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정지필點睛之筆
도가도道可道 비항도야非恒道也
명가명名可名 비항명야非恒名也
"생각보다 오성이 깊군."
구후영은 엿새 만에 참결의 경지가 정체했다. 다시 말하면 고작 엿새란 시간에 갓 배운 참결을 현재 본인의 한계까지 익혔다는 뜻이다.
이는 구후영이 대단하기도 하지만, 낙화검법이 베기와 찌르기 위주인 덕도 꽤 봤다.
"목숨 달린 일이니까 신중히 하는 게 좋겠지. 자결刺訣도 알려주지."
"감사합니다. 스승으로 모시진 못하나 가르침을 주신 은혜 평생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어허. 그러지 말라니까. 무공이든 인생이든 거칠 게 없어야 하네. 그러니 은혜니 뭐니 그딴소리는 더는 말게."
'난 언제쯤 무애無碍를 이룰 수 있을까?'
예전엔 성현의 말씀을 따르노라 하고 싶은 걸 참고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했다. 다행히 성격이 담백한 편이어서 너무 힘들진 않았다.
그러다 성현의 말씀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기로 하며 성정이 조금 자유롭게 변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라진 자룡이 머리와 마음을 꽉 채워서 손발이 꽁꽁 묶인 느낌이었다.
"무인이라면 최소한 검을 잡았을 때만이라도 무애를 이뤄야지."
풍불지의 호통에 정신을 차린 구후영은 자결을 익히는 데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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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어느 정도 회복한 약초꾼이 음식을 찾아내서 배곯는 일이 없고, 구후영이 전혀 못 캐던 온갖 약초를 찾아내서 풍불지의 다리를 치료할 준비도 차곡차곡 잘 진행되었다.
문제는 오히려 구후영에게 나타났다.
참결에 이어 자결까지 익힌 구후영이 혼란에 빠졌다. 정교하게 쌓인 획으로 이뤄진 반듯한 글씨 같던 초식들이 추풍에 우수수 떨어진 낙엽처럼 제멋대로 흩어졌다.
검술을 잘 모르는 약초꾼이 봐도 엉망일 정도로 구후영이 휘두르는 검은 목적지를 잃었다.
"젊은 친구. 혹시 아는 산이 있나?"
보다 못해 풍불지가 나섰다.
"네. 저희 문파가 산 위에 있습니다."
"그럼 문파 주변에 언덕이 있는가?"
"네. 산자락에 언덕 몇 개가 있습니다."
"내 말을 잘 들어보게나. 자네 문파가 있는 산에서 흙 한 줌 쥐어 언덕에 놓네. 그럼 어찌 될까?"
풍불지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 몰라 구후영은 대답을 아꼈다.
"흙 한 줌 없다고 산이 산이 아닌 건 아니지 않은가? 언덕에 흙 한 줌 보탰다고 언덕이 언덕 아니게 되나?"
"맞습니다. 산은 산이고 언덕은 언덕이죠."
"그래. 그럼 산에서 흙 한 줌 더 쥐어서 언덕에 주게. 어떤가?"
"그래도 산은 산이고 언덕은 언덕입니다."
"좋아. 그걸 계속한다고 생각하게. 그럼 어떤가?"
구후영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산과 언덕이 같아지는 순간이 올 거야. 그럼 그때도 산이 산이고 언덕이 언덕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둘 다 산일까? 아니면 둘 다 언덕일까?"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모르는 게 맞아. 몰라야 맞아."
구후영은 미망이 가득 찬 눈으로 풍불지를 바라봤다.
"도가도 비항도야, 명가명 비항명야. 이 말의 뜻을 아는가?"
해석이 분분하지만, 대충은 뭔가를 콕 집어서 뭐라고 말하는 건 대체로 틀린다는 뜻임을 안다.
"이러한 모순이 발생한 건 사람들이 산과 언덕이라는 두 이름을 만들었기 때문이야. 그러면서 정작 어디부터 산이고 어디까지 언덕인지 명확히 정하지 않았지. 그러니까 이게 산인지 언덕인지 애매한 일이 자주 생기는 거야."
"맞습니다. 장강은 장강인데 황하는 왜 황하인지 저도 궁금했습니다."
심지어 서로 이어지는 둘인데 하나는 무슨 하로 불리고 하나는 무슨 강으로 불린다.
