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사금패免死金牌
건청궁은 한백옥석漢白玉石을 쌓아 만든 돈대 위에 지은 목조 건물로, 높이는 여섯 장이 조금 넘고 대들보만 아홉 개나 된다. 지붕은 황금색 유리기와로 덮고, 굵기가 똑같은 붉은 기둥 여덟 개를 밖에 세워 웅장함을 부각했다.
건청궁의 정문으로 통하는 길은 양측에 백옥석을 깎아 만든 난간이 있는데, 두 난간 사이에 세 줄로 나뉜 길이 있었다.
양측은 재와 비슷한 어두운색의 돌을 가로로 깔았고, 가운데는 흰색의 돌을 가로와 세로로 깔았다.
구후영과 공현 등은 어두운색의 돌을 밟으며 건청궁으로 향했다. 중간의 길은 황제만 걸을 수 있는데, 실질적으론 가마에 타서 그 위로 지나는 거기에 아무도 안 밟는 길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이 길로 꽤 다녔는데 처음으로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구나.'
처음 황궁에 들어왔을 땐 온갖 걱정으로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황후가 치료에 실패해도 문책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도 치료 효과에 대한 걱정이 남았고, 하루밖에 안 지나 단아와 우호법을 만난 바람에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그 탓에 황궁의 풍경이 이렇게 확실하게 보인 건 처음이었다.
"태의, 안색이 좋아 보이오."
"그렇소?"
구후영의 반문에 공현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미 치료를 끝낸 사람처럼 홀가분해 보이오."
구후영은 어제 황궁서고에서 서창의 문서를 보고 머리도 속도 복잡한데, 겉으론 세상 평온해 보였다.
"폐하의 치료가 끝나면 무엇을 할 생각이오?"
공현의 질문에 구후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거기까지 생각진 못했소."
"뭔지 몰라도 대단한 포상을 받을 텐데, 아무 상상도 안 해봤소?"
'황제를 완치하는 건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 내가 해야 하는 모든 일이 아니다.'
공현의 말 덕분에 구후영은 자신이 그간 황제를 치료해 궁지에서 벗어날 생각에 갇혔었음을 깨달았다.
'나와 주변 사람들의 안전을 지킬 만한 것을 포상으로 받아야 한다.'
고민을 마친 구후영이 편한 웃음을 지으며 질문했다.
"태감 생각엔 폐하께서 어떤 포상을 내리실 것 같소?"
"글쎄요. 태의가 사도仕途(벼슬길)에 관심이 있다면 종사품까지의 벼슬을 내릴 수 있소. 봉토를 달라고 해도 들어주실 것 같고, 왕이나 공公은 무리나 후侯의 작위 정도는 문제없소."
"혹시 내가 원하는 포상을 말해 받을 수도 있소?"
"물론이오. 황후 마마와 태자 전하 모두 폐하께서 건강을 회복하길 간절히 바라고 계시오. 폐하께서 건강히 일어나시기만 하면, 무언들 못 들어주겠소."
현재 황제가 쓰러졌는데도 세상은 평온하다. 그만큼 나라가 단단하다는 뜻이고, 반대로 해석하면 신권臣權(대신들의 힘)이 그만큼 강하다는 말이다.
이대로 황제가 죽고 황태자가 등극하면 대신들을 제대로 상대할 수 없다. 황후나 황태자 모두 황제가 어떻게든 일어나 있는 권력 없는 권력 모두 전해주길 바란다.
물론,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구후영은 그저 황후와 황태자가 황제를 위하는 마음이 크다고만 생각했다.
"혹시 구후 태의는 소원하는 바가 있소?"
공현이 은근한 말투로 질문했다.
"태감도 아시다시피, 난 일개 강호의 무부요. 강호라는 곳이 흉험하기 그지없어 가만히 있다가도 불똥을 맞는 일이 비일비재요. 혹시 웬만한 일에 부득이하게 연루되어도 용서받을 수 있는 그런 포상은 없소?"
구후영은 자신보다 단아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황궁에서 금의위 열여섯 명이나 죽은 건 그저 지나칠 수 있는 소소한 일이 아니어서 자금성의 경비는 여전히 철통같았다.
"면사금패免死金牌를 말하는 거요?"
"그게 뭐요?"
"역모 혹은 역모에 준하는 죄만 아니면 웬만해선 무사하오. 역모에 준하는 죄도 목숨 한두 개는 살릴 수 있고."
공현의 말에 구후영은 귀가 번쩍 뜨였다.
"그걸 받은 사람이 있소?"
