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제압空間制壓
바둑은 흑과 백만 있고 장기는 차·말·포를 비롯해 다양한 역할이 있다. 바둑은 빈 판에 하나둘 추가하고 장기는 모든 말을 올린 후 하나하나 제거한다.
이렇듯 얼핏 보기엔 천양지차인 둘이나, 확연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상대의 움직임을 제압해 원하는 흐름으로 이끌어 승리를 따낸다는 것이다.
바둑이든 장기든 열세에 몰리다가 틈을 찔러 역전을 일구는 일이 아예 없진 않으나, 역설로 이는 상대가 확실한 흐름을 만들지 못한 탓이다.
구후영이 익힌 난화검법이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미리 돌을 깐 유리한 판으로 상대를 어떻게 끌어들이냐가 관건이다.
그리고 지금.
악불형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구후영의 안계를 넓혀줬다.
"헛!"
강석이 빠르게 뒤로 물러나다가 직각으로 꺾어 왼쪽으로 세 발 움직였다. 그러곤 몸을 움츠리고 상체를 전후로 흔들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채 한 걸음을 걷기도 전에 경탄하며 다시 뒤로 빠졌다.
그러는 사이 악불형은 한가하게 뒷짐을 쥔 채 미동도 없이 눈알만 굴렸다.
"무슨 조화지?"
악불형은 바위로 이뤄진 거악처럼 묵직했고 강석은 곧 터질 화산처럼 기세가 대단했다. 덕분에 모두가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호쾌한 육탄전을 기대했는데.
가만히 마주보기만 하던 중 강석이 갑자기 길거리에서 재주를 부리는 광대처럼 혼자 풀쩍거리기 시작했고, 악불형은 자기랑 무관한 일이라는 듯이 뒷짐을 쥔 채 구경만 하고 있다.
"글쎄다."
하석의 무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구후영과 현현자의 대결도 일반적인 강호의 대결과 크게 달랐으나 아예 이해가 안 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악불형과 강석의 대결은 강호에서 온갖 풍파를 겪은 노련한 무인들이 보기에도 해괴했다.
"대단하군."
중석의 무인들도 이해가 안 가기는 마찬가지나, 체면 때문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건 상석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지금까지 조용했는데, 뭔가 알아본 용전향이 못 참고 입을 열었다.
"용 당주께선 개중의 현기를 알아본 거요?"
오른손잡이 호법이 질문했다.
"악 대협이 강 부대주의 약점을 찾고, 강 부대주는 그걸 감추는 것 같소."
그에 상석에 앉은 자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야.'
"아니야."
구후영은 자신이 입을 열어 얘기한 줄 알고 깜짝 놀랐다가 흑 장로의 이어지는 말에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약점을 찌르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이다. 그게 뭔지 모르지만."
흑 장로와 달리 구후영은 뭔지 알 듯했다.
'난화검법과 비슷한 방식이다.'
비슷하나 다른 방식이었다.
난화검법은 검을 휘둘러 판을 깔아 상대를 끌어들인다. 상대가 판에 들어오지 않으면 별수 없다. 상대가 구후영보다 하수면 선뜻 판에 들어오려 하지 않을 테니, 난화검법은 하수가 고수를 상대하는 무공이다.
반면, 악불형의 방식은 고수가 하수를 상대하는 데 유용하다.
악불형은 눈빛으로 자신이 찌를 수 있는 위치 혹은 방위들을 강석에게 알렸다. 개중엔 강석의 치명적인 약점도 있고, 전혀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다. 강석은 악불형의 공격을 피하려고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는데, 악불형이 찌를 수 있는 다른 곳들 때문에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다.
함부로 움직이면 별 상관이 없어 보이던 타격점이 강석의 약점과 일치해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에 강석은 악불형이 찌를 수 있는 모든 곳을 염두에 두며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악불형이 미동도 하지 않는데 혼자 난리를 피울 도리밖에 없었다.
구후영은 상석은 물론 중석과 하석의 대부분 무인보다도 견식이 짧았으나, 결이 비슷한 난화검법을 수련한 덕분에 둘의 대결 방식을 정확히 유추해냈다.
"엇!"
