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우욕래山雨慾來
모든 일엔 전조가 있다.
소나기가 오기 전엔 큰바람이 불고, 지진이 오기 전엔 한낱 미물들이 날뛴다. 그러나 큰바람이 분다고 꼭 소나기가 쏟아지는 게 아니고, 미물들이 날뛴다고 반드시 지진이 이는 것이 아니기에, 인간은 전조를 보고도 무시하는 일이 잦다.
"요긴한 일로 배산 공자를 만나려고 하오."
예전의 구후영이었으면 얼마 전에 한 약속 때문에 다시 배산을 만나는 일을 무척이나 망설였을 것이다. 허나 풍애협에서 큰일을 세 번이나 연이어 치른 탓인지 꽤 뻔뻔해졌다.
아무래도 그간 강호에서 보고 듣고 겪으며 쌓인 것들이 임계점에 달해 폭발한 바람에 성정이 조금은 변한 듯했다.
"손님을 일절 만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거요?"
구후영의 압박에 문지기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엄명이 있어 소인도 어쩔 수 없습니다."
배산이 어떻게든 막으려고 애썼으나, 천마의 제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백옥봉에 들끓었다.
"참으로 송구합니다."
사실 구후영은 자신이 배산을 크게 도운 거로 생색을 내려는 거였으나, 문지기는 상대가 천마의 제자라는 신분을 내세우는 줄로 오해하여 커다란 난감을 느꼈다.
다행히.
"구후 공자?"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의 목소리가 문지기를 구원했다.
"단 소저가 어찌 여기?"
대문 안에서 나오는 사람을 확인한 구후영도 깜짝 놀랐다.
"구후 공자야말로 여긴 어인 일로?"
단아 역시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용건이 있어 배산 공자를 만나러 왔습니다."
"조용한 곳에 가서 얘기하죠."
단아는 다짜고짜 구후영을 끌고 백옥봉 아래로 걸었다. 구후영은 영문을 몰랐으나,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에 군말 없이 따랐다.
"구후 공자께선 무슨 일로 배산을 찾는 겁니까?"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자 단아가 단도직입으로 질문했다.
구후영은 자룡을 혈포규찰대에서 꺼내기 위해 배산의 도움이 필요했던 일, 악불형과 함께 청첩을 위조해 연회에 참석했던 일, 배산을 도운 덕분에 서신을 얻은 일, 서신을 화산 제자가 훼손한 일 등을 간략히 설명했다.
"소문이 무성한 천마의 제자가 구후 공자였군요."
"천마의 제자요?"
"일류로 경지를 숨기고 나타나서 화산과 무당을 골탕 먹였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오햅니다. 전 천마와 일면식도 없습니다."
"알아요."
서로 마주 보며 진지하게 대화하던 두 사람이 동시에 큰 웃음이 터졌다.
구후영은 독물의 독액과 체액이 스며들어 옷이 지저분하기 그지없고 냄새도 지독하다. 반면, 단아는 갓 꾸미고 집에서 나온 아가씨처럼 단아하고 청결하다. 그런 둘이 십년지기라도 되는 듯 허물없이 대화하는 모습은 본인들이 보기에도 몹시 우스꽝스러웠다.
"아깐 왜 급히 떠난 겁니까?"
"배산이 장원에 없어요. 부인과 아이 모두 데리고 사라졌어요."
"네?"
구후영은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구후 공자도 뭘 느끼셨나요?"
"뭔지 모르지만,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혼수모어混水摸魚의 계책입니다."
혼수모어는 물을 흐리게 만들어 시야를 제한한 다음 손으로 만져 물고기를 잡는 것을 뜻하는, 삼십육계의 스무 번째 계책이다.
일반적으론 상황을 혼란하게 만들고 복잡한 틈을 타 이득을 보는 수단을 일컫는다.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배산은 명분만 있을 뿐 힘이 없습니다. 본인이 고수긴 하나 천마처럼 혼자서 마교 전체와 대항할 정도가 절대 아니고, 천마의 아들이라는 명분도 세습이 아닌 교주 자리를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은 없습니다."
처음 안 사실에 구후영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기만 했다.
"그런데 이번에 천마의 제자가 나타나기까지 했죠."