"송과 원 때는 있었는데, 명이 선 이후엔 아직 없소. 내가 태의에 관해 믿기 어려운 소문을 여럿 들었는데, 그게 반만 진짜여도 면사금패가 꼭 필요할 것 같소."
공현의 농에 구후영도 농으로 화답했다.
"좋은 소문은 다 진짜고 나쁜 소문은 다 과장이나 왜곡이오. 그러나 삼인성호라고, 소문도 사람을 죽일 수 있으니 참으로 탐나는 포상이오."
"내가 황후 마마께 미리 운을 띄울 테니, 태의도 이후 날 한 번 도우시겠소?"
공현이 던진 미끼를 구후영은 생각도 하지 않고 덥석 물었다.
"면사금패가 있으면 내가 무슨 걱정이 있어 태감의 청을 거절하겠소."
"하하. 남아일언중천금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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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청궁의 커다란 침실엔 십수 명의 사람이 구후영의 치료를 조용히 지켜봤다.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서기들이 세필을 휘둘러 자신이 본 것, 구후영의 말, 신한천의 말, 황후를 비롯한 국외자들의 말을 기록했다.
"운기 서른일곱 번째 이후 폐하의 몸에 순환이 생겼습니다."
공현은 잘못 보지 않았다.
마음이 복잡한 것과 별개로 구후영의 몸은 최고로 좋은 상태여서 다른 날과 비교해 엄청 빠르게 순환이 이뤄졌다.
"유저야. 공심침을 꽂아라. 왼쪽 폐유혈이다."
신한천은 눈이 거의 안 보이지만, 덕분에 감은 젊은 시절보다 훨씬 나아졌다. 오늘 구후영의 상태가 더없이 좋음을 아침부터 느꼈기에 폐를 통해 혈괴를 부술 최적의 시기임을 확신했다.
미리 상의한 건 아니지만, 구후영은 신한천을 믿는 마음이 두터워 일말의 주저도 없이 시킨 대로 했다.
"잠시만."
신한천은 어의의 도움으로 황제의 여러 혈도에 침을 꽂은 후, 구후영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신호에 따라 파破와 제除를 바꿔야 한다."
"알겠습니다."
"파."
구후영은 공심침의 구멍에 세침을 꽂은 다음, 내공으로 침에 진동을 줬다.
그에 공심침이 발생한 약한 흡력에 끌려갔던 혈괴들이 세침의 진동에 가루로 부서졌다.
"제."
신한천이 지시하자 구후영은 신속히 세침을 뽑고 공심침을 기울였다. 거기에 내공으로 공심침의 흡력을 강화하자 구멍에서 검고 걸쭉한 피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멈춰라."
신한천의 말에 구후영은 공심침을 뽑아 어의한테 건넸다. 어의는 바로 자신을 따르는 이목에게 공심침을 깨끗이 세척하라고 지시했다.
"다시 간다."
신한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후영이 새 공심침을 오른쪽 폐유혈에 꽂았다.
"파."
미리 준비하고 있던 어의가 세침을 건넸다. 구후영은 세침을 적당한 깊이까지 꽂은 다음 진동을 줬다.
"제."
세침을 뽑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검고 걸쭉한 피가 흘러나왔다.
"이번엔 풍문혈이다."
"괜찮을까요?"
구후영은 신한천이 너무 서두르는 것 같아 약간 걱정되었다.
"폐하의 용체를 갉아먹던 약 기운들이 보혈하느라 더 빨리 소모되고 있다. 내가 면밀히 주시하고 있으니 넌 혈괴를 제거하는 일에 집중해라."
황제의 치료는 아주 순조롭게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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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두꺼워서 약간은 상쾌한 오전.
장춘궁長春宮의 담벼락 바깥에서 용 환관이 맑은 휘파람을 불었다. 곧, 휘파람 소리를 들은 십수 마리 새가 용 환관 주변에 모였다.
'언제 봐도 신기하단 말이야.'
멀찍이 서서 그 모습을 구경하던 환관들이 하나같이 감탄했다. 사람이 조금만 가까이 가도 바로 날아가는 새들인데, 용 환관이 손으로 만져도 전혀 피하지 않았다.
"아이고, 착해라."
용 환관이 새들을 한 마리씩 쓰다듬으며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태후 마마께서 오늘 기분이 어떠실까? 누가 나한테 알려줄래?"
용 환관이 머리를 쓰다듬고 배를 만져주자 새들이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그래? 그랬구나. 오늘도 고마워."
원하는 답을 들은 용 환관이 새들에게 모이 한 줌 뿌려주고 몸을 돌렸다.
"어때?"
새들과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용 환관에게 정 태감이 아주 간절한 얼굴로 질문했다.
