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생지덕好生之德
장강과 황하는 바다를 향해 거침없이 흐른다.
그러나 처음부터 거침없었던 건 아니다. 황하에 관해 삼십년하동三十年河東 삼십년하서三十年河西라는 말이 있는데, 마을이 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황하의 동쪽에 있었는데 삼십 년이 지나고 보니 황하의 서쪽이 되었더라는 실제 이야기다.
현재 장강과 황하가 도도하게 흐를 수 있는 건 긴 세월을 거쳐 모래를 치우고 바위를 깎으며 물길을 낸 덕분이다.
고독의 치료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아가 현월궁의 처방을 전혀 모르는 탓에 구후영은 알아서 물길을 일일이 만들어야 했다.
'병나는 곳에 약 난다.'
구후영은 의술을 배울 때 제일 먼저 듣는 말을 속으로 되뇌며 고독이 담긴 그릇에 건주의 부족이 갖고 있던 약초 가루를 뿌렸다.
안물의 머리에 있던 고독은 강한 약에 죽었지만, 구후영의 치료법으로 밖에 나온 고독은 대부분 질긴 목숨을 부지한 덕분에 약초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건 싫다는 뜻이지?'
구후영은 뛰어난 기감으로 고독이 반기는 약초와 싫어하는 약초를 일일이 구분해 치료에 들어갈 약재를 선별했고, 선별한 약재로 약을 끓여 아이한테 먹였다.
"대단합니다."
구후영이 만든 약은 효과가 좋았다.
약을 먹은 아이는 침으로 치료한 아이들처럼 바로 기운을 차리지 못했지만, 침술로 치료했을 때보다 고독이 더 철저히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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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좋았는데. 이대로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대협. 이 아이도 아픕니다."
탕약을 마신 아이 열 명 중 둘이나 이상 반응을 보였다. 곧 숨넘어갈 사람처럼 호흡이 가쁜가 하면 얼굴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묶으시오."
사내들이 눈을 꼭 감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두 아이를 침상에 나란히 묶었다.
'둘 다 위급하다.'
구후영은 서두른 게 너무 후회됐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 명씩 천천히 할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복수를 뒷순위로 미룬 거지, 포기한 건 아니다. 약의 효과가 괜찮아 보이자 구후영은 치료를 서둘렀고, 그 바람에 아이 둘이 동시에 위험해졌다.
'후회는 끝나고 해도 늦지 않다.'
구후영이 심호흡으로 마음을 달랬다.
'할 수 있을 거야.'
구후영은 양의심법의 구결을 읽은 적이 없지만, 현현자와 내공 대결을 펼친 덕분에 어떻게 하는 건지 감은 잡았다. 실제로 황제를 치료할 때 양의심법의 방식을 써먹기도 했다.
그러나 양손으로 다르게 운기한 건 맞으나, 양손이 제각각 운기한 건 아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의 운기를 양손이 협력해서 이룬 셈이다.
지금은 양손이 각각 한 아이를 맡아 완전한 운기를 해야 하는데, 구후영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때, 머릿속에 불쑥 떠오르는 구결이 있었다.
'구양불순九陽不純 오음불잡五陰不雜.'
태극혜검의 구절로, 가장 순수하다는 구양도 순수한 양기가 아니고, 음양의 균형이 잘 잡혔다는 오음도 사실은 순수하다는 뜻이다.
'음으로 되는 건 양으로도 다 되고, 반대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자신 있게 하자.'
거듭 자신을 격려한 구후영은 두 아이의 몸에 투기침을 꽂았다. 그러곤 양손으로 동시에 기운을 주입하고, 두 아이 몸에서 기운을 돌렸다.
구후영의 몸에서 돌리고 넘겨주기엔 너무 위급한 상황인 탓이었다.
"어서 불을 피우시오. 예전처럼 땀이 날 정도로."
내공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깜짝 놀라 굳어버렸을 것이다. 양손으로 제각각 운기하는데, 심지어 다른 사람 몸 안에서 운기했다. 이것만 해도 본인을 포함한 세 명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 구후영은 입을 열어 말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세 사내는 내공에 관해 아는 바가 없어서 전혀 놀라지 않고 구후영이 시킨 대로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치료 끝난 아이들은 내보내시오."