채 차 한 잔이 끓을 시간도 안 됐는데 강석이 파탄을 보였다. 깊은 내공과 강한 체력 덕분에 반나절을 저리 뛰어도 전혀 지치지 않겠지만, 악불형이 주는 압박을 견디면서 머리를 불나게 굴리다 보니 그만 집중력이 깨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애석한 한탄을 뱉은 건 강석이 아니었다. 주변을 다 잊고 둘의 대결에 푹 빠졌던 구후영이 부지불식간에 낸 거였다.
'저대로 두면 후환이 무궁하다.'
용전향은 살심이 울컥 치밀었다. 배산도 자질이 뛰어나 종종 질투를 느끼긴 하나 죽여 없애고 싶은 마음이 든 적은 없다.
그러나 구후영이 흑 장로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현기를 혼자 알아채고 강석의 패배까지 정확히 예측한 듯해 보이자 수십 년의 수양이 무색하게 살심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세게 일었다.
"하하. 하하."
바닥에 주저앉은 강석이 시원하게 웃었다. 마치 대결에서 이긴 사람처럼.
"산 밖에 산이 있고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더니. 덕분에 내 우물이 훨씬 커졌소."
"잘했다."
대결을 마친 악불형은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갔다. 반면, 강석은 작별의 말도 없이 쾌활당을 떠났다.
'잘됐군.'
용전향의 이마에 주름이 느는 걸 확인한 배산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혈포규찰대는 마교의 법도 상 대리 교주인 배산의 지시에 따라야 하나 규찰대주가 후학 양성을 빌미로 천산의 어느 골짜기에 은거해버렸다.
그에 반발하여 강석을 비롯한 혈포규찰대의 고수들이 따로 떨어져 나왔는데, 배산과 용전향 모두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그간 강석의 일당은 줄 게 적고 평화를 바라는 배산보다 용전향과 훨씬 가깝게 지냈는데, 오늘 일로 배산과 용전향은 다시 동등한 출발선에 서게 되었다.
"악 숙부께서 멋진 마무리를 보여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함께 하는 좋은 시간이 아까우니 이제 그만 다들 마시고 즐깁시다."
배산의 선언에 종남을 비롯한 얼마 안 되는 자들이 큰소리로 호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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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가 끝나 손님들이 떠나자 배산과 악불형이 독대했다.
구후영은 앙상한 나무들만 가득한 후원의 정자에 앉아 달을 구경했다.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긴장해선지 태원부에서 보던 달과 같은 듯 다르게 느껴졌다.
"야, 구후영."
갑자기 들린 여인의 목소리에 구후영은 화들짝 놀랐다. 목소리는 물론 말투마저 귀에 꽤 익은데, 누군지 금세 떠오르진 않았다.
"너 그새 멋있어졌다."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본 순간, 구후영의 의문은 순식간에 풀렸다. 그러나 새로운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청월 소저가 왜 여기에? 목소리와 말투는 또 왜 이리도 익숙하지? 난 반가워해야 하나 아니면 예의에 따라 거리를 둬야 하나?'
"뭐야? 나 만나서 안 반가워? 혹시 나 때문에 칼 맞았다고 아직도 화난 거야?"
"너무 의외라 놀라서 그랬소. 그간 무양無恙하셨소?"
"그럼. 성현께서 말씀하시길, 먼 곳에서 친우가 왔으니 어찌 안 기쁠런가."
구후영의 말투를 전혀 안 비슷하게 흉내 낸 청월이 혼자 배를 부여잡고 깔깔거렸다.
'변한 게 없구나.'
황무지에서 헤매던 때가 떠오른 구후영의 얼굴에 편한 웃음이 떠올랐다.
"참. 넌 모르겠구나. 나 배산이랑 혼인했어. 이 몸이 바로 여기 안주인이란 말씀이지."
구후영은 자신의 마음이 괴로워질 줄 알았다. 청월을 본 순간 은연중에 이러한 가능성을 염두에 뒀고, 그걸 확인하는 순간 심마가 날뛸 줄 알았는데.
"축하하오."
구후영의 입에서 진심 어린 축하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게 축하하는 사람 얼굴이야?"
청월이 입술을 삐쭉 내밀며 화냈다. 그런데 일부러 구후영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려고 작정한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어이쿠. 제가 감히 현월궁의 공주이자 마교의 안주인 되시는 분께 큰 결례를 했군요."
