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天下第一
장삼풍과 천마 중 누가 천하제일이냐는 논쟁은 지금도 사그라지지 않고 불씨를 이어갔다.
대체로 경지는 장삼풍이 높고 싸움은 천마가 강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늘 소수의 다른 의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천하제일에 대한 논쟁 구도를 바꿔야 할 것이다.
못에서 용이 나오고 나뭇가지에 봉황이 앉을 것 같은 신선이 노닐법한 곳. 겹겹이 가린 진법 때문에 무려 반나절이나 헤매고서야 겨우 찾아낸 곳.
"용케 알아냈군."
그곳에서 조우한 연 선생은 생각보다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게다가 대접이 후해."
호 선생의 조건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의 목숨을 살려줄 것.
죽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기 뱃속에 든 것들을 책으로 엮어서 세상에 알리려는 목적이었다.
하나는 연 선생을 상대하러 갈 때 최소한 사대신협의 둘을 대동할 것.
구후영은 호 선생의 두 번째 조건을 건성으로 넘기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천강구절만큼 강하군."
악불형의 평가에 홍기영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에 옥무영과 원경이 눈빛을 더없이 빛냈다. 천마의 전설 같은 얘기들을 귀로만 들어온 둘에겐 천마에 버금가는 무인과의 대결이 두려움보단 기대의 대상이었다.
"내가 낄 자리가 아니었네."
천마라는 소리에 지레 위축된 청빈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목표를 바꾸는 게 좋겠군. 생포가 아닌 주살로."
홍기영의 말에 구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호 선생의 조사에 따르면 연 선생은 시키는 대로 따르는 부하만 있지 후계자 따위는 없었다.
뱀은 머리 없이 가지 못하고 새는 날개 없이 날지 못한다.
연 선생만 죽이면 밑에 세력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기에 굳이 생포해 내막을 알아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허허."
그새 기감으로 일행의 실력을 살핀 연 선생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천마가 나보다 강해. 경지는 비슷하고 싸움은 놈이 더 잘하지. 그런데 그거 아나?"
연 선생이 손을 휘젓자 몇 장 밖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창이 줄로 당긴 것처럼 날아왔다.
"천마라면 손가락 한 개로 너희를 모두 죽일 수 있다는걸."
말을 마친 연 선생이 창을 휘둘러 횡소천군을 펼쳤다.
창이나 몽둥이뿐이 아니라 칼이나 도끼로도 펼칠 수 있고, 심지어 주먹 혹은 다리로 펼쳐도 되는 흔하디흔한 초식.
물론, 펼치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 그 효과가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사대신협이나 현재 강호에 위명을 떨치는 청성파 장문 옥무영 상대로 펼치기엔 한참 부족한 초식이었다.
"감히."
얕보였다는 생각에 화가 치민 옥무영이 빈철봉鑌鐵棒으로 상대의 창을 막았다. 무당에 입문하고 쭉 한 쌍의 판관필을 썼지만, 청성파 장문이 된 지금도 무당의 무기와 초식을 사용할 순 없었다.
그래서 대신 든 게 빈철봉이었는데, 그간 전혀 게으름을 안 피우고 열심히 수련한 덕분에 강호 어디에 내놔도 사람들을 경악게 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제길."
막대한 내공 덕분에 내상은 입지 않았으나 호구가 찢기며 피가 흘렀고, 귀한 쇠를 여럿 섞어 두드려 만든 빈철봉이 살짝 휘었다.
"풍옥문의 육전신공인가?"
연 선생이 살짝 찌그러진 창날을 확인하며 질문했다.
"그렇소. 당신의 무공 내력은 어떻게 되오?"
옥무영이 금창약을 바른 손에 붕대를 감으며 질문했다.
"수십 가지 무공을 익혀서 딱히 어디 전승이라고 할 순 없어. 뭐, 자신 있는 무공이 뭐냐고 하면 칠살문의 십보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 선생의 창이 옥무영의 미간을 찔렀다.
보통은 심장이나 목을 노리며 상대의 대처에 따라 공격을 트는 게 일반적인데, 연 선생은 자신감이 넘치는지 다짜고짜 미간을 노렸다.
그에 악불형이 묵룡을 떨쳤다. 그런데 신창으로 불리는 악불형이 연 선생의 창을 건드리지도 못했다.
