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도강李代桃僵
도재노정상桃在露井上 이수재도방李樹在桃旁
복숭아나무는 우물가에 자라고, 자두나무는 그 곁에 자랐네.
충래교도근蟲來嚙桃根 이수대도강李樹代桃僵
벌레가 복숭아나무 뿌리를 갉으려 하니 자두나무가 대신 죽누나.
수목신상대樹木身相代 형제환상망兄弟還相忘
나무도 서로 몸 바쳐 지키는데 형제가 어찌 서로를 잊는가.
방장은 손을 소매 안에 숨긴 채 손가락을 정신없이 비벼댔다.
'원병까지 지면.'
공유의 죽음과 원철의 패배로 원병은 이제 소림을 대표하는 유일한 고수가 되었다. 원철이 주화입마와 내상을 다스리고 원래 무위를 회복한다고 쳐도 구후영한테 패한 오명汚名이 남기에 더는 소림을 대표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 가능성이 희박하다고는 하나 만에 하나 원병까지 패배하면, 그것도 무당 장문이었던 옥무영한테 지면.
주해본을 얻으려고 했던 모든 노력이 물거품 되는 건 물론이고, 무당의 기염을 누르고 소림의 위세를 떨치려던 일이 정반대의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당연히 소림의 명성은 진창에 처박히고 당분간 강호의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주해본을 얻는다면 잠시의 오욕쯤은 상관없지만.'
상대는 백팔나한진을 상대하고도 멀쩡한 듯한 구후영이고, 원병한테 당당히 도전장을 내민 신검의 제자다. 게다가 동종의 무공을 익힌 원경이 높은 경지로 소림의 모든 제자를 압도할 수 있다.
'이대로 끝나면.'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스껍고 가슴이 답답하던 그때.
"멈추시게."
옥무영과 원병의 대결을 방해하는 잔잔한 목소리가 빗방울이 일으킨 파문처럼 미약하게 연무장에 퍼졌다.
'누구지?'
사람들이 접객화상과 함께 등장한 외모가 볼품없는 노인에게 시선을 모았다.
옷은 물론이고 신발도 해져서 기운 흔적이 잔뜩이었고, 오랜 기간 자르지 않은 하얀 머리는 허리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팔다리도 가느다란 것이 접객화상이 부축하지 않았으면 벌써 쓰러졌을 것 같았다.
"본선本善 사조요."
궁금이 가득 담긴 눈빛이 자신한테 쏠리자 접객화상이 떨리는 목소리로 노인의 신분을 밝혔다.
그에 소림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무림첩을 받고 온 손님들도 분분히 허리를 숙여 본선에게 예를 차렸다.
"아미타불. 노납은 그간 모든 연을 끊고 세상사를 묻지 않으며 살아왔소. 그러나 오늘은 부득이하게 청정을 깨고 이렇게 나서려 하오."
본선의 말에 소림의 스님들이 부끄러운 얼굴을 하고 연신 아미타불을 외웠다.
"원수를 원수로 갚으면 원한은 끝나지 않고, 잘못에 잘못을 얹으면 돌이킬 수 없소."
본선이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옳고 그름은 힘으로 가늠하는 게 아니오. 고해는 무변하나 돌아서면 피안이니, 이제라도 멈추시오."
본선의 말에 원병과 옥무영이 아쉬운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둘의 대결을 기대했던 구경꾼들 역시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방장에겐 부처님의 자비로운 은혜로 느껴졌다.
"욕慾은 귀를 속이는 마귀의 속삭임이요, 눈을 가리는 악마의 검은 날개요, 이성을 흐리는 달콤한 술이요, 양심을 잊게 하는 부드러운 비단옷이요."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시를 읊조리듯 말하던 본선이 방장에게 눈길을 주며 한탄했다.
"현재 벌어진 일은 누구 한 명의 잘못이 아니오. 그러나 굳이 한 명 뽑으라면 그건 원호 사손이겠지. 이만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건 어떻소?"
본선의 권퇴勸退 발언에 방장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조께서 나타난 건 원로들이 이번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물러나도 무방하나, 지금 흐름은 모든 책임을 나한테 씌우고 일을 마무리할 생각으로 보이는데.'
주해본을 얻는다면 방장 자리가 아니라 소림이 자신을 쫓아내도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원하는 바를 하나도 이루지 못한 상황에 이대로 물러나는 건 마음에 드는 선택지가 전혀 아니었다.
"원호 사손은 내 충고를 받아들일 마음이 있소?"
