안 되는 짧은 칼을 휘둘렀다.
구후영은 뒤로 물러나며 여인의 칼을 가볍게 피했다. 선수비 후공격의 난화검법을 익힌 덕분에 상대 공격을 파악하고 퇴로를 정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응?"
여인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이를 악물고 칼을 휘둘렀다.
짧은 병기는 상대와 접근해서 싸운다. 작은 실수로 목숨을 잃을 수 있기에 흉험한 병기라고 명문정파 대부분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특별히 무당파에서 판관필을 많이 쓰긴 하는데, 이는 이유극강을 무의로 하는 문파여서 거리가 가까울수록 위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원의 문파 대부분은 여제자를 받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구후영은 여인이 중원인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오해요."
구후영의 손에 죽은 남자들은 말투도 그렇고 복식도 그렇고 중원인이 분명했다. 처음 나타날 때 구후영을 음적이라고 욕한 것까지 결합하면, 짧은 칼을 든 여인은 현재 기절한 여인과 같은 편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오해? 몸에 손대는 거 다 봤는데."
구후영의 변명에 더 화가 나는지 여인의 칼부림이 빨라졌다. 구후영은 진맥한 거라고 변명하고 싶으나, 맨손으로 반격하지 않고 상대하기엔 여인의 칼질이 너무 매서웠다.
내공을 얻어 예전보다 훨씬 강해졌지만, 구후영이 강한 건 검법이다. 방금 처리한 사내들이야 기습한 덕분에 장법으로 해결했지만, 무공 수준이 꽤 높은 여인 상대로는 아니었다.
이대로는 자신이 다칠 것 같다는 생각에 구후영은 천공교검을 뽑아서 가볍게 휘둘렀다. 천공교검이 얼마나 예리한지 모르는 여인은 구후영의 가벼운 동작에 피하지 않고 칼과 천공교검을 부딪쳤다.
쓱 소리와 함께 정강精鋼을 단련해 만든 단단한 칼이 반듯하게 잘렸다. 검이 보검인 것도 있지만, 무려 신검의 가르침을 받은 구후영의 휘두름이 절묘한 게 컸다.
"악!"
칼을 잘리자마자 뒷걸음치던 여인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뭐 하는 거요?"
"혀 깨물고 자결하려고. 안 그러면 네가 날 욕보일 거 아냐."
외모만 보면 오히려 구후영이 여인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오해라고 말했잖소. 난 의원이오."
"거짓말. 무슨 의원이 무공이 이렇게 강해."
여인은 쓸데없이 근성이 강했다. 구후영이 완전히 우위를 차지한 상황에 공격을 멈추고 말로 설득하려는데 귀를 막고 듣지 않았다.
그때, 몇 명의 여인이 경공으로 등장했다.
'고수다.'
유일하게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의 몸놀림이 범상치 않았다.
"좌호법. 저자가 음적입니다."
뚱뚱한 여인이 거의 자루 가까이 잘린 칼로 구후영을 가리키며 고자질했다.
"오해라고 말했잖소. 음적은 저자들이고, 난 의원이어서 저 낭자의 독을 빼준 것뿐이오. 치료하느라 몸에 손을 대긴 했지만, 환자 앞에서 의원은 사내도 여인도 아니오."
상황을 살핀 면사를 쓴 여인이 뚱뚱한 여인을 나무랐다.
"시체가 네 구나 있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했느냐? 놈들에게 잡힌 아이가 무슨 수로 다섯 중에 네 명이나 죽인단 말이냐? 외상이 전혀 없는 걸 보니 장법으로 죽인 것 같은데, 저 아이가 그 정도로 무공이 강하더냐?"
"송구합니다."
구후영이 그렇게 아니라고 해도 귀를 막던 여인이 좌호법의 꾸중에 바로 잘못을 시인했다.
"소협의 출수에 감사드립니다."
"내가 왔을 때 저놈들이 목적을 이루지 못했소. 오늘 일은 내가 입을 꾹 다물 테니 저 낭자의 청명은 걱정 안 하셔도 괜찮소."
"후의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여인들은 네 사내의 옷을 벗기고 나무에 매단 다음, 칼로 가슴에 음적, 강도, 도적과 같은 단어를 적었다.
구후영이 보기엔 망자를 욕보이는 행동이 조금은 아닌 것 같았지만, 놈들이 저지르려던 악행을 떠올리니 또 여인들의 처사가 별로 과분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교주께서 걱정하고 계실 테니 어서 돌아가자."
좌호법의 분부에 키가 사내처럼 큰 여인이 기절한 여인을 업었다.
"화산 소협의 은혜는 언젠간 꼭 갚겠습니다. 그때까지 보중하십시오."
말을 마친 좌호법을 위수로 여인들이 경공을 펼쳐 떠났다.
'웬 화산? 달리 낙화검법의 초식을 쓴 적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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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면 험준한 봉우리가 이어지고 흰 구름이 산허리를 맴돈다. 모든 산이 머리를 조아리는 그곳에 신선이 노니노라.
'이게 무슨 일이지?'
태원부에서 양양까지 약 이천 리 정도로 혈총의 걸음이면 늦어도 닷새에 도착할 거리다.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싶었는데, 지침서대로 움직였더니 그만 무당산 근처에 도착했다.
'설마 일부러?'
임초현과 두전은 자신들이 함께 양양에 갈 수 없기에 구후영이 먼저 무당산 가서 청빈을 찾기를 바랐다.
무당 제자인 청빈의 도움을 받아 구후영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고, 어쩌면 청빈이 자초지종을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둘은 마음이 급하고 은근히 고집이 센 구후영이 말로 해서 안 들을 걸 알고 설득하는 대신 하오문에 부탁해 길을 알려주는 지침서를 만들었다. 지침서를 철석같이 믿은 구후영이 길 한 번 안 묻고 말을 달린 바람에 결국 자신만 모르던 목적지인 무당에 도착하고 말았다.
- 작가의말
눈 뜨고 코 베이는 강호. 그토록 믿었던 사부와 호법에게 속은 구후영이 갑자기 흑화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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