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심공兩儀心功
부처는 탐진치貪嗔痴를 삼독三毒이라 하였다.
탐은 좋아하는 걸 꼭 차지하려는 과도한 소유욕이다. 진은 역경에 처했을 때 이성을 잃을 정도로 큰 분노다. 치는 옳고 그름을 가릴 줄 모르고 선한 것과 악한 것의 경계가 없는 어리석음이다.
이 삼독이 가장 잘 체현된 감정이 바로 질투다. 시시비비와 관계없이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을 그걸 갖춘 자를 미워하는 것으로 풀려 하니, 질투야말로 탐진치의 완전한 결합체라고 할 수 있다.
'고작 일류의 경지에 무당 제자도 아닌 자가 태극권의 진체眞諦를 이어받다니.'
현현자는 장삼풍의 대제자의 대제자로, 현재 무당파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불혹에 이르지 못한 정학은 물론이고, 여든이 가까운 장삼풍의 두 제자도 현현자보다 어리고 입문도 느리다.
장삼풍이 아무런 유언도 남기지 않고 우화하였을 때 무공 서열과 명분상 현현자가 새 장문이 되어야 했지만, 성정이 단순하여 짧은 기간에 방대해진 무당을 다스리기 부족하다는 중론 때문에 사제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감투보단 무공 수련이 더 좋았던 현현자는 처음엔 별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장문이 된 현허자가 장삼풍이 남긴 청령단淸靈丹을 먹고 경지를 몇 개나 올리자 질투가 잔뜩 났다.
질투에 빠진 자신이 싫었던 현현자는 커다란 후회와 불만과 상실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린 사숙을 찾아가 태극권을 가르쳐 달라고 사정했다. 정학이 가차 없이 거절하자 자신이 무당을 위해 장문 자리도 양보했음을 내세웠고, 안 먹히자 십단금으로 정학을 공격했다.
당시 현현자의 본의는 정학을 핍박하여 태극권을 펼치게 한 다음 보고 배우려는 생각이었다. 무당의 대표적 권장법인 무당 장권과 십단금을 높은 경지로 익혔기에 정학이 태극권을 제대로 펼치기만 하면 그 진체를 엿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현현자의 꿍꿍이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당시 약관도 안 되었던 정학은 한 손을 뒷짐 지고 남은 손으로만 현현자의 모든 공격을 수비했다.
대결로 자신과 정확의 경지 차이를 확연히 느낀 현현자는 무릎을 꿇고 보름 동안 밥도 굶으며 태극권의 진체를 알려달라고 읍소했다. 그러나 정학은 현현자를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완전히 무시했다.
다행히 정학과의 대련을 통해 산 밖에 산이 있고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깨달은 현현자가 마음을 잘 다스려 정진했고, 장삼풍 이후 무당에서 가장 강한 무인으로 칭송받았다.
그런데 방금 정학의 것과 똑 닮은 구후영의 흘리기 때문에 기억 깊은 곳에 꼭꼭 묻었던 자괴감이 확 올라왔다.
'내가 저 핏덩이보다 못한 게 뭐 있다고.'
정학에 대한 불만과 태극권의 진체를 얻지 못한 상실감과 청령단을 사제에게 뺏긴 분노가 구후영에 대한 질투를 활활 키웠다.
'역시 태극권을 함부로 펼치는 게 아니었어.'
현현자의 돌변한 기세에 구후영은 후회막심했다.
'자룡 때문에 경솔했다.'
간절하면 시야가 좁아지고 판단력이 흐려짐을 알고 있었으나, 정작 상황이 닥치니 침착을 유지할 수 없었다.
'화산 때부터 나서는 게 아니었어. 이제라도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빌까?'
현현자의 강한 기세에 구후영의 마음이 한없이 위축됐다.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만 계속 떠올랐는데.
[소형제, 정신 차리게.]
용천의 전음이 구후영의 정신을 깨웠다. 흐릿하던 구후영의 눈동자에 정기가 돌아왔다.
'죽일까?'
그 모습에 현현자는 살심이 거세게 일었다. 질투로 이성이 별로 남지 않은 상황에도 정학이 태극권을 제대로 가르칠 정도면 뭔가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으로 억누르고 있었는데, 자신의 압박을 이리도 빨리 빠져나오는 모습에 그저 죽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사형, 피를 보면 안 되오.]
현현자의 귀에 눈치가 귀신인 배불뚝이 장로의 전음이 울렸다.