단아의 장난에 구후영이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배산은 자신이 사라지는 거로 마교를 흙탕물로 만들어 반전을 꾀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배산이 사라지면 교주 자리를 두고 사람들이 싸우겠군요."
"그뿐이 아니라 구심점인 배산이 사라진 덕분에 지지 세력들이 모이지 못해 싸움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단아의 말에 구후영은 배산이 왜 자신더러 더는 천산에 오지 말라고 했는지 깨달았다. 청월과 구후영의 관계도 관계지만, 천마의 제자로 오해받는 구후영이 나타나서 지지 세력이 뭉칠 가능성도 염두에 둔 듯했다.
"장원에선 배산이 사라진 사실을 숨기고 있나 봅니다."
"그럼요. 그래도 알 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겠죠. 당장 조용한 건 누군가가 먼저 움직이길 기다리며 힘을 비축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배산은 최소 반년, 길면 몇 년을 잠적할 겁니다."
단아가 단정 지어 말하자 구후영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꼼짝없이 규찰대주와 싸워야겠네.'
"그런데 구후 공자는 제가 왜 여길 왔는지 안 궁금합니까?"
단아가 짐짓 뾰로통하게 말했다.
"물어도 실례가 안 됩니까?"
배산을 크게 도운 구후영도 대문에서 거절당했는데 단아는 무려 안으로 들어갔다. 이는 단아가 마교와 평범한 관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안 알려줄 거지만, 그래도 물어는 봤어야죠."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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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안 이러셔도 되는데."
단아는 구후영이 동생을 구출하는 일을 돕겠다며 선뜻 나섰다. 구후영은 고마운 마음만큼 미안한 마음도 커서 속으론 반가우나 겉으론 자꾸 거절하는 척했다.
"제가 심심해서 이러는 거니까 안 고마워하셔도 되는데."
"그럼 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단 소저의 도움은 절대 잊지 않고 평생 갚겠습니다."
실랑이를 멈춘 둘은 경공을 펼쳐 혈포규찰대가 있는 골짜기로 빠르게 달렸다.
"안 보는 사이에 구후 공자의 무공이 일취월장했네요."
"그러고 보니 여기 오는 길에 재밌는 일이 있었습니다."
구후영은 옥면비룡과 전대 배월교주의 일을 단아에게 자세히 들려주고, 옥면비룡의 경공요결을 얻은 일도 자랑했다.
"경공요결은 제 동생한테 있습니다. 도착하면 빌려드리지요."
"이모가 십 년이나 행방불명이었는데, 남자 꽁무니를 따라다니느라 그랬던 거였군요. 고마워요."
이모를 도와서 고맙다는 건지, 경공요결을 보여줘서 고맙다는 건지 알 길이 없었는데.
"그럼 지금쯤 교로 돌아갔겠네요. 이젠 나도 교주의 중책을 내려놓고 편하게 살 수 있겠어요."
아무래도 교주 자리를 내놓게 돼서 한 말인 듯했다.
'부럽구나.'
구후영도 홍엽산장에 마음이 쓰이고 낙화문에 정이 깊지만, 모든 속박을 풀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선지 단아의 말이 마음에 크게 와닿았다.
"교주를 그만두면 뭐 하고 지내실 겁니까?"
"어려서부터 무공 수련밖에 몰랐고, 교주일 땐 교의 일로 바빴어요. 교주를 그만두면 하고 싶은 일을 해야죠. 아, 이건 묻지 마세요. 비밀입니다."
단아의 단호한 말투에 대화가 끊겼다.
"뭐, 다른 할 얘기는 없나요?"
말없이 달리는 게 심심했는지 단아가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제가 며칠 전에 절정에 들었는데."
"한 달 전이 아니고요? 연회에서 현현자와 내공 대결을 하고 절정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한 달이라고?'
보름 정도까지 각오했던 구후영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제가 헷갈렸네요. 하여튼, 절정에 들고 내공이 사라진 적 있습니다. 단 소저도 혹시 절정에 들었을 때 같은 증상을 겪었습니까?"
질문을 마친 구후영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단 소저가 홍엽산장에서 열여섯이라고 밝힌 적 있지. 그럼 열여섯이나 그전에 이미 절정을 이뤘다는 말인데, 열아홉에 절정이 됐다고 우쭐댔던 내가 몹시 부끄럽구나.'
