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보천리跬步千里
순자荀子·권학勸學에 이르길.
적토성산積土成山 풍우흥언風雨興焉이고, 적수성연積水成淵 교룡생언蛟龍生焉이며, 적선성덕積善成德 이신명자득而神明自得 성심비언聖心備焉이다.
흙을 쌓아 큰 산을 만들면 여기서 비바람이 일고, 물이 고여 큰 못이 되면 여기에 교룡이 생긴다. 선행을 쌓아 높은 덕을 이루면 정신이 맑아지며 자연스럽게 성인의 마음을 얻게 된다.
구후영이 원해서 한 건 아니지만, 마교와 철혈방의 일, 황제를 구한 일, 소림과 화산의 일은 세상에 이로운 행동들이었다.
게다가 고독에 고생하는 아이들을 구하고 치료법까지 만들었기에 공덕이 원만하다고 해도 과한 칭찬이 아니다.
하지만.
"공자. 걱정이 깊어 보입니다."
말을 달리는 내내 구후영의 찌푸려진 이마는 펴질 기미가 없었다.
"이번 일로 느낀 게 많소."
구후영이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어쩌면 서창이나 동창 눈엔 무림인이 고독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소."
고는 인간의 몸에 기생하며 인간이 소화한 양분을 뺏어 먹는다. 이는 마치 일하지 않고 약탈로 먹고사는 산적이나 수적과 같은 행위인데, 무림인도 별반 다르진 않다.
철혈방과 같은 방파 형태의 무림인은 그나마 돈벌이 수단이 있는데, 무당이나 소림 등을 보면 도사나 스님들이 일하지 않는다.
"표국은 표물을 보호하니 일하는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산적이나 수적이 사라지면 표국도 쓸모가 없소."
산적, 수적, 무림인을 고독으로 여겨 모두 없앤다고 쳐도 세상에 딱히 해가 되는 일은 없다.
"무인이 생겨난 것도 다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군이 모든 백성을 지킬 여력이 안 되고, 관이 모든 다툼을 제지할 역량이 없으니 무공을 익혀 자신과 주변을 보호하려는 거 아니겠소.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소. 언젠가 세상이 좋아지고 관의 힘이 강해져서 수적과 산적이 사라지고 백성끼리 다투는 일도 줄면, 무림인은 진짜 고독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게 아닌지."
"선비도 일 안 하는 건 똑같습니다."
"선비는 관리가 될 사람들이고, 관리가 안 되더라도 글을 읽어 시비를 가릴 수 있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오. 무림인과 비교하면 훨씬 쓸모가 크오."
숨을 크게 들이쉰 구후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왜 인간을 상중하 삼류로 나누는지, 그 기준이 뭔지 늘 궁금했소. 그러다 하류에 속한 자들의 공통점을 발견했소."
"뭡니까?"
"일을 안 하는 자들이오."
농부는 중류에 속한다. 하류에 속하는 건 광대, 이발사, 백정, 기생, 거지 등이다.
"광대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백정은 도축하오. 이발사는 머리를 다듬고 기생 역시 웃음을 파는 일을 하오. 그러나 세상이 어려워지면 가장 필요 없는 일들이오."
"도사나 스님이나 선비는 왜 중류에 속합니까? 세상이 어려우면 이들도 쓸모없는 자 아닙니까?"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구후영이 대답했다.
"선비는 다툼이 일 때 시비를 가르고 잘못한 자를 꾸짖소. 스님은 어려운 사람을 위로하고, 도사 역시 제사를 통해 민심을 안정하는 일을 하오."
도사는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준다. 스님은 윤회를 들먹이며 착하게 살라고 설교한다. 선비는 옳고 그름을 확실히 가려 분쟁을 조기에 진압한다.
"결국엔 위정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자들은 일을 안 해도 중류를 차지한 거군요."
"농사를 짓는 농부는 중류요. 그런데 나무꾼이나 사냥꾼이나 약초꾼 등은 하류에 속하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오?"
"모르겠습니다."
"하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요. 세상에 가장 많은 게 농부인데, 이들의 삶은 고달프오. 그런 농부들보다 더 밑바닥 인생을 만들어 위로를 주는 방식으로 민심을 살리려는 거요."