연 선생의 몸과 창을 든 팔이 기이한 각도로 꺽이면서 묵룡의 방해를 교묘하게 피해 간 것이었다.
열 걸음 안에 못 죽일 자가 없다는 홍석의 십보살이 천 년도 넘은 세월이 지나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괜히 나댔구나.'
풍불지는 검법보다 출중한 경공과 심후한 내공이 훨씬 유명하다. 옥무영은 지난 삼 년의 수련으로 최소 내공만큼은 사부인 풍부지를 따라잡았다.
거의 삼십 년 가깝게 풍불지가 준 양기가 강한 내공을 품고 지냈던 덕분에 체질에 변화가 생겨 몇 년만 더 있으면 풍불지를 확실히 능가할 자신도 있었다.
그 탓에 천마만큼 강하다는 말에도 기죽지 않고 당당히 나섰는데, 지금 악불형의 도움을 받고서도 상대의 평범해 보이는 찌르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다행히.
"형님은 물러서시오."
원경이 금강인을 맺은 손으로 옥무영을 대신해 연 선생의 찌르기를 받아냈다.
"오호. 단단함 속에 부드러움을 품고, 부드러움 속에 질김을 숨기다니. 설마 금강인에 이어 연화인도 얻은 것인가?"
연 선생의 말에 원경이 두 눈을 부릅떴다.
흑철의 몸에서 얻은 대수인을 수련해 대성에 가까운 경지를 이뤄 연화인을 얻었다. 그러나 이 일은 심지어 구후영과 옥무영한테도 얘기한 적 없이 원경 혼자만 알고 있었는데, 연 선생이 단번에 짚어내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금강인은 품계 두 개가 모자라고 연화인은 다섯 개가 모자라네. 혹여 오늘 살아남는다면 정진하는 게 좋을 걸세."
'무슨 생각이지?'
문파의 선배가 후배에게 친선대결을 통해 가르침을 내리는 듯한 행태에 구후영은 의문이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나 오해하진 말게. 살고 싶으면 전력을 다해 날 죽이는 게 좋을 거야."
"무슨 꿍꿍이지?"
악불형이 질문했다.
악불형은 공감을 점유해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한 다음 모든 힘을 한 점에 모아 일격필살을 하는 방식을 사용하기에 연 선생처럼 쉽게 공간을 내주지 않거나 신검 정도로 경공이 출중한 상대한텐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공격에 나서진 못하고 수비에 작은 힘을 보탤 뿐이었다.
"나를 죽이면 자연히 알게 될 거고, 내게 죽으면 알 필요가 없지."
악불형의 질문에 성의 없이 대답한 연 선생이 이번엔 구후영을 공격했다.
이는 마치 살기 위해서 싸운다기보다 일행의 실력을 점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구후영은 자신의 장점이 뛰어난 운기 능력과 세밀한 초식 운용이라고 판단했다. 보통 경지가 깊어질수록 번잡함을 줄여 초식을 간단하게 만드는 것과 반대로 구후영은 점점 초식을 복잡하게 키웠다.
물론, 초식이 복잡하다고 해서 무의미하게 검의 휘두름을 증가하는 게 아니었다.
덕분에 구후영의 초식은 복잡할수록 위력이 강한 특징이 있는데, 연 선생의 십보살에 구후영은 자신의 가장 번잡한 초식을 꺼냈다.
백화총총百花叢叢.
괜찮다 싶은 검법의 총화는 모두 때려 넣은 구후영의 최강 초식으로 분명히 팔 하나에 검 하나인데 마치 팔 백 개로 검 백 개를 휘두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팍.
빈철봉을 휘게 하고도 날이 조금 상했던 연 선생의 창이 수십 조각이 되었다. 이는 초식의 위력도 위력이지만, 부러지지 않는 전대모검의 덕분이 꽤 컸다.
"허. 앞선 둘보다 약하다고 생각했건만. 느껴지는 것보다 경지도 깊고 내공도 깊구나."
셋과 최소 한 번씩 손을 섞은 연 선생이 실력 파악을 끝냈다는 듯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길. 기뻐해야 하나 화내야 하나.'
연 선생이 거들떠보지도 않자 청빈은 오묘한 감정에 빠졌다.
그러나.
연 선생은 자루가 반밖에 남지 않은 창대를 던지는 거로 청빈의 방심을 질책했다.
"합!"
