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산행武當山行
여름의 무당은 산봉우리가 구름을 휘감고 골짜기가 안개를 토해 인세人世가 아닌 선계仙界를 방불케 했으나, 겨울이 되자 봉우리와 골짜기 모두 고요히 잠들고 구름과 안개가 사라지며 범계凡界가 되었다.
"이게 옳은 방법인지 난 아직도 확신이 없소."
겨울 해가 나른히 비추는 무당으로 향하는 소로에, 오랜만에 인기척이 났다.
"여기까지 와서 자꾸 무슨 소리요?"
회색 말을 탄 공형선이 계속 딴지를 거는 왕경초를 나무랐다.
"무당의 진무관을 짓는 일을 철혈방이 맡는다니."
철혈방이 무당의 진무관을 짓는다고 말하면 세 살배기도 도리도리할 것이다.
"철혈방이 안전할 수만 있으면 난 매일 무당 쪽에 절을 올리래도 웃으며 하겠소."
비록 진무관을 짓는 장소는 무당이지만, 이건 황실의 일이나 다름없다.
황실을 위해 일하는 철혈방을 공격하는 건 황실과 적대하는 거나 마찬가지기에, 만에 하나 일감을 따낸다면 배후가 누구건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다.
"배후가 황실이면 오히려 빌미를 주는 게 아니겠소?"
이번 일을 꾸민 배후가 황실이라면, 일감을 따내는 게 오히려 불리하다. 황실은 진무관을 짓는 일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철혈방을 말려 죽일 수 있다.
"황실이 제일 두려워하는 일이 역모인데, 배후가 황실이겠소?"
공형선의 반박에 말문이 막힌 왕경초가 애꿎은 말에 채찍질했다.
'절대 못 섞이겠구나.'
둘의 대화를 듣던 구후영이 속으로 탄식했다.
왕경초는 감정이 앞서서 문제고, 공형선은 너무 계산적이어서 문제다.
금검당과 은도당의 모순도 사실 이러한 기질 때문에 시작됐다.
은도당은 주업으로 약초를 캐고 부업으론 짐승 가죽을 취급한다. 수요가 넘쳐나기에 굳이 약초나 가죽을 팔려고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어 성격이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금검당은 철을 비롯한 여러 금속을 취급하는데, 이건 아무한테나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당연히 관과 군이 최대 손님이고, 이들과 거래하려면 온갖 수완을 부려야 한다.
처음 철혈방을 만들 때부터 둘은 안 맞을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놈. 저런 놈이 무슨 재주로 철혈방을 이끌겠다고.'
'철혈방은 결국 강호에 뿌리를 내린 문파다. 저런 장사치가 방주가 되면 세상 사람이 비웃는다.'
구후영은 둘의 속마음이 들리는 기분이었다.
#
이번에 무당으로 온 일행은 총 여섯이다.
구후영과 공형선과 왕경초는 당연하고, 철혈방의 호법이 된 연무쌍도 있었다. 단아 역시 철혈방의 문외호법門外護法의 자격으로 참가했고, 단주 직을 내려놓은 양달도 호위로 따라왔다.
원래는 장선 역시 함께 오기로 했으나, 너무 오래 쉰 왕 야장의 솜씨가 예전 같지 않아 귀철을 처리하는 일이 늦어졌다. 따로 믿을 사람도 없고, 왕 야장의 괴팍한 성격을 맞출 사람도 장선뿐이어서 이번 무당행에 빠졌다.
"네 분은 저기 빈집에서 쉬시고, 저와 구후 공자는 바로 쇄악곡에 가겠습니다."
정보를 얻으려고 먼저 출발한 단아가 길에서 다섯을 맞이했다.
"무당일절이 설마 우릴 돕겠소?"
오는 내내 딴소리했던 왕경초 말고, 공형선이 한 말이었다.
"만에 하나 도움을 받으면 일이 쉽게 풀립니다. 어차피 우리가 확신을 갖고 무당에 온 게 아닌데, 가능성이 작다고 시도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을 마친 단아가 구후영에게 눈짓했다. 비록 면사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간 함께 지낸 시간 덕분에 구후영은 눈치로 알아챘다.
"그럼, 다녀오겠소."
구후영과 단아는 곧장 경공을 펼쳐 달렸다.
"혹시 제 의형을 만났습니까?"
쇄악곡이 가까워져 오자 구후영은 청빈을 만날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악인 잡으러 밖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아쉽군요."