"어떤 건 산이라 부르고 어떤 건 봉이라 하지. 근데 산과 봉의 구분도 애매하지 않나?"
보통은 불쑥 솟은 놈을 봉이라고 하고 펑퍼짐한 놈은 산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잘 따지고 보면 또 꼭 그런 건 아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게 제 상태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베기랑 찌르기는 뭐가 다를까?"
상상도 못 한 질문에 구후영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자. 베기는 이렇게 휘두르는 거고 찌르기는 이렇게 내지르는 거지. 구분이 확실하지?"
"맞습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 보게. 베기는 사실 검날로 찌르는 거고, 찌르기는 사실 검 끝으로 베는 거라면?"
수천 갈래 벼락이 구후영의 머리를 때렸다.
"베기를 할 때 사실상 수십 개 작은 검이 있고 그중의 일부로 상대를 찌른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나? 찌르기를 할 때 사실 날의 극히 일부만 이용해 베기를 한다는 생각은 없었고?"
없었다. 그러나 풍불지의 말을 듣자마자 무수한 상념이 봄날의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내가 너무 진부했구나.'
구후영이 베기와 찌르기를 너무 명확히 구분한 바람에 초식이 과도하게 번잡했다. 이러한 번잡함은 낙화검법 본연의 목적에 부합하나 실전성이 너무 떨어지는 문제점이 있어 구후영에게 혼란을 초래했다.
'그러니까 베기와 찌르기를 둘이 아닌 하나로 보라는 말이다.'
구후영은 천공교검을 들고 낙화검법의 초식들을 펼쳤다. 강한 힘보다는 다양한 변화를 장기로 삼는 낙화검법이기에 초식들이 복잡한데, 구후영의 손에서 점점 간략하게 변화했다.
베기와 찌르기를 굳이 구분하지 않으니 몇 개의 휘두름을 하나로 합칠 수 있은 덕분이었다.
풍불지는 곁에서 구후영이 하는 모양을 신중한 얼굴로 지켜봤다. 약초꾼 역시 모닥불의 미약한 빛을 빌어 혼이 반쯤 나간 얼굴로 구후영의 검술을 구경했다.
구후영을 의원으로 알고 무공은 호신술 정도만 익힌 거로 오해해 왔기에 받은 충격이 풍불지보다 훨씬 컸다.
'잠깐. 베기와 찌르기가 다르지 않다면 굳이 왜 달리 불렀을까? 산이랑 언덕을 굳이 구분한 것도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
명정酩酊(술에 취해 정신이 흐릿한 상태)에 빠진 구후영은 머리에 떠오른 생각에 따라 검의 휘두름을 달리했다.
베기는 베기고 찌르기는 찌르기라는 생각으로 펼치자 초식이 다시 복잡해졌다. 원래 초식보다는 여전히 간략하지만, 방금 전에 모든 초식이 비슷해 보이던 것과 달리 초식과 초식의 구분이 쉬웠다.
풍불지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구후영은 처음에 낙화검법의 초식에서 줄기와 잎을 지우고 화려한 꽃만 남겼다.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생략하거나 여러 휘두름을 하나로 합쳐 초식의 의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다행히도 베기와 찌르기를 같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결국엔 둘이 다르다는 생각으로 다시 줄기와 잎을 보탰다.
구후영의 심성과 오성이 마음에 들어 자결까지 가르쳤던 풍불지는 자신이 너무 높은 경지의 깨달음을 전수해 아까운 인재를 괜히 망치는 게 아닌지 걱정했는데, 그걸 너끈히 소화하는 모습에 하늘을 날듯이 기뻤다.
게다가 기쁜 일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대단한 검이군.'
구후영의 수련을 지켜보며 풍불지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검법에 따라 사용하는 검이 다르다. 고수는 가벼운 검으로도 중검을 펼친다고 하지만, 그건 겨우 절정인 임초현 같은 고수가 아니라 진짜 강호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일가를 이룬 고수 얘기다.
당연하게 대부분 무인은 무기에 구애받는다.
그런데 천공교검은 수은의 움직임에 따라 검의 성질이 바뀐다. 찌르기에 적합한 검이 되기도 하고 베기에 적합한 검이 되기도 하며, 중검을 펼치기 적합한 검도 되고 환검을 펼치기 적합한 검도 된다.
검을 직접 잡아보진 않았으나 구후영의 움직임만 보고도 풍불지는 천공교검의 특별함을 알아챘다.
