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반하장賊反荷杖
자고로 인간은 후안무치하여,
방귀 뀐 놈이 성을 내고,
도둑질한 놈이 몽둥이를 든다.
구후영도 그간 있었던 일을 최대한 추려서 간단히 말했다. 물론, 약초꾼 일행과 장방선생의 정체나 공청석유에 관한 얘기는 사부한테도 비밀로 했다.
"네 의술이 필요해서 자룡을 납치해 협박했고, 도굴에 성공하고 너한테 보석을 나눠줬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진나라 때 유적인데, 거기서 이것도 찾았습니다."
구후영은 낙화검법의 비급을 꺼냈다.
"약 천칠백 년 전에 만든 비급입니다."
비급을 본 임초현이 울먹였다.
"우리 문파가 진짜 천 년이 넘었네?"
천 년이 넘은 문파라고 말하고 다니나 정작 임초현 본인도 안 믿었다. 그런데 눈앞에 증거가 나타났다. 문파에 대한 자부심 하나로 버티고 살았던 임초현이기에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구후영은 사부가 진정하길 기다려서 궁금한 걸 질문했다.
"제가 남긴 쪽지는 못 보신 겁니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룡이 납치되었다고 글로 남겼는데."
"네 방을 내가 직접 살폈는데 없었다. 참, 이럴 게 아니라 여긴 내게 맡기고 넌 어서 자룡의 행방부터 찾거라."
임초현은 사부씩이나 돼서 자룡을 찾는 일에 도움은 못 줄망정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부의 치료가 먼저입니다. 사제들도 안치해야 하고요."
자룡을 빨리 찾고 싶지만, 그러다 자룡의 죽음을 확인할까 봐 걱정도 되었다. 약방을 다녀오는 내내 갈등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한 구후영은, 비겁하게 사부와 사제들을 핑계로 자룡의 생사를 확인하는 일을 최대한 뒤로 미루기로 했다.
"제 망아지는요?"
사부가 설득할 기색을 보이자 구후영이 말머리를 돌렸다.
"용호표국에 있다. 사정이 이래서 망아지까지 데리고 나오긴 좀 그랬다."
"그간 성황묘에서 지내며 끼니는 어떻게 해결한 겁니까?"
"어떤 호구가 글쎄 자기 동생도 낙화문 제자라면서 은자를 주더라. 무슨 꿍꿍이지 싶어 거절했더니 그때부터 저녁마다 음식을 꼬박꼬박 보내왔다. 날이 저물면 또 올 거야."
"누구 형인데요?"
"몰라. 처음 듣는 이름이었어."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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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사람을 잡았다.
"아우. 몇 달 못 봤더니 풍채가 훨씬 좋아졌어."
"형님도 신수가 훤하십니다."
"진짜 유저 의형이었소?"
"그럼요. 생각 같아선 장원으로 모시고 싶으나, 제가 사정이 좀 있어서."
곧 서른인 주제에 장가도 안 가고 딱히 벌이도 없이 용돈을 받아쓰기에 손님을 들이기가 좀 그랬다. 억지로 들이면 가족이 손님한테 눈치를 줄 게 분명하다.
"형님. 제가 돈 좀 벌었는데 장원 하나 사고 싶습니다."
"보자. 이 정도 인원이 살려면 최소 집 다섯 채는 있어야겠지? 내가 바로 알아보마. 그런데 돈은 있어? 난 스무 냥 정도밖에 없어서 많이 못 보태주는데."
"돈은 얼마 들어도 괜찮습니다. 최대한 빨리 구해주시면 됩니다."
"알았어. 내게 맡겨. 근데, 오랜만에 만났는데 사부님 모시고 술 한잔해야 하는 거 아니야?"
"사부께서 화상을 입어 당분간 술을 입에 못 댑니다. 제자 된 몸으로 어찌 아픈 사부를 두고 혼자 마시겠습니까. 사부님이 완치하는 날 동생이 반드시 큰 술상을 차려 대형을 모시겠습니다."
청빈과는 마음의 교류가 있은 덕분에 감정이 꽤 절절했으나 왕제상과 원경은 그저 술친구 정도의 깊이밖에 없었다. 그런데 단지 낙화문이라는 이유로 아니라는 데도 음식을 보내며 돌본 마음 씀씀이에 구후영은 제대로 감동했다.
"그래. 더 늦으면 꾸중 들을지도 모르니 그만 가야겠다. 왕가장이 어딘지는 태원부에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어려운 일 생기면 언제든 찾아오거라. 사부님도 몸 보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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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잔에서 푹 잔 구후영 일행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포목점으로 갔다.