구후영은 청빈을 만나 힘든 마음을 위로받으려 했는데, 없다고 하니 너무 애석했다.
"구후 공자. 이번 일은 철혈방뿐이 아니라 호북 무림과 백성의 안위와 관련한 일입니다. 자칫 실수하면 크든 작든 소란이 일어 누군가는 다치고 누군가는 죽습니다."
"제가 이러면 안 되는데. 참으로 부끄럽군요."
"구후 공자를 탓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놓였음에도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는 공 당주와 왕 당주가 구후 공자를 믿고 힘을 합치기로 했습니다. 그만큼 구후 공자의 인품과 실력을 신임한다는 뜻이니, 책임감은 절실히 느끼되 부담감은 다 털어버리고 가볍게 임하셔도 됩니다."
단아의 위로에 구후영은 마음이 편하면서도 단단해지는 느낌이었다.
"단 소저께 어찌 보답해야 할지 막막하네요."
"소녀도 편하게 살 팔자는 아니니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대화하는 사이 쇄악곡이 점점 가까워져 왔다.
"사람이 많이 늘었군요."
아직 안에 들어가진 않았으나,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로 기척이 많았다.
"구후 공자의 의형과 혈교룡이라는 자가 지난 몇 달 동안 백 명 넘게 잡아 왔다고 합니다."
그사이에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증이 돈 구후영이 속도를 높여 안으로 달렸는데, 오랜만에 찾은 쇄악곡엔 어림짐작으로 백오십 명이 넘은 사람이 있었고.
"대협, 오랜만입니다."
처음 보는 자가 구후영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죄송하나 언제 뵈었는지 기억나지 않소."
"모습이 많이 바뀌어 알아보지 못하시는군요. 대협 덕분에 마음을 다잡고 태극권을 익혀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시군. 정말 다행이오."
사내는 유복한 집안에 태어나서 세상의 험악함을 모르고 자란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풍채가 좋고 얼굴도 선해, 피파골을 뚫리고 산발이 되어 쇠사슬을 절컥거리며 시체처럼 배회하던 죄인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정학 진인을 찾아오신 겁니까?"
"그렇소. 세상이 태평하지 않아 진인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오."
"대협 같은 분이 계셔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사내의 말에 구후영은 커다란 위안을 받았다.
'덕이 아무리 크고 높아도 이익 관계를 이기기 힘들고, 힘이 아무리 강해도 강호의 파도를 넘을 수 없다. 그런데 꼭 이기고 넘어야 하는가? 무고한 사람이 억울한 피해를 보지 않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왕경초와 비슷하게 무당의 진무관 건축을 맡는 게 탐탁지 않았던 구후영인데, 이름도 모르는 사내 덕분에 마음이 정리됐다.
"고맙소."
사내에게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전한 구후영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때마침 눈에 띈 정학을 향해 달려갔다.
"협객 아이. 많이 성장했구나."
정학이 해맑은 웃음으로 구후영을 맞이했다. 그에 구후영은 모든 근심과 걱정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강해졌다가 아니라 성장했다라. 내가 올바른 길을 걸은 모양이구나.'
"오랜만입니다. 별래무양하셨습니까."
"그럼. 협객 아이는 고생 많았지?"
"고생이랄 것도 없습니다. 다 보람 있는 일이었거든요."
"그럼 됐다.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가끔 지난 풍경이 아쉬워 미련이 남는다고 하더구나. 높은 경지를 바라보는 자에겐 특히 독이 된다고 하니, 협객 아이는 늘 주변을 살피는 걸 잊지 말아라."
"각골명심 하겠습니다."
"그래, 이번엔 무슨 일로 찾아왔지?"
구후영은 정학에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을 소상히 설명했다.
"역모에 관한 음모는 어떻게든 막았으나, 무당과 철혈방이 싸우면 백성의 고초 역시 작지 않을 겁니다. 진인이 나서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사부가 살아계셨을 때도 무당은 제멋대로였다. 무슨 말인지 난 잘 모르겠는데, 이익 관계가 형성된 다음엔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고 하더구나."
정학의 눈이 아련해졌다.
"한 번은 사부가 술에 취해서 이 모든 게 태극을 완성하려고 무당의 일에 관심을 전혀 두지 않은 탓이라고 자신을 질책했지. 그때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이젠 알겠다."