'검에 구애받지 않는 경지. 내가 그걸 얼마나 어렵게 이뤘는데.'
풍불지는 천공교검이 없음에도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다. 괜히 강호에서 신검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사람도 대단하고.'
초식에서 기본기는 줄기와 잎이고 공격과 수비는 꽃이다.
구후영은 처음에 다 지우고 꽃만 남기려 했으나, 그리하면 의도가 뻔히 드러나 더 빠르고 강한 자에게 속절없이 당한다.
그에 생각을 바꿔 다시 잎과 줄기를 만들어 꽃을 숨기려 했고, 그 과정에 수많은 줄기를 역으로 짚어 뿌리에 닿으려 했다.
"컥!"
마음 가는 대로 검을 휘두르며 낙화검법의 검의에 접근하던 구후영이 갑자기 피를 토하며 혼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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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겁니까?"
"자네가 큰 걸 깨달았는데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어딘가에 숨겼네."
"심마는 아니죠?"
동생 때문에 우울하다가도 갑자기 근거도 없이 어딘가에 잘 살아 있을 거란 믿음이 생기며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그러다 엄이도령掩耳盜鈴(자기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면 다른 사람도 못 들어서 모를 거라는 어리석음)이라는 생각에 또 자괴감에 빠진다.
하루가 아니라 한 시진에도 기분이 여러 번 바뀌는 구후영이기에 검술을 펼치다가 갑자기 피를 토하고 기절한 게 심마 때문이 아닌지 걱정했다.
"자네처럼 올곧은 사람은 심마가 쉽게 안 오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푹 쉬게."
"좀 더 수련해야지 않겠습니까?"
"쉬는 것도 수련이야. 검을 잊고 푹 쉬고 나면 갑자기 경지가 오른 게 느껴질 때가 있어. 쉬는 사이에 몸이 검술에 더 적합하게 변하거든."
"고명한 가르침을 내려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자네는 이미 용이야. 내가 한 일은 그저 눈동자를 그려준 것뿐이지."
장승요가 눈동자를 그리자 용이 승천했다. 눈동자가 없다고 용이 용 아니게 되는 건 아니지만, 눈동자가 없으면 절대 승천하지 못했다.
"덕분에 검을 보는 눈이 떴습니까."
풍불지는 겸허하게 자신은 점 하나 찍는 수고밖에 없었다고 했지만, 구후영 입장에선 정말 큰 걸 받았다.
"내가 아니어도 자네가 언젠간 이르렀을 경지야. 괜히 내가 일찍 알려줘서 피도 토하게 하고.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그러니까 푹 쉬게."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그저 쉬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좀이 쑤셨던 구후영은 약초꾼을 도와 약초를 달여 고약을 만들었다.
"아드님의 병환은 어찌 되었습니까?"
"치료는 했소. 그런데 백화궁 궁주가 독 선생이랑 아는 사이인 줄 몰랐던 게 패착이었소."
구후영의 머리가 영활하게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다른 책과 달리 신농백초경만 표지에 제목이 있었습니다."
"맞소. 내가 신농백초경 원본을 갖다주니 약속대로 아들의 삼음절맥을 치료하긴 했소. 그런데 독 선생의 행방을 묻더니 날 여기다 던지더군."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혼자 사라졌다고 했소. 대답하기 전에 독 선생과 연결해준 사람이 백화궁 궁주라는 걸 떠올려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소."
"신농백초경은 독 선생이 일부러 거기에 놔둔 거겠네요."
"난 그게 이해가 안 되오. 원래부터 독 선생이 갖고 있었다면 나한테 보수로 약속해도 될 텐데. 굳이 거기에 몰래 둘 필요가 있었을까? 자신이 마교에 잡힐 걸 미리 알았다고 쳐도 말이오."
약초꾼은 오리무중이지만, 구후영은 전후 사정을 쉽게 유추했다.
'신농백초경을 찾은 약초꾼의 간절함을 이용한 거겠지.'
실제로 신농백초경을 찾은 약초꾼이 보석도 양보하면서 분위기를 좋게 만들고 탈출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덕분에 장방선생이 목적을 달성했으나 숨을 거두고 말았다.
눈 자리에 점을 찍은 건 같지만, 장방선생은 용이 아니었다. 그래서 점을 찍자마자 목숨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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