"저는 겪은 적 없고 이유도 모르지만, 대부분 사람이 겪는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보통은 며칠이면 내공이 돌아오는데, 드물게 반년씩 걸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제 경지가 너무 빨리 올라가서 생긴 일은 아니군요."
"그럼요. 구후 공자는 상승이 빠를 뿐이지 부적절한 수단으로 경지를 억지로 올린 게 아니잖아요. 이건 속도가 아니라 정도를 걸었느냐 아니냐가 문제입니다."
가슴을 짓누르던 큰 걱정이 사라지자 구후영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경공요결에 구절이 하나 있는데, 제 이해가 미흡한 거 같습니다. 어떤 구절이냐면···"
"같은 구절도 사람마다 다르게 다가옵니다. 제 생각을 말할 테니 그저 참고만 하세요."
둘은 무공 얘기로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우며 이동하는 시간을 충실하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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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말로는 안 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배산의 서신이 훼손되었다며 사정을 구했는데, 역시나 거절당했다.
구후영은 너무 막막해서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혈포규찰대는 천마한테만 충성한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그때, 곁에서 듣기만 하던 단아가 불쑥 질문했다.
"그래. 우린 천강구절이란 사람을 따르는 거지 마교 교주라는 지위나 천강구절의 피에 충성하는 게 아니다."
"배산이 사라졌습니다."
단아의 뜬금없는 말에 눈알을 연신 굴리던 규찰대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교의 싸움에 안 휘말리려면 빨리 수습하고 떠나야겠죠? 그런데 우리 둘이 당신을 이길 자신이 없어도 여기에 잡아둘 자신은 있는데 말입니다."
규찰대주가 불쑥 주먹을 내밀어 단아를 공격했다. 단아는 사목권으로 규찰대주의 단순한 공격을 적절히 흘렸다.
그러나 살짝 휘청이는 걸 보니 약간 손해를 본 듯했다.
규찰대주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실력 가늠이 끝났다는 듯이 단아를 지나쳐서 구후영을 공격했다.
구후영은 자세를 잡고 태극권을 펼쳤다. 검법이 훨씬 자신 있지만, 규찰대주의 공격이 의외여서 미처 검을 뽑을 틈이 없었다.
"하?"
구후영의 정확한 수비에 당황하며 규찰대주가 주먹을 연신 뻗었다.
'응?'
구후영 역시 자신이 펼친 낯선 태극권에 놀라며 규찰대주의 직설적인 공격을 일일이 흘렸다.
단아는 구후영과 세 걸음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언제든 출수할 기회를 노렸다.
"제운종도 그렇고, 태극권도 그렇고. 너 혹시 무당에서 왔어?"
구후영은 비록 잘 막아내곤 있으나 여유가 있는 건 아니어서 규찰대주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에 규찰대주가 공격을 멈추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무당 제자는 아니오."
"무당 제자가 아닌데 태극권을 그 수준으로 익혔다고? 천강구절이 육양공을 만든 게 태극권을 이기기 위함인데."
상대하는 무공이 군더더기가 많을수록 태극권의 위력이 부각된다. 그걸 알아챈 천마는 육양공이라는 허초가 전혀 없는 무공을 만들어 혈포규찰대를 가르쳤다.
둘 다 제대로 익혔다고 가정하면 경지가 높은 자가 이기기 마련인데, 규찰대주는 반평생 익힌 육양공의 경지가 구후영의 태극권에 못 미치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젠 우리 말을 믿겠습니까?"
단아가 우쭐하며 말했다. 비록 면사로 가려서 표정을 알 수 없지만, 으쓱한 어깨만 봐도 어떤 얼굴인지 절로 상상되었다.
잠깐 고민한 규찰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룡은 놔주마. 대신 조건이 있다."
자룡을 놔준다는 말에 양손을 번쩍 들고 환호하려던 구후영은 조건이 붙었다는 말에 얼굴이 굳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야. 아무래도 애들을 데리고 조용한 곳에서 숨어 살아야 할 것 같아서, 아는 데가 있으면 추천 좀 해달라고."
- 작가의말
산우욕래풍만루山雨慾來風滿樓 - 소나기가 오려고 바람이 누각을 꽉 채우다.
맞춤법 검사기가 또 먹통이네요. 오타가 있더라도 양해 바랍니다.
만우절인데, 뭔가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사실 전 못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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