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입경맥蠱入經脈
뱀이나 전갈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독물을 한 그릇에 가두면 며칠 사이에 모두 죽는다. 그러고도 계속 놔두면 그릇 안에 고蠱가 나타난다. 이 고를 음식에 타서 사람에게 먹일 시, 크든 작든 반드시 탈이 생긴다.
사람들이 고의 존재를 발견한 건 주周나라 시절이다. 춘추전국 시대가 열리기도 전이니, 이천 년도 훨씬 전부터 사람들은 고를 알았다.
"고독蠱毒인 것 같소."
고에 관해 온갖 믿기 어려운 낭설이 수두룩하지만, 명에 이르러 의원들은 고를 인간의 몸에 침입해 생존하는 벌레 혹은 풀이라고 여겼다.
초목이 우거지면 땅이 쇠하듯이, 고독이 몸 안에서 자라면 인간 역시 허약해진다. 구후영은 침진을 통해 아이들을 앓게 만든 게 고독이라고 확신했다.
"그건 소인들도 압니다."
외모와 차림새만 보면 그저 산적 같은 세 사내는 놀랍게도 명 황실에서 정칠품의 작위를 받은 관리 신분이었다.
"알면서도 치료법을 찾지 못했다는 말이오?"
"현월궁에 재물을 바치는 게 제일 확실하면서도 돈이 적게 드는 방법입니다."
사내의 말에 구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룡대구식처럼 아무도 익히지 못하면 그냥 없는 무공이나 마찬가지긴 하지.'
다른 치료법이 없는 건 아닌데, 몹시 어렵거나 위험하다.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니 괜히 모험하기보단 확실한 현월궁의 약에 기대는 게 낫다.
물론, 통나무가 사라진 지금은 구후영이란 지푸라기라도 어떻게든 잡으려는 거고.
"나도 고독은 처음인데, 믿고 치료를 맡기겠소?"
"그럼요. 당연히 믿고 맡겨야죠."
이미 단아의 솜씨를 본 셋은 확인한 적도 없는 구후영의 의술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모닥불을 크게 피워 천막 안을 덥히고, 밖에 찬물을 준비하시오."
구후영의 말에 사내들이 밖으로 나가 부족 사람들에게 연신 지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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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면서 죽여야 한다.'
아이의 몸을 살리면서 고독만 죽여야 한다. 문제는 고독이 자리를 잡은 만큼, 아이를 살리면 고독도 살고, 고독을 죽이면 아이의 몸에도 해가 간다.
안물만큼 약 쓰는 재주가 없는 구후영으로선 기댈 곳이 침술뿐인데, 확신이 없어 가슴이 연신 두근거렸다.
'유일하게 기댈 만한 게 어른은 고독에 잘 안 걸린다는 건데.'
이유는 모르지만, 어른보단 아이가 고독에 취약하다. 구후영은 그에 따른 가설을 세웠고, 자기 가설이 맞기만 바라야 하는 상황이다.
'일단 해보자.'
이대로 두면 죽을 게 뻔하기에 확실하지 않다고 망설일 시간도 없었다. 구후영은 느린 호흡으로 긴장을 달래며 아이를 어떻게 치료할지 속으로 되새겼다.
'의원이 한 명 더 있었으면.'
이론적으론 황제를 치료했던 것과 비슷하게 하면 된다. 황제와 달리 오장육부에 기운이 부족한 부분은 구후영의 내공으로 해결하면 되는데, 신한천처럼 곁에서 침진을 하며 조언해줄 사람이 없어 혼자서 모든 걸 확인하고 고민해 결정하는 부분이 걱정이었다.
구후영이 고민하는 사이,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에 천막 안은 어느새 구슬땀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더워졌다.
"함부로 못 움직이게 꽉 묶으시오."
때가 오자 구후영은 걱정을 단숨에 털어버리고 세 사내에게 아이의 상의를 벗긴 다음 천으로 꽉 묶을 것을 요구했다.
"우리가 붙잡고 있으면 안 됩니까?"
세 사내는 현월궁에 바치려고 준비했던 천을 찢기 아까운 듯했다.
"치료가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오. 그리고 고독이 발작하면 아이여도 어른과 같은 힘을 낼 수 있소."
구후영의 말에 세 사내가 천을 북북 찢은 다음 그걸로 아이의 몸을 침상에 꽉 묶었다.
"치료는 내게 맡기고 세 분은 모닥불을 살피시오. 불기운이 지금 정도가 딱 좋소."
"명심하겠습니다."
당부를 마친 구후영은 투기침 두 개를 꺼내 양손에 잡았다.