방장은 이대로 손을 떼는 게 너무 아쉬웠으나 체념한 듯한 접객화상의 얼굴을 보고 마음을 정했다.
"그럼 사조의 지혜를 빌리겠습니다."
방장이 순순히 물러나자 본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정, 날 저기까지 부축해라."
본선이 접객화상에게 부축받아 방장이 있는 곳에 갔다. 그에 방장이 몸에 걸친 누런 가사를 벗어 본선한테 걸쳐준 다음 단상 아래로 물러났다.
'분위기가 변했다.'
사손이 사조한테 자리를 내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 소림에선 무림대회가 열리는 중이고, 주최자인 소림이 몹시 어려운 처지에 몰렸다.
그런 상황에 방장이 물러서고 본선이 자리를 차지하자 연무장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우선, 별거 아닌 일로 수고를 끼친 점 진심으로 사과하오."
본선의 말에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세상에 들러서 잠깐 빌려 쓰는 이까짓 하찮은 껍데기에 검 하나 꽂혔다고 호들갑을 떨어서야 어찌 부처를 모시는 고행자苦行者라고 할 수 있겠소."
생사마저 담백하게 여기는 본선의 말에 소림 스님들은 깊이 감명받은 얼굴이었고, 무림첩을 받고 온 손님들도 하나같이 감탄했다.
'부처를 섬기는 스님이라면 이래야지.'
구후영 역시 대부분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단.
"공유 사숙의 피살이 어찌 그깟 일일 수 있습니까?"
여전히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 원병이 사조의 말에 거침없이 반론을 제기했다.
"태어남은 시작이 아니고 죽음은 끝이 아닐진대. 과거의 인에 의한 과를 맺고 떠났든, 다음 윤회의 과를 위한 인을 품고 떠났든, 그건 공유의 인이고 과다."
틀린 거 하나 없는 말에 사람들이 분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조께선 제자가 억울하게 죽었는데도 슬프지 않습니까?"
원병의 말에 사람들이 감탄을 멈추고 경탄을 질렀다.
공유의 사부가 본선이라는 걸 아는 자가 드문 탓이었다.
"인연이 남았을 땐 세상 무엇보다 소중히 품어야 하나, 인연이 끝나면 헌신짝처럼 버려야 함이 마땅하다."
본선의 말에 스님들이 눈을 감고 연신 불호를 외쳤다.
'누구나 아는 말이나 행동으로 옮기긴 어렵겠지. 내 주변의 친인들이 떠나면 나도 저리 담담할 수 있을까?'
곧 환갑을 바라보는 할머니를 떠올리자 구후영은 갑자기 슬퍼졌다.
'늙어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쉬운 건, 그 과정을 함께하지 못한 것이지. 이제라도 강호를 멀리하고 할머니와 함께 천륜지락을 누려야겠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복수, 일지봉의 낙화문, 낙화문만큼 애틋하진 않으나 아예 내려놓을 순 없는 대유방 등이 떠오르며 구후영은 속이 갑갑해졌다.
'강호는 한 번 발을 담그면 영원히 못 빠져나가는 곳인가?'
본선의 말을 듣고 떠오른 수많은 생각으로 구후영이 머리가 어지럽던 그때.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 일이 이 지경이 된 것 같네. 늦었지만, 노납이 소림을 대표해 구후 시주께 저지른 무례를 사과하네."
본선의 말이 구후영을 고민에서 건져 올렸다.
"소생도 소림에 저지른 무례를 사과합니다."
정신을 차린 구후영이 정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옥 시주께도 소림이 저지른 무례를 사과하네."
"하하, 별거 아니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옥무영 역시 시원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덕분에 연무장의 분위기가 한결 화기애애해졌다.
"두 분 시주께서 너그럽게 이해해주니 참으로 고맙소."
푸근한 얼굴로 구후영과 옥무영에게 감사를 표한 본선이 다시 얼굴을 굳혔다.
"반야당 당주 원철은 타인에 모범을 보여야 하는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승심으로 구후 시주와 대결을 벌였고, 적절한 선에서 멈추지 못했소. 다행히 부처께서 살피셔서 마땅한 벌을 내렸으나, 합당한 처벌로 자기 잘못을 제대로 깨우치게 해야 한다고 보오."
본선이 작게 탄식하고 말을 이었다.
"이에 노납은 원철의 당주직을 박탈하고 면벽 삼 년의 징계를 내릴 것을 제안하오."
뜻밖의 말에 소림 스님들이 서로 쳐다보며 아무런 대꾸도 못 했다.