'내상을 입혀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만들어야겠다.'
구후영은 용천의 조언을 받고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현현자는 사제의 전음을 듣고도 자신의 살의를 거두지 않고 그저 좀 더 깊은 곳으로 가져가 형태만 바꿨다.
'뭔가 불안하다.'
구후영은 상대가 기세를 조금 거둬들인 걸 느꼈으나 안심하기엔 찝찝함이 컸다.
"그럼 태극권 이외의 무공을 안 쓰기로 합의된 거로 알겠소. 태극권 외의 무공을 펼친 사람은 진 거요."
말을 마친 현현자가 십자수十字手로 느리게 공격했다. 십자수는 태극권을 마무리하는 동작으로 양팔을 십자로 교차하는 간단한 자세다. 누가 봐도 수비 자세인데 현현자는 공격에 이용했고, 지켜보는 자들은 물론 직접 맞서는 구후영도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다.
'현묘하다.'
속으로 크게 감탄한 구후영은 개합수開合手로 수비했다.
개합수는 한 자세에서 다른 자세로 넘어갈 때 태극을 유지하기 위한 과도過渡 동작으로 대부분 사람은 이를 한 개 초식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구후영 역시 다른 어떠한 자세로도 이어질 수 있기에 상대의 모든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개합수를 펼쳤다.
'이놈 봐라.'
그게 현현자의 살심을 더더욱 부추길 줄도 모르고.
현현자는 이십 년 가까이 절치부심하여 태극권을 수련했고, 내미는 동작보다는 거둬들이는 동작에 태극권의 오의가 숨었음을 발견했다. 현현자가 지금 펼치고 있는 십자수는 물론, 개합수 역시 언뜻 간단해 보이나 실은 매우 심오한 자세다.
'이대로 두면 태극권이 더는 무당파의 것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현현자는 어떠한 초식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개합수의 균형 잡힌 자세를 어렵게 찾아냈다. 그런데 공청석유 덕분에 자신의 몸을 정확히 통제하는 구후영이 완벽에 가까운 자세를 잡자 상대의 태극권 경지가 자신보다 높다고 오해했다.
정학의 가르침을 받은 덕분에 동작 자체는 구후영이 훨씬 정확하지만, 사실 태극권에 관해 아는 건 거의 없다. 현현자가 몇 합이라도 겨루면서 차분히 살폈으면 자신의 오해를 알아차릴 법도 한데, 질투심이 눈을 가려 그러지 못했다.
'반드시 제거한다.'
현현자는 살심을 더 깊이 숨긴 채 구후영에게 다가가 십자수를 풀며 왼손은 주먹을 쥐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한 채 종고제명鐘鼓齊鳴으로 구후영의 양 태양혈을 노렸다.
그러나 요해를 노린 것과 달리 동작 자체는 부드럽고 가벼워 누구도 살초라고 생각지 않았다.
'좌수 양, 우수 음. 이렇게도 태극이 되는구나.'
왼손은 음인데 주먹을 쥐어 양을 취하고, 오른손은 양인데 손바닥을 펴 음을 취했다. 현현자는 전체의 태극을 이루는 동시에 좌수와 우수에서도 각각 하나의 태극을 이뤘다.
더 나은 대처법이 떠오르지 않은 구후영은 똑같이 왼손은 주먹을 쥐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곧게 편 채 금계독립과 백학양시의 자세를 섞어 펼쳤다.
'걸렸구나.'
현현자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자신의 주먹과 구후영의 손바닥을, 자신의 손바닥과 구후영의 주먹을 맞붙이곤 바로 양의심공을 운용했다. 절정의 끝을 바라보는 경지라 현현자의 왼손 주먹은 강한 기운을 뿜어 구후영의 체내에 주입하고, 오른손의 손바닥은 구후영의 기운을 밖으로 뽑아냈다.
순식간에 자신의 기운에 대한 통제를 완전히 잃어버린 구후영은 머리가 하얘지며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평생 내공 없는 몸으로 살아봐라.'
현현자는 사람이 단순하지만, 멍청하진 않다. 여기서 구후영을 티 나게 해코지하면 무당의 명성이 바닥에 떨어지는 건 물론이고 배산에게 축객령을 내릴 빌미를 줄 걸 명확히 알고 있다.
그렇기에 맞붙은 양손을 상하좌우로 흔들고 밀었다 당기기도 하면서 짐짓 구후영과 대련하는 척했다.