사내들은 약으로 한 치료가 먹힌 여덟 아이를 천막 밖으로 내보낸 다음, 침상 주변에 장작을 쌓아 모닥불 세 개를 지폈다.
"깨끗한 그릇에 술을 붓고 침을 모두 담가 불에 끓이고, 내가 알려준 순서대로 놓으시오."
침착을 유지하며 서두른 덕분에 금세 소독이 끝났고 세 사내는 구후영이 알려준 순서대로 온갖 침을 가지런히 정렬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심호흡으로 긴장을 다스린 구후영이 왼손으로 잡은 투기침을 뽑은 다음, 전광석화와 같은 손놀림으로 아이 곁에 놓인 침을 하나씩 집어 수십 개 혈도에 단숨에 꽂았다.
침의 종류가 다섯 가지나 되고 혈도마다 꽂아야 하는 수법과 깊이 모두 다른데, 구후영은 눈 몇 번 깜짝할 새에 한 치의 착오도 없이 해냈다.
심지어 오른손으로 다른 아이한테 내공을 주입하면서.
'내가 진짜 강해졌구나.'
자화자찬으로 자신의 용기를 북돋은 구후영은 바로 오른손의 투기침을 뽑은 다음, 양손으로 번갈아 침을 꽂았다.
그러는 사이 눈치 빠른 사내가 공심침을 구후영에게 건넸다.
"대협, 침입니다."
구후영이 침을 받아 왼쪽 아이의 몸에 꽂자 바로 피가 튀어나왔고, 한 사내가 마른 천으로 흘러나온 피를 닦고 다른 사내는 찬물을 공심침 주변에 뿌려 체온을 낮췄다.
구후영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다른 공심침을 받아 오른쪽 아이의 가슴에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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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한 놈.'
위기를 수습하고 깊은 고민을 통해 사건의 연유를 알아차린 구후영은 자신의 멍청함을 후회했다.
'맹수를 사냥할 땐 늘 도망칠 구멍을 내준다지. 맹수가 최후의 발악으로 사람을 해치는 걸 막기 위함이기도 하고, 지치게 하려는 목적도 있다.'
사냥꾼들은 맹수를 동쪽으로 몰았다가 서쪽으로 몰고, 남쪽으로 몰았다가 북쪽으로 몬다. 맹수는 자신이 계속 잘 도망친다고 여기지만, 사실상 사냥꾼들의 통제 범위에서 무의미하게 뛰어다닌 것뿐이다.
그렇게 맹수가 지쳐서 움직임이 느려질 때까지 기다려 안전하게 잡는 지혜로운 사냥법을 몰이라고 부른다.
'좋아하는 약초도 적절히 줘서 최대한 반항 안 하게 달래야 한다.'
구후영의 실책은 너무 다그친 것이다. 고독을 나쁜 존재라고 여겨 그저 없앨 생각뿐이었기에 약이 너무 세기만 했다.
건강하거나 고독의 양이 적은 아이들은 아주 빠르고 확실하게 치료됐지만, 몸이 허약하거나 체질이 특이하거나 고독의 양이 특별히 많은 아이는 오히려 위험에 빠졌다.
'아이들의 몸을 보補할 약재도 있어야 한다. 고독이 별로 싫어하지 않아서 뺀 약초 중에 사람 몸에 좋은 것도 적절히 섞는다.'
구후영의 생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른보다 아이가 고독에게 더 쉽게 당하는 건 체온 때문이다. 아이들은 보편적으로 어른보다 몸이 따뜻하다. 그러니 몸을 차게 하는 약을 지속하여 복용하면 고독이 발작하지 못한다.'
고민 끝에 구후영은 세 개의 처방을 만들기로 했다.
'고독의 발작을 막는 처방. 고독을 치료하는 처방. 치료 시 고독의 거센 반발을 누를 처방.'
고독을 치료하는 처방은 고독이 좋아하는 약초를 조금 섞고 아이의 기운을 북돋우는 약초를 어느 정도 섞으면 된다.
고독의 거센 반발을 누를 처방은 아이의 몸에 어느 정도 해가 될 걸 각오하면서 고독을 확실히 해치우는 진짜 독한 약이다.
평소 마셔서 고독을 예방하는 처방은 구후영도 고민이 깊었다. 다른 두 약과 달리 자주 마셔야 하기에 값이 싸고 흔한 약초를 써야 하는데, 구후영은 약재에 관한 지식이 부족한 편이다.