구후영의 말에 단아가 감탄했다.
"정말 옳은 말입니다."
"극단의 광대들은 부자의 초청을 받고 공연하오. 부자들이라고 돈이 썩어나서 광대를 불러 길거리에서 기예를 펼치게 하는 게 아닐 거요. 아무래도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렇게 민심을 달래야 부자로 사는 게 편하다는 걸 느꼈고, 그게 관습처럼 굳어진 걸 거요."
"풍습 같은 거로 굳어진 일종의 통치 방식이군요."
"문제는 무인이오."
"무인은 중류에도 하류에도 넣기 애매하군요."
단아의 말에 구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류에 넣기엔 힘을 갖췄소. 그런데 중류에 넣자니 쓸모가 크지 않소. 관을 도와 치안을 유지하는 데 한 손 거드는 무인도 가끔 있지만, 대부분은 관과 가까워지길 꺼리오."
"차라리 군에 투신하면 괜찮을 텐데, 고생스럽게 무공을 익힌 자들이 그저 병사가 되는 건 달갑지 않겠네요. 그렇다고 나라의 녹봉을 받는 장수를 무제한으로 둘 수도 없고."
유교 경전을 공부한 선비들은 위정자가 만든 통치 체계에 부합하는 사고를 한다. 그렇기에 딱히 관리가 되지 않더라도 쓸모가 있다.
무인은 통치자가 확립한 질서보단 힘에 의한 질서를 더 따르기에 어찌 보면 고독과 같은 존재다.
"더 큰 문제는 하류들이 무공을 익혀 힘을 얻는 것이오.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하류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면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오."
농부들은 하류인생을 깔보고 욕하며 자신의 고달픈 삶을 달랜다. 이는 특별히 누군가가 이렇게 하자고 제안해 이뤄진 게 아니고, 오랜 기간 살아오며 자연스럽게 생겨난 방식이다.
"왜 상류에서 부처와 신선을 황제보다 더 높이 놓는지 의문이 컸는데,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되네요. 삼류구등은 결국 일종의 통치 사슬이군요."
"그렇소. 이 사슬을 무인이 갉아 먹고 있소."
"꼬장꼬장한 선비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백 년 뒤엔 성현의 행렬에 한 자리 차지할지도 모르겠네요."
단아의 농에 구후영이 씁쓸하게 웃었다.
"성현들은 세상에 도움이 되는 말을 많이 했소. 난 그저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을 뿐, 어떻게 해야 할지는 막막하오."
"계속 생각하다 보면 방법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최소한 맨날 무공 생각만 하는 것보단 낫습니다."
단아의 말에 구후영이 고개를 저었다.
"방법이 나온다기보단 계속 절망밖에 없소."
"왜 그렇습니까?"
"고독이 왜 아이들 몸에 들어가고 왜 결국 아이들을 죽이는지 고민했소. 실제로 어떤 건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내 생각엔 번식 때문이오."
"동의합니다. 세상의 모든 살아 숨 쉬는 것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싸우죠."
"난 고독이 발작하지 못하게 하는 약을 만들었고, 고독을 죽이는 약도 만들었소. 여전히 고독에 죽는 아이가 있겠지만, 아주 많이 줄어들 거요."
"좋은 일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고독도 서서히 사라질 거요. 사라지지 않더라도 지금처럼 기승을 부리지 못할 거고."
고독이 몸에 들어오고도 멀쩡하게 어른이 되는 아이가 드물지만 있다. 그게 아니면 여진족이 지금처럼 번성하지 못했다. 고독은 최대한 많은 사람의 몸에 들어가야 규모를 유지할 수 있는데, 구후영이 만든 처방으로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고, 일정 숫자 이하로 내려가면 결국 사라지고 만다.
"무림말살지계를 생각한 거군요."
"난 서창이나 동창의 생각을 알 것 같소."
무인이 최대한 죽으면 많은 무공이 소실한다.
"현재 강호에선 자질에 따라 자신에게 합당한 무공을 익힐 수 있소. 그러나 많은 무공이 소실되면 자질이 평범한 자들은 무인이 되는 길이 막힐 것이오."
"무인의 숫자가 극도로 준 상황에 강한 무공을 익힌 자들을 확실히 회유하면 통치 사슬이 아주 단단해지겠군요."