"기분이 정말 좋으시답니다."
용 환관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잘했다! 오늘 창공이 원하는 바를 이루면 네가 일등 공신이다."
용 환관에게 공치사한 정 태감이 곧장 몸을 돌려 유근이 있는 영제궁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너 진짜 대단하다."
정 태감이 떠나자 남은 환관들이 하나같이 부러운 얼굴로 용 환관을 칭찬했다.
"별거 아닙니다."
겉으론 겸손한 척했지만, 용 환관의 속마음은 완전히 달랐다.
'멍청한 것들.'
용 환관은 황궁에 들어온 다음, 한가할 때마다 휘파람을 불며 모이를 던졌다. 덕분에 어느 순간 용 환관이 휘파람을 불면 새들이 모였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머리가 있어도 생각지 못하는구나.'
누구는 없는 신기한 재주를 품은 게 아니라 부단한 노력의 결과인데, 그저 부러워만 하는 작자들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별거 아니긴. 나도 너 같은 재주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진짜 별거 아닙니다."
'이리 간단한 도리도 모르다니. 나이도 나보다 훨씬 많은데 왜 다들 이리 멍청하지?'
용 환관은 새와 대화하는 척하며 배를 만져 아침에 뭘 먹었는지 확인했다.
만약 벌레가 만져졌다면 태후가 귀여운 새들에게 모이를 줄 마음도 없을 정도로 기분이 몹시 나쁘단 뜻이다.
모이가 만져지는데 배가 부르지 않으면 뭔가 고민이 있단 뜻이다. 습관적으로 모이를 주긴 했는데, 새들이 배가 부른지 살필 기분은 아니다.
배가 부르면 일단 기분이 좋다. 이때는 모이로 귀한 쌀을 줬는지 잡곡을 줬는지로 판단해야 한다. 굵기가 제멋대로인 잡곡이 만져지면 그냥 좋은 거고, 굵기가 일정한 밀알이 만져지면 기분이 정말 좋은 것이다.
용 환관은 일 년 넘게 공을 들여 이러한 규칙을 발견했고, 정 태감에게 자신이 새와 대화한다고 고백했다. 처음엔 얼토당토않은 얘기라며 아무도 믿지 않았으나, 한 달에 걸쳐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자 모두 의심을 거뒀다.
그때부터 정 태감은 태후의 기분을 정확히 예측하는 거로 승승장구하여 유근의 심복이 되었고, 용 환관도 덩달아 커다란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용 환관은 잘하면 최연소 태감이 될지도 몰라."
사례감엔 십이감十二監의 관직이 있는데, 모두 환관만 임직 가능하다.
여기서 제일 권력이 강한 게 옥새를 관리하는 장인태감인데, 나랏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황제를 대신해 신하들이 올린 상소문에 옥새를 찍어주는 사람이다.
다음으론 병필태감인데, 상소문을 분류하고 거기에 의견을 달 수 있는 권력자로, 개중 한 명이 동창의 창공을 겸직한다.
유근은 장인태감에 서창 창공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태후의 심복이기도 하기에 재상이나 다름없는 대학사도 자기 입맛에 따라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다.
'대세는 공현인데, 저 멍청한 정연 밑에 배당받을 줄이야.'
현재는 수당태감이지만, 황태자가 등극하면 장인태감이 될 공현이다. 게다가 유근을 닮아 자기 심복마저 의심하고 견제하는 정연과 달리, 공현은 상과 벌이 분명하다.
자신이 누구보다 총명하고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용 환관으로선 공현을 모시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웠다.
"태감이 되면 그때 우릴 잊지 마."
"당연한 말씀을요. 세상에 혼자 잘난 놈이 어딨습니까. 다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고 그렇게 사는 거죠."
용 환관이 천진한 얼굴로 웃으며 속마음과 반대의 말을 뱉었다.
- 작가의말
장인태감 : 상소문에 옥새를 찍는 직책. 황제보다 일을 더 많이 하며 훨씬 많은 상소문을 처리하기에 대신들이 잘 보이려고 애쓰는 상대.
병필태감 : 대신들이 올린 상소문에 어떻게 처리할지 의견을 다는 직책. 상소문을 자기 선에서 기각할 수 있기에 장인태감 다음의 권력자. 병필태감 중 서열 1위 혹은 2위가 동창 창공을 겸임.
수당태감 : 황제와 황태자를 수행하며 황궁의 전반적 사항을 관리.
황제가 일 열심히 하면 장인태감은 그저 도장 찍는 기계입니다. 황제가 일을 안 하면 그때부터 용 비늘이 돋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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