'일단 기운을 넣어 고독이 어찌 반응하는지 살핀다.'
구후영은 단전에서 한 줄기 기운을 뽑은 다음 심장에서 시작해 간장까지 돌렸다. 십이정맥도 팔기맥도 아닌 황제를 치료할 때의 운기법인데, 천하에 이런 방식으로 운기할 수 있는 무인이 몰라도 다섯은 안 넘을 것이다.
'넉넉하게 백 번 돌린다.'
구후영은 자기 몸에서 백 바퀴 돌린 기운을 투기침을 통해 아이 몸에 주입했다.
'됐다.'
처음엔 혈도에 그대로 머물던 기운이 결국엔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전엔 황제의 기운을 돌려준 거고 지금은 구후영 본인의 기운을 주입했다. 그래서 확신이 없었는데, 다행히 아이의 몸에 들어간 기운이 오장육부를 순서대로 돌았다.
'직접 운기하면 몇 배나 위험한데, 좋은 조짐이다.'
구후영이 직접 아이의 몸에서 운기하는 방법도 있으니 지금 방식이 실패한다고 끝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 몸에서 운기하는 건 작은 실수로 큰 파탄을 부를 수 있기에 구후영은 현재 상황이 더없이 만족스러웠고.
이어지는 상황도 구후영이 원하는 대로였다.
'느껴진다.'
추운 북방에 사는 고독은 쌀쌀할 땐 잠자고 더운 여름에 가장 활발하다.
지금은 모닥불을 잔뜩 피워 무더운 여름인 것처럼 상황을 만든 데다가 먹음직한 기운이 들어간 덕분에 고독이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구후영의 기감에 포착됐다.
'다행히 제일 쉬운 곳이다.'
심장과 신장은 잘못 건드리면 큰일이다. 허파는 치료하기 힘든 장기고, 비장은 기운이 잘 안 닿아 치료가 허파보다도 어렵다.
그나마 만만한 게 간이니 고독을 죽이는 방법에 확신이 부족한 구후영에겐 최선의 상황인 셈이다.
'제발 통해야 할 텐데.'
구후영은 스무 개가 넘은 침을 꽂아 간맥을 차단했다. 간으로 향하는 길이 모두 막히자 오장육부를 순환하던 흐름이 잦아들었다.
'지금!'
성장을 돕던 기운이 갑자기 사라지자 여름이 온 줄 알고 기지개를 켜던 고독이 화났다. 그러나 구후영이 간맥의 외부로 통하는 혈도를 모조리 침으로 막은 탓에 아무리 용써도 움직일 곳이 없었다.
고독의 몸부림을 기감으로 지켜보던 구후영은 때가 익었다는 생각에 기문혈期門穴에 공심침을 꽂았다.
팍!
구후영이 흡력을 발생하지 않았는데도 공심침의 빈속을 통해 꽤 많은 피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찬물로 침 꽂은 주변을 적시시오."
구후영의 분부에 사내 중 한 명이 바로 밖으로 나가 찬물에 적신 천을 들고 들어왔다.
"서둘러야 하오."
구후영의 말에 사내가 천으로 침 주변을 빡빡 문질렀다.
'생각보다 순조롭다.'
찬물로 체온이 낮아지자 고독들이 본능적으로 발악했으나 다른 따뜻한 곳으로 가는 길이 모조리 막힌 탓에 선택의 여지 없이 기문혈에 꽂힌 공심침을 통해 몸 밖으로 나왔다.
'안물의 머리에 들었던 벌레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안물의 것보다 길이가 훨씬 짧았지만, 구후영의 기감엔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끝났소."
고독이 더는 나오지 않는 공심침을 뽑으며 구후영이 말했다.
"정말입니까?"
생각보다 간단하게 끝나자 세 사내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반문했다.
"조금 남긴 했는데, 그 정도론 별 해악을 끼치지 못할 거요."
남은 양은 아이가 건강해지면 절로 죽을 것이고, 안 죽고 남는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안 된다.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사람이 없듯, 얼마 안 남은 고독까지 죽이느라 아이 건강을 해칠 순 없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여전히 믿기지 않았지만, 아이가 편한 얼굴로 고르게 숨 쉬는 모습에 세 사내는 연신 허리를 숙였다.
"그런데."
구후영이 간맥을 차단한 침들은 그대로 둔 채 밖으로 나온 고독들을 모아 그릇에 담으며 말했다.
"문제가 있소."
"네?"
"이 치료는 장작을 너무 많이 쓰오."