말이 통하는 세 사내 역시 귀한 약초만 알아 물을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공자,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부족 사람들은 단아를 볼 때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게 불편해 단아는 구후영이 치료하는 곳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치료를 멈춘 듯하여 보이자 찾아왔다.
"처방을 하나 만들어야 하는데, 관동에서 어떤 약초들이 나는지 잘 몰라서 골치요."
"공자는 의원이나 무인이 아니라 선비가 돼야 했었습니다."
"무슨 말이오?"
"그렇게 꽉 막혀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그냥 공자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처방을 쓰십시오. 그럼 저들이 알아서 약초를 구하고, 못 구할 경우 어떻게든 다른 약재로 대체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의원이 공자뿐인 것도 아닌데 뭐가 걱정입니까."
단아의 말에 구후영은 자신이 진짜 한심하다고 느꼈다.
"맞는 얘기요.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의원이라고 여기서 고독을 치료할 완벽한 처방을 만들겠다고 이러는지 모르겠소. 일단 시작을 떼 놓으면 언젠간 훌륭한 처방이 나올 텐데."
단아 덕분에 고민을 마친 구후영은 세 개의 처방을 작성하고 사내들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처방이오."
구후영은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처방을 세 사내한테 건넸다.
"이건 자주 마셔서 고독이 발작하지 못하게 하는 약이오. 기운이 세지 않아 매일 한 번씩 마셔도 몸에 해가 되지 않으니, 봄부터 가을까지 꾸준히 음용하면 좋소."
처방을 받은 사내가 조심스럽게 접어 죽통에 고이 넣었다.
"이건 아이들을 치료한 약의 처방이오. 고독의 성질을 달래는 약재와 아이의 몸에 도움이 되는 약재를 추가했으니 위험한 상황이 훨씬 줄어들 거요."
사내는 마찬가지로 처방을 받아 다른 죽통에 간직했다.
"이건 앞의 약을 마시고 발작하는 아이한테 먹이시오. 이것 때문에 한동안 고생하겠지만, 죽는 것보단 나을 거요."
"대협의 은혜는 각골난망입니다."
세 사내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연신 조아렸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으니 과한 예는 삼가시오."
세 사내가 한사코 일어나지 않으려 했지만, 구후영이 힘주자 속절없이 몸을 일으켰다.
"구하기 힘든 약초가 있으면 고명한 의원한테 보여주고 대체할 만한 약재가 있는지 물어보시오. 아주 정밀한 처방이 아니어서 약재 한두 개가 빠진다고 큰 문제가 되진 않소. 중요한 약재는 특별히 글자를 크게 썼으니 그것만큼은 바꾸지 말라고 의원한테 말하면 되오."
"명심하겠습니다."
세 사내가 허리를 굽혀 말했다.
"그 세 처방은 그대들한테 주는 것이지만, 그대들만 쓰라는 건 아니오."
구후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들은 태극을 아시오?"
"네, 간단히 들어본 적 있습니다."
"옛날의 태극은 둘이 아닌 셋으로 이뤄졌소."
음양태극은 유교의 것이다. 도가의 태극은 원래 삼태극이었다.
"태극을 이루는 건 음과 양과 덕이오. 음과 양은 다투고 화합하면서 세상 만물을 낳았소. 그 만물을 조화롭게 다스리는 게 덕이오."
세 사내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으로 놓고 말하면, 백성을 다스리는 문관이 음이고 나라를 지키는 장수가 양이오. 그럼 황제는 뭐겠소? 바로 음양을 조화하는 덕이오."
무공이 양이면 학문이 음이다. 그러나 음과 양만 갖고 태극을 이룰 수 없다. 음과 양에 어울리는 덕을 쌓고 품어야 비로소 태극이 될 수 있다.
"그대들은 안으론 자기 부족 사람을 다스리고 밖으론 다른 부족과 싸워 자기 부족을 지키고 있소. 그러나 이 둘만으로 부족하오. 음과 양에 덕까지 있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오."
세 사내와 일일이 눈을 맞춘 구후영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학문은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힘은 최고로 강할 때도 모든 일을 해결하지 못하오. 그러니 덕을 쌓으시오. 그 처방으로 아이들을 구하시오."
- 작가의말
하늘은 호생지덕이 있다고 합니다. 죽이는 것보단 살리는 걸 좋아한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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