"그렇소. 내가 고독에 병든 아이들을 보고 그저 지나치지 못하듯이, 놈들도 자신들이 원하는 통치 체제에 해가 되는 무인을 가만두지 않을 거요. 난 황제가 무림말살지계를 멈출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황제도 저 미친 환관들을 막지 못할 것 같소."
"황제는 그저 통치 사슬의 꼭대기에 놓였을 뿐이군요."
구후영이 고민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단아가 웃으며 말했다.
"무림인이 세상에 해가 된다면 자연스럽게 줄지 않을까요?"
"그건 동의하오. 그런데 자연스럽게 줄어야지, 서창이나 동창의 음모로 무고한 자들이 억울하게 죽어서야 쓰겠소?"
"전 생각이 다릅니다."
단아가 반박했다.
"무림인의 규모나 실력이 이미 위정자를 위협할 수준이 된 게 틀림없습니다. 아니면 왜 예전엔 무림을 말살하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왜 갑자기 무림이 이렇게 흥한 거요?"
구후영의 질문에 단아가 흠흠 목청을 가다듬었다.
"잘 물으셨습니다. 왜 무인이 이렇게 갑자기 늘었는지 궁금하시죠? 소녀가 그 답을 압니다."
"귀한 말씀 청해 듣겠소."
구후영이 단아의 장난에 장단을 맞췄다.
"때는 바야흐로."
단아가 잠깐 멈추고 고민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명 황제가 어가친정을 나갔다가 북원 군대에 생포당합니다."
"토목보지변土木堡之變이오."
"그렇군요. 그땐 명교가 천산까지 밀려나기 전이었습니다. 명교는 황제가 생포되어 혼란한 틈을 타 섬서를 노리려 했죠. 그때 우겸이 나섭니다."
우겸은 새로운 황제를 옹립해 민심을 달래고 각 지역 군대를 북방으로 올리고 군량도 제때 보충해 빠른 기간에 정세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명교를 어찌할 순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호 문파들에 대량의 은자를 풀어 명교를 막게 했습니다."
"그건 꽤 오래전의 일 아니오? 그 영향이 지금까지 남았다는 거요?"
"그렇죠. 대량의 은자가 강호 문파에 흘러갔습니다. 강호 문파들은 돈이 생기자 제자를 많이 들였습니다."
단아의 말에 구후영이 탄식했다.
"무인들은 생각이라는 게 없는 건가?"
황실이 은자를 푼 건 임시방편에 궁여지책이다. 북부 변경이 안정되면 당연히 더는 강호에 은자를 풀지 않을 게 뻔한데, 성급히 덩치를 불리는 건 멍청한 짓이다.
"고독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모닥불을 지펴 여름이 온 것처럼 속이고 공자가 기운을 주입하니 바로 정체를 드러냈잖아요."
"그래도 인간은 머리가 있잖소."
구후영의 말에 단아가 깔깔 웃었다.
"하나하나 보면 인간이 고독보다 낫겠으나, 무리로 볼 땐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마처럼 강한 자도 서창의 무림말살지계를 막기 위해 명교로 가는 방법밖에 못 쓴 거 아닙니까."
단아가 다정한 눈길로 구후영을 바라봤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규보천리라고, 공자가 작은 발걸음 하나 떼면 누군가가 다음 걸음을 걸을 겁니다. 그렇게 세상이 점점 좋아지고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연 선생으로 추정하는 배후와 더는 얽히지 않으려고 은퇴와 잠적을 결심했으나 마음 한구석엔 늘 걱정이 있었다.
홍엽산장과 낙화문 그리고 대유방까지.
그러나 단아와 대화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천마처럼 강한 자도 혼자 힘으로 세상을 바꾸진 못했다.
마찬가지로 구후영 한 명이 빠진다고 해서 무림말살지계의 성패가 바뀌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안심하고 은퇴해도 좋다. 강호를 떠나 청정한 삶을 누리고, 의술을 더 깊이 공부해 세상에 이로운 처방을 잔뜩 만들어 널리 알리며 남은 생을 보람차게 보낼 생각에 구후영은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 작가의말
저도 건강을 잘 유지해 보람차게 글 쓸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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