덕분에 구후영이 정신을 차릴 시간을 벌었다. 자신의 기운에 대한 통제력을 잃으며 하얗게 질렸던 머리가 드디어 사고를 회복했다.
'내 기운을 다 잃고 상대 기운만 남으면 주화입마가 온다.'
내 식구가 다 쫓겨나고 생면부지의 자들이 주인 행세를 하면 집이 멀쩡하게 남아날 리 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구후영은 바로 축기를 시작했다. 축기가 시작되자 바로 연기가 되었고, 다행히도 운기는 시작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기운 한 톨이 아쉬운 상황에 쓸데없는 운기로 내공이 낭비된다면 혀를 깨물고 싶을 정도로 화났을 것이다.
'어린놈이 무슨 내공이 이리도 깊지? 마교 종자라서 그런가?'
무심코 떠올린 생각으로 현현자의 분노가 커졌다. 무당에서도 정통을 자랑하는 사질에겐 자세 하나 안 가르치다가 마교의 종자한텐 진체까지 전했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화를 참기 어려웠다.
그에 현현자의 기운이 좀 더 강하고 거칠게 움직였다.
"역시 무당이군."
둘의 상황을 눈치챈 상석의 덩치 큰 사내가 입을 열었다.
"소문이랑 다른데?"
현월궁에서 온 여인이 말을 받았다.
"강호의 소문이란 게 워낙 왜곡이나 과장이 심하기 마련이오. 그러니 무공만 보시오."
덩치 큰 사내는 무당의 현묘한 무공이 소문과 다르지 않다고 칭찬했고, 현월궁의 여인은 무당의 심성이 소문과 달리 음흉하다고 지적했다.
"이번엔 오롯이 둘의 대결이 되었군."
둘의 대화를 듣던 용전향이 흑 장로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상석의 일부는 일이 터지길 기대하고 일부는 구후영을 걱정하고 있지만, 양쪽 모두 끼어들 수 없다. 대등한 내공 대결이어도 끼어들기 어려운데, 현재는 현현자가 일방적으로 압도하고 있다.
출수하여 둘을 떼 놓더라도 구후영은 반드시 내상을 입기에 돕고 싶은 쪽은 절대 끼어들 수 없고, 분쟁이 일기 바라는 쪽도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서 구후영이 내상을 입었다며 무당이 책임 전가를 할까 봐 개입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다르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구후영이 필패라고 여겨 대수롭지 않게 넘긴 대부분 사람과 달리 용천은 매우 놀라는 중이다.
'이거 모르겠는데. 잘하면 소형제가 살지도 몰라.'
용천은 현현자의 절대적 우위보단 구후영이 용케 버티고 있단 사실을 더 주목했다. 일류 초입으로 보이는 자가 품기엔 막대한 양의 내공이지만, 현현자 앞에선 태양 앞의 반딧불과 같다.
아무리 현현자가 꼬투리를 안 잡히려고 조심했다고 해도 벌써 피를 토하며 눈알을 뒤집는 게 정상이다.
'제발. 목숨만이라도 부지해라.'
안타깝게도 용천의 진심 어린 응원은 구후영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속수무책이다.'
현현자의 양의심공은 기운을 두 가지 방식으로 동시에 운용할 수 있다. 덕분에 하나가 밀고 하나가 당겨 자신의 것도 아닌 구후영의 기운을 단전에서 쏙쏙 뽑아내는 중이다.
만약 구후영이 이 흐름에 대항하면 기운의 충돌로 단전이 망가지고 큰 내상을 입으며, 십중팔구 주화입마에 든다.
만약 구후영이 이 흐름에 순응하면 자신의 기운을 다 뺏기고 내상을 입으며, 주화입마에 걸리지 않더라도 평생 내공을 품지 못한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 역시 해결책이 못 되어 구후영은 그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반면, 현현자는 구후영이 예상보다 잘 버텨서 조금 놀란 건 있으나 자신에게 전혀 반항하지 못하는 모습에 꽤 흡족한 상태였다.
'응?'
그러나 갑자기 환하게 웃는 구후영 때문에 심장이 덜컹했다.
구후영의 얼굴 위로 해맑게 웃는 정학의 얼굴이 겹친 탓이었다.
- 작가의말
힘들 때 웃는 자가 일류다. 그래서 주인공이 아직도 일류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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