"어."
정작 구후영이 장단을 맞추자 오히려 청월이 당황해 입만 연신 뻐끔거렸다.
"설마."
문득 머리를 스친 생각에 구후영이 장난기를 말끔히 거뒀다.
"초 부인이 나와 악 대협을 상석에 앉힌 거요?"
"맞아. 여동생한테 남긴 자린데, 일로 바빠서 못 온다는 서신을 그제 받았지 뭐야. 그래서 심술이 잔뜩 났었는데 네가 갑자기 나타나서 상석을 줬지."
구후영은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뭐야! 그 한심해 죽겠다는 표정은?"
"일이 잘 풀렸으니 망정이지. 난 물론이고 부군의 일도 크게 그르칠 뻔했소."
"그럼 차라리 좋지. 마교고 뭐고 다 잊고 우리 식구끼리 조용한 곳에서 근심걱정 없이 편하게 살면."
'왜지?'
갑자기 단아가 상념에 불쑥 떠오르자 구후영은 놀란 나머지 청월의 이어진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야, 이 얼빠진 놈아. 여길 왜 왔냐니까."
그제야 정신을 차린 구후영은 자룡의 일을 간략히 청월에게 들려줬다.
"하긴. 마교 놈들은 인정이 없다니까."
일면식도 없는 규찰대주를 가차 없이 욕한 청월이 구후영에게 자신이 알아서 해결한다며 주먹을 부르쥐고 안으로 들어갔다.
'괜한 말썽은 만들지 않겠지?'
결의에 가득 찬 청월의 뒷모습에 구후영은 걱정만 무럭무럭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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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월이 사라지고 약 반 각이 지나서 악불형이 먼저 나왔다.
"조만간 시간을 내서 낙화문을 방문하겠네. 오늘 일로 누군가가 귀찮게 하면 다 내가 시킨 거라고 하게. 뭐, 굳이 내 이름이 아니어도 현현자와 내공 대결을 벌인 소형제한테 함부로 시비 걸 놈이 없겠지만."
"악 대협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하기는. 싸움만 막은 게 아니라 무당도 이쪽으로 끌어들여서 오히려 내가 고맙지."
급한 일이 있는지 악불형은 바로 작별하고 홀로 떠났다.
"구후 소협의 도움에 다시 감사드리는 바요."
악불형이 떠나고 한참 뒤에 등장한 배산이 구후영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천마의 장자인 건 제치더라도 마교의 임시 교주로서 구후영 상대로 대단한 예의를 차린 셈이다.
"간곡한 청이 있어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나섰는데 좋게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사연은 방금 내자한테 들었소. 이걸 규찰대주한테 보여주면 동생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요."
구후영은 허리까지 숙여 고마움을 표한 뒤 양손으로 서신 봉투를 공손히 잡았다. 그런데 배산이 봉투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대신 나도 소협에게 청이 하나 있소."
"말씀하시지요."
구후영은 배산과 눈을 마주치며 단단하게 말했다. 배산의 얼굴에 언뜻 감탄한 기색이 스쳤다.
"난 무공만 알고 혼인 따위엔 관심도 없던 사람이었소. 내자와 혼약이 결정되었을 때도 마교를 위해 어렵게 수락했소."
배산이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 몰라 구후영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런데 내자를 만나고 나니 인생의 즐거움이 뭔지 알았소. 이젠 아이까지 생겨서 그러한 마음이 더욱더 커졌소."
자룡을 떠올린 구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자와 구후 소협이 무슨 특별한 사이가 아닌 건 나도 아는 바요. 그러나 내자가 나 외의 사내한테 마음을 쓰는 모습이 그저 편치만은 않소."
"그럼?"
"날 속이 좁다고 비웃어도 좋소. 내 청은 구후 소협이 다신 천산에 오지 않는 것이오."
"약속드립니다. 만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면 절대 두 분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습니다."
약속을 받은 배산이 봉투를 잡은 손가락에서 힘을 풀었다. 봉투를 받아 가슴에 잘 간직한 구후영은 바로 작별하고 천강구절의 장원을 떠났다.
- 작가의말
구후영이 상석에 앉으며 일어난 어마어마한 일과 비교하면 이유가 참으로 허무합니다. 그런데 이런 게 인생의 묘미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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