아이 한 명을 치료하는 데 어마어마한 양의 장작을 태웠다. 팔십 명이나 되는 아이를 모두 치료하려면 작은 민둥산 하나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고독이 심장이나 신장에 있으면 이 치료법은 위험하다. 구후영은 기감이 발달하고 침술 경지도 높아 괜찮지만, 다른 의원은 이 치료법을 흉내 낼 엄두도 못 낸다.
"우선 위급한 아이만 치료한 다음, 남은 아이들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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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부족 사람들이 열심히 장작을 모으고 있지만, 사라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구후영은 모닥불의 열기가 있는 동안 한 명이라도 더 치료하려고 애썼다. 그 탓에 자정이 지난 지금까지 잠시도 쉬지 않았다.
"난 괜찮소. 아이를 데려오시오."
"그리하겠습니다."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한 사내가 밖으로 나갔다.
"다른 분부는 없습니까?"
천막 안에 남은 두 사내 중 하나가 질문했다.
"생각나면 그때 말하겠소."
"뭐든 분부하십시오."
상상을 초월하는 솜씨에 사내들은 구후영이 죽으라면 시늉이 아니라 진짜 칼로 자신을 찌를 기세였다.
"마침 궁금한 게 있긴 있소. 당신들은 왜 여아를 먼저 치료하는 거요?"
구후영이 처음에 치료한 아이 모두 여아고, 남아들은 여아의 치료가 끝난 다음에야 나타났다. 중원에선 출가하여 외인이 될 딸보단 노쇠한 부모를 모실 아들한테 훨씬 많은 정을 쏟기에 이해 안 가는 대목이었다.
"우리 건주建州는 예부터 늘 남자가 여자보다 많습니다. 싸움이 잦아서 남자들이 더 쉽게 죽는데도 그렇죠."
사내가 공손한 태도로 설명했다.
"그래서 여자가 귀합니다. 딸을 둘 이상 낳은 여자는 집안일을 안 하고 놀아도 아무도 뭐라 못 합니다."
상상을 뛰어넘은 말에 구후영은 입을 딱 벌렸다.
"식량이 넉넉해도 부족과 부족이 자주 싸우는 이유가 여자를 뺏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부족끼리는 혼인하지 못하기에 서로 여자를 바꾸는 일이 잦은데, 그러다 약한 부족이 강한 부족에게 아내까지 뺏기는 거죠."
"적절한 규칙을 세워 해결할 수 있지 않소? 중원처럼 혼인에 관한 법을 세우면 서로 이득 아니오?"
"법을 세워봤자 누가 지킵니까? 법을 안 지키는 게 지키는 것보다 훨씬 쉽고 좋은데."
대화하는 사이에 밖에 나갔던 사내가 아이를 데려왔고 세 사내는 능숙하게 아이를 침상에 묶은 다음, 모닥불에 장작을 마구 던졌다.
모닥불의 열기가 올라오길 기다리며 사내 한 명이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제가 젊을 때 장가 한번 가겠다고 야밤에 맹수한테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부족에 여자 뺏으러 갔었습니다. 부모와 주변 친척들이 말렸는데도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뺏어봤자 뭐 좋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모실 상전이 한 명 더 늘 뿐이죠. 저만 해도 부족의 수령에 명나라 관직을 받은 관리인데, 집에서 아내한테 매 맞습니다."
"진짜요?"
글공부만 한 유약한 서생이면 몰라도, 맹수도 맨손으로 때려잡을 것 같이 덩치 크고 팔다리가 굵은 사내가 아내한테 매 맞는 장면은 전혀 상상되지 않았다.
"제 아내는 딸을 다섯이나 낳아서 누구보다 많이 존경받습니다. 다른 부족의 여자 다섯과 바꿀 수 있고, 딸 하나를 양 열 마리나 말 두 필과 바꿀 수 있으니깐요."
'진짜 세상엔 별의별 일이 다 있구나.'
"더구나 셋째딸은 인물이 출중해 다른 부족에서 여자 세 명과 바꾸자는 제안도 들어온 적 있습니다."
'재물처럼 거래되나 비참하진 않다. 이것 역시 태극인가.'
사내의 과장 섞인 하소연 덕분에 구후영은 안계가 한결 넓어진 느낌이었다.
- 작가의말
남자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지어 먹은 다음 밭일을 나갑니다. 여자는 열 시쯤에 일어나 남자가 지은 아침을 먹은 다음 새 음식을 만듭니다. 여자가 지은 음식을 들고 밭에 가면 둘이 밭머리에서 점심을 먹죠.
식사를 마친 다음 남자는 다시 밭일하고 여자는 그늘에 앉아 담배를 피웁니다. 그러다 해가 지면 같이 집으로 돌아갑니다.
실제로 지금도 요녕의 일부 농촌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일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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