정신을 번쩍 차린 청빈이 태극권을 펼쳤다.
구후영의 태극권은 정학의 것과 지극히 닮았다. 이는 구후영이 정학이 가르친 대로 똑같이 수련한 것도 있지만, 정학의 깨달음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컸다.
반면, 청빈의 태극권은 구후영이 아니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형태가 기괴했다.
촌간태극寸間太極.
청빈은 지난 삼 년 반이나 양발을 묶인 채 감옥에 갇혀 지냈다. 굶기지는 않았지만, 하루에 겨우 한 끼씩 먹었다.
행동이 제한되고 체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청빈은 수련을 멈추지 않았으나, 제대로 수련할 환경은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태극권의 모든 동작을 최대한 작게 펼쳤는데, 그럼에도 자신이 깨달은 권의를 최대한 실으려고 애쓴 덕분에 청빈만의 태극권을 얻게 되었다.
촌간은 아주 작은 공간을 말한다. 청빈은 태극권의 영향 범위를 극도로 좁히는 대신, 자신의 경지와 내공으로 불가능한 위력을 얻었다.
"어허!"
겨우 절정 초입이라고 생각했던 청빈이 자신이 삼 할의 힘을 실어 던진 창대를 옆으로 쳐내자 연 선생은 처음으로 놀랐다.
옥무영이나 구후영 등이 강한 건 당연한 일이다.
옥무영은 내공이 홍기영이나 악불형마저 능가했다. 초식 수련을 게을리했으나 최근 삼 년 절치부심해 대폭 만회했다.
원경은 예전에 오대산에서 대결할 때부터 이미 금강인을 얻은 상태였다. 그것만 해도 대단한 경지인데 현재는 연화인까지 얻어 완성을 향하고 있다.
구후영은 두말할 것 없다. 연 선생은 구후영에 관해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것까지 속속 알고 있다. 비록 느낌으로 옥무영과 원경보다 약하다고 잘못 판단하긴 했으나, 구후영을 소문으로만 들은 대부분 강호인보단 훨씬 높은 평가를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넷 중 가장 약한 청빈이 오히려 연 선생에게 가장 큰 놀라움을 줬다.
"일 번으로 가는 수밖에 없겠군."
손 한 번 안 쓰고 쭉 지켜보기만 하던 홍기영이 결단을 내렸다.
그에 일행이 지체 없이 진형을 짜서 연 선생을 상대했다.
"오호. 꽤 그럴듯한 방법이군."
청빈이 가장 뒤에 섰다.
청빈의 역할은 연 선생이 도주하려 할 때 잠시 막아서는 것이었다. 청빈의 촌간태극은 전혀 공격력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수비에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절대 지난 세월 감옥에 갇혀 지낸 갑갑함을 풀어주려고 여길 데려온 게 아니었다.
악불형 역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언제든 자신의 모든 힘을 한 점에 쏟을 태세였다.
가장 앞엔 홍기영이 섰다. 홍기영은 자신의 경홍유룡장驚鴻遊龍掌을 펼쳤다.
조식이 쓴 낙신부落神賦의 구절 편약경홍翩若驚鴻 완약유룡婉若遊龍에서 이름을 따온 이 장법은 가볍고 부드러워 보이나 일장 일장이 치명적이었다.
홍기영의 곁엔 구후영과 옥무영이 섰다. 구후영은 공격과 수비 모두 능하고 내공과 초식 모두 강하다. 옥무영은 수비가 별로나 공격적인 면에서 꽤 쓸만하고 내공이 누구보다 심후하다.
원경은 셋 바로 뒤에서 지원하는 역할이었다. 누구든 위험에 처할 경우 원경이 금강인으로 연 선생의 공격을 막아낼 것이다.
"신창 혼자서는 힘드니 넷이서 나를 묶어 놓는다. 괜찮은 방법이긴 해."
악불형은 힘을 한 점에 모으는 것만 책임지고, 공간을 점유해 연 선생의 행동을 제한하는 건 홍기영을 비롯한 넷이 맡았다.
넷이 연 선생을 못 움직이게 잡아두는 순간 악불형의 창이 연 선생의 몸을 터뜨릴 것이다.
"괜찮은 방법이긴 한데."
어느새 한 쌍의 반절도半節刀를 꺼내 손에 든 연 선생이 비웃었다.
"약해. 너희가 너무 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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