"무슨 뜻이었습니까?"
구후영은 정학의 말을 들으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간지러웠다.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낮과 밤, 앞과 뒤. 이 모든 걸 그저 음양으로 구분한다. 만물에는 태극이 깃들었는데, 사람들이 쉽게 발견하지 못해서지."
구후영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정학의 말에 집중했다.
"난 쇄악곡에서만 산다. 가끔 외출하긴 하나, 세상의 일엔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덕분에 내 세상은 작고 단순하여, 내가 찾아 완성해야 할 태극도 작다."
구후영은 순식간에 수백 갈래 벼락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큰 세상을 보면 찾아야 할 태극이 많고, 채워야 할 것도 많다. 채우다 보면 버려야 할 것도 생기고, 버리다 보면 다시 채워야 하고."
'비움은 그저 없애는 게 아니고, 채움은 그저 얻는 게 아니다. 숨을 내쉴 때도 기운이 단전으로 흐르고, 숨을 들이켤 때도 탁기가 단전에서 빠져나가니, 이 역시 태극이 아니겠는가.'
정학이 말하고자 한 내용과 거리가 멀지만, 구후영은 귀검동에서 잠깐 스쳤던 호흡에 관한 깨달음을 단단히 붙잡았다.
"난 내 태극을 완성하기 일보 직전이다. 널 도와 이 일에 끼어들면 내 태극이 망가진다. 사부는 마지막 순간에 태극이 망가질 것을 각오했지만, 난 그게 어렵구나."
말을 마친 정학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방관하려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감사합니다."
그런 정학에게 구후영이 되려 진심을 담아 고마워했다.
"제가 오판했습니다. 이 일에 진인을 끌어들이면 오히려 안 되는 거였습니다."
"그래? 내가 안 돕는 게 옳은 거야?"
구후영의 말에 정학이 바로 환하게 웃었다. 그 순수한 모습에 구후영의 얼굴에도 웃음이 활짝 폈다.
"그렇습니다. 훌륭한 가르침 덕분에 놓치고 있던 커다란 걸 깨달았습니다."
정학이 무당과 철혈방의 중재에 나서서 구후영을 돕는다면 일이 훨씬 수월하게 풀린다. 문제는 정학이 전면에 나섰다는 것이다.
대외적으로 무당의 최고수로 추앙받던 현현자가 죽었는데 갑자기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무당일절이 모습을 드러내면 그 파장이 여간한 게 아니다.
당연히 무당의 기세는 더 강해질 것이고, 왕경초가 내내 우려하던 대로 한 번 꿇은 무릎을 영원히 펼 수 없다.
만약 철혈방의 모든 사람이 공형선처럼 실리적이어서 무당에 조아리는 걸 당연히 여기면 괜찮겠지만, 흑도보다 낫다 뿐이지 철혈방 역시 강호의 거친 무리다.
더는 못 참을 지경이 되면 당연히 무당을 향해 칼을 뽑을 것이고, 구후영이 한 일은 일어날 참상을 잠시 미룬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땐 무당일절 덕분에 더 강성해진 무당을 상대해야 하니, 정학의 도움을 받는 건 서목촌광鼠目寸光(쥐의 눈처럼 한 치 앞밖에 보지 못하는)의 짓이다.
'적敵과 아我도 태극이다. 조화의 여지가 분명히 있다.'
최근 구후영의 마음을 계속 괴롭히던 고민이 시원하게 풀렸다.
"덕분에 많은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청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
"저의 태극권을 보시고 부족한 부분을 지적해 주십시오."
정학이 고개를 끄덕이자 구후영은 바로 집중하여 태극권을 펼쳤다. 구후영이 정성껏 펼치는 투로를 묵묵히 지켜보던 정학이 버럭 호통쳤다.
"날 흉내 내지 말고, 너의 태극을 펼쳐라!"
그에 난화와 낙화와 운룡을 담은 태극이 쇄악곡에 모습을 드러냈다.
- 작가의말
진무관을 짓는 일을 맡아 은자가 호북에 퍼지는 걸 막고, 황실 사업인 진무관 건축을 맡는 거로 누구도 함부로 못 건드리고, 무당과 갑을 관계를 맺음으로써 날 선 분위기를 완화하고. 너무 철혈방에 일방적으로 좋은 일이네요.
과연, 무당은 나토에 가입하려는 철혈방을 받아줄 것인가.
Comment '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