"주인장. 날 빼고 모든 사람에게 동복과 춘복 한 벌씩 맞추겠소."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천은 어떤 걸 쓸까요?"
"몸 쓰는 일이 많으니 튼튼하고 질긴 천으로 부탁하오. 언제면 되겠소?"
"열흘 정도 걸립니다."
"동복을 서둘러 준비하시오."
"기성복이 좀 있긴 한데, 몸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보통 동복은 가을에 찾는 게 일반적이다. 소위 말하는 기성복은 만드는 과정에 하자가 생겨 퇴짜를 맞은 물건이다.
"싸게 준다면 생각해보지. 당장 입을 옷도 필요하긴 하니."
구후영은 열여섯 벌이나 되는 동복을 은지 반 개로 샀다. 그러나 포목점 주인 입장에서도 손해는 아닌 게, 어차피 팔지 못해서 자기 아이한테나 입혀야 할 물건이었다.
"동복은 됐고, 춘복이나 잘 만들어 주시오. 애들이 금방 자라니까 치수는 넉넉하게 잡고. 옷이 좋으면 하복 사러 또 올 테니까 대충 만들지 마시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염려 놓으십시오."
치수를 모두 잰 포목점 주인이 예금으로 은지 반 개를 받았다.
포목점을 떠난 일행은 양조장 근처에 있는 목욕탕으로 갔다.
"사부는 물에 담그지 마시고 그저 때만 미셔야 합니다."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가 강호를 굴러다녔다. 그 정돈 당연히 알지."
사부와 사제들을 목욕탕에 보낸 구후영은 전장을 찾았다.
"어서 오십시오."
"날 기억하겠소?"
"그럼요. 지난가을에 은자 백 냥 축은하신 분 아닙니까. 그새 풍채가 훨씬 좋아지셨습니다."
"그때 받은 전표가 불에 타 사라졌는데 새로 발급받고 싶소."
"그러셨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구후영이오."
장부를 꺼내 확인하던 직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손님. 진짜 전표가 불에 타 사라졌습니까?"
"아마 그랬지 않겠소? 나무로 지은 집이 다 타서 터밖에 안 남았는데."
"그게 말이죠. 열흘 전에 누가 전표를 들고 와서 은으로 환전했습니다."
'불 지른 놈? 자룡을 납치한 놈?'
구후영은 뭔가 단서가 생겼다는 생각에 오히려 기뻤다.
"그게 누구요?"
"장인호라고 적혔습니다. 신분 보증인은 용호표국의 담청산 공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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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담 표국주랑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까?"
"아니. 난 절정치고는 내공이 적은 편이다. 그간 들은 강호의 소문이 과장이라고 쳐도 내가 담 표국주의 상대는 아니지."
"사숙들은 담 표국주가 강해서 낙화문을 버린 걸까요? 아니면 낙화문이 약하다고 버린 걸까요?"
"문파가 약하고 내가 약해지고 담 표국주한테 빌붙을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랬겠지. 아니면 내 독단에 불만이 컸거나."
"일을 결정할 때 사숙들이랑 좀 상의했으면 나아졌을까요?"
"문파보다 자기가 더 중요한 놈들이다. 그놈들과 상의했으면 낙화문이 옛날에 망했다."
"일이 이 지경이 됐으니 만회할 방법은 이젠 없는 거네요."
"그렇지. 그놈들이 다시 오겠다고 해도 내가 말릴 거야."
"알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구후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려는 거냐?"
"망아지 찾으러요."
구후영이 눈에 힘주며 대답했다.
"겸사겸사 위세도 좀 떨고 오겠습니다."
임초현은 말리고 싶었으나, 구후영을 보니 어떤 말도 안 들을 얼굴이었다.
"조심해라."
"네."
구후영은 몸을 가볍게 하고 천공교검만 멘 채 용호표국을 찾아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문지기가 처음 보는 구후영을 향해 머리를 깍듯이 숙였다. 구후영이 수도인 순천부에서 유행하는 옷으로 잘 차려입은 덕분이었다.
"내 망아지가 여기 있다고 들었다. 털이 빨갛고 머리가 큰 놈이다. 다른 용건은 없으니 내 망아지를 내보내라."
문지기는 자기가 어찌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안으로 들어가 사정을 일렀다.
잠시 후 몸집이 단단한 사내가 문을 열고 나왔다.