"딱히 반대 의견은 없는 듯하니, 이대로 진행하겠소. 반야당 당주 자리는 부당주 원율이 맡고, 부당주 자리는 당분간 공석으로 하겠소."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접객화상의 눈치를 받은 원율이 말했다.
"원호는 소림 방장이라는 중책을 맡았음에도 공유의 죽음에 평정심을 잃고 그릇된 결정을 연이어서 했소. 그저 강호 문파라면 사숙과 사질의 정이 끈끈하다고 여기겠지만, 부처를 모시고 마음을 닦는 소림의 방장으로선 실격이오."
본선이 눈에 힘줘 방장을 바라봤다.
"이에 원호의 방장직을 박탈할 것을 제안하오. 방장은 원자 항렬에서 새로 뽑을 생각이고, 원호의 처벌은 이번 사건을 자세히 조사한 다음 새로운 방장이 정할 것이오."
'정말 이대로 끝인가?'
원로들이 나서서 뭔가 해주길 바랐던 원호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사조의 말씀을 듣고 돌아보니 제 잘못들이 눈에 똑똑히 들어옵니다. 사조께서 아까 말씀하셨듯이 고해는 무변하나 고개를 돌리면 피안이니, 제자께 잘못을 바로잡아 속죄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다음엔 어떤 벌도 달갑게 받겠습니다."
원호가 순순히 방장 자리를 내놓으려 하지 않자 연무장이 작게 술렁였다.
"욕심과 미련은 버렸느냐?"
작은 체구에서 나온 거라곤 믿기 힘든 외침이 연무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진정 네가 고개를 돌렸고, 네가 본 곳이 피안이라고 생각하느냐?"
'불심사자후佛心獅子吼!'
부처가 자비를 담아 외치자 사자가 사냥을 멈췄다는 이야기에서 비롯한 불심사자후는 소림의 칠십이절기에 들지 못했다.
소리만 클 뿐 살상력이 전혀 없고, 심마를 물리치는 데 좋다는 말이 있으나 전혀 검증되지 않았다.
그러나 구후영은 복잡하던 마음이 정갈하게 바뀌는 느낌이었고, 원경과 옥무영 역시 내상으로 갑갑하던 속이 한결 시원해졌다.
"더는 반론을 허락하지 않는다. 계율원은 원호를 속박하라."
본선의 단호한 말에 계율원주가 노끈을 꺼내 원호의 양손을 묶었다. 가는 노끈이고 제대로 묶지도 않았지만, 노끈에 실린 소림의 권위 때문에 원호에겐 정련한 쇠사슬보다 더 단단하게 느껴졌다.
'진짜 끝났구나.'
절망에 빠진 원호의 귀에 본선의 사자후가 매섭게 울렸다.
"공유의 죽음에 관해선 좀 더 신중히 조사하고 결론을 내리겠소. 이리도 많은 분께 폐를 끼쳤으니 이대로 끝낼 순 없겠지."
말하던 본선이 갑자기 허리를 숙이고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한참이나 쿨럭거렸다.
"나이를 먹으니 오래 서 있기도 힘들군."
"그만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접객화상의 말에 본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정, 구후 시주의 검을 돌려드려라. 내가 그것까진 보고 가야겠다."
천공교검은 공유의 죽음에 관련한 중요하면서도 유일한 단서다. 그걸 구후영에게 돌려준다는 건 구후영뿐이 아니라 원경의 혐의도 벗겨준다는 뜻인데, 이대로는 어떤 경우에도 다시 구후영과 원경을 흉수로 몰고 핍박하기 어렵다.
즉, 소림의 모든 계획이 이대로 끝났다는 뜻이다.
그래선지 천공교검을 들고 구후영에게 다가가는 접객화상의 몸이 딱딱히 굳어 있었다.
그때.
연무장을 에워싼 손님들 사이에서 회색 인영 하나가 튀어나와 굶주린 맹수처럼 접객화상을 덮쳤다.
- 작가의말
소년이여, 어른이 되어라.
송아지여, 소가 되어라.
망아지여, 말이 되어라.
강아지여, 개가 되어라.
방장이여, 자두나무가 되어라.
이대도강은 벌레가 복숭아나무 뿌리를 갉아 먹으려고 하자 자두나무가 자기 뿌리를 희생해서 대신 죽어간 이야기에서 비롯됐으며, 형제의 우애를 강조하는 사자성어였습니다. 이게 삼십육계에 들어가면서 손실을 줄이기 위해 장기짝 하나 버리는 식으로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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