"누구시오?"
"낙화문 대제자 유저라고 하오. 내 망아지가 여기서 신세 진다고 들어서 찾으러 왔소."
"안으로 드시오."
분명히 망아지 찾으러 왔다고 용건을 명확히 밝혔건만, 사내는 구후영을 마구간이 아닌 객청으로 안내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시오. 곧 차를 내겠소."
게다가 자리를 권하고 차까지 준비하려 했다.
"그저 망아지 찾으러 왔는데 이리 융숭히 대접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소."
사내는 구후영의 빈정거림을 무시하고 객청을 떠났다.
대신, 사내가 떠나기 무섭게 나타난 장인호가 구후영을 상대했다.
"이게 누구야. 유저 아니냐?"
머리에 푸른 영웅건을 두르고 비단옷을 입고 노루 가죽으로 만든 신을 신은 게 일부러 위세 떨러 온 모양이었다.
"인호구나. 그간 잘 지냈느냐. 그런데 대사형께 올리는 안부 인사라고 하기엔 아주 불손하구나."
"대사형 좋아하네. 근본도 없는 놈이. 네 사부한테서 못 들었니? 우리 이젠 낙화문 제자가 아니다."
"응? 낙화문 제자가 아니라고? 그게 무슨 말이지?"
"무슨 말이긴. 사부와 사숙 모두가 낙화문을 떠났고 우리 사형제 중 몇몇도 함께 나왔다."
"이걸 어떡하지? 제자가 장문의 허락 없이 문파를 떠나려면 단전을 폐하고 팔과 다리의 인대를 하나씩 자르는 게 강호의 법도인데."
무슨 개소리냐고 받아치려던 장인호는 구후영과 눈을 마주치고 입을 떼지 못했다.
'밖에서 뭘 하고 돌아다녔길래.'
기대했던 증오나 원한이 가득한 눈이 아니었다. 발톱 하나로 눌러 죽여도 되는 하찮은 벌레를 바라보는 오만하면서도 광폭한 맹수의 눈빛이었다.
그때, 외모가 헌앙한 청년이 안으로 들어왔다. 마찬가지로 비단옷을 입었는데, 장인호의 것보다 훨씬 비싼 상급의 비단이었다.
"용호표국의 표두 담청산이라고 하오. 그대가 망아지 주인인가?"
"낙화문 대제자 유저요. 내 망아지는 어디 있소?"
"다름이 아니라, 그 망아지와 내가 인연이 깊다 싶어 곁에 두려는데, 얼마면 팔겠소?"
"팔 생각이 없소. 그 망아지와 난 천명天命(하늘이 내린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이 있소."
"어허, 유저야.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평소 문파에서 하던 것처럼 버릇없이 구느냐."
이사숙 호비의 등장에 구후영은 살짝 웃었다.
"누구신데 대화에 함부로 끼어드는 것이오?"
"이놈이 사숙한테 무슨 말버릇이냐!"
"사숙? 그대도 낙화문의 제자요?"
그제야 말실수를 자각한 호비가 무안함에 흠흠거렸다.
'나쁜 사람은 아닌데, 멍청하고 욕심이 많고 이기적이다.'
구후영이 최근 내린 평가다.
"아니라면 용호표국 사람이오?"
이어진 질문에 호비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용호표국 사람이 아니라면 대화에 함부로 끼어들지 마시오. 강호에서 그러다간 칼 맞고 제 명에 못 뒈지오."
"어허! 이놈이. 그간 봐온 정이 있는데."
"나보다 더 오래 본 사부를 버리고 문파를 떠난 사람이 몇 년 본 나한테 정 운운하는 것이오? 지나가던 똥개가 웃다가 사레 걸리겠소."
"네 사부가 어떤 사람인지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리고 솔직히 낙화문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 있어?"
호비가 당당하게 외쳤다.
"용호표국은 당신한테 뭘 해줬소? 언젠가 용호표국이 뭘 안 해주면 그땐 용호표국도 떠날 생각이오?"
호비는 임초현의 정체를 수십 년 동안 모르고 지낼 만큼 미련하긴 하나, 아예 바보는 아니다. 차기 표국주인 담청산이 바로 곁에서 듣고 있기에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이거랑 그거랑 다르지. 여긴 계약에 따라 일하는 곳이고, 문파는 다른 얘기지."
- 작가의말
임인년 첫날에 글 올리는 시간 기준으로 선호작 100명이네요. 100점 받은 거 같아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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