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실실虛虛實實
대장군 공야가 대패하며 망국의 위험에 처하자 한나라 왕은 다급히 제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순망치한의 도리를 잘 아는 제나라 왕은 한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손빈에게 한나라를 도우라 명했다.
손빈은 예전에 조나라를 돕던 때처럼 또 한 번 직접 위나라 수도로 진격하는 위위구조의 전략을 펼쳤다.
위나라의 군사 방연은 급히 한나라를 치던 군사를 소환한 다음 제나라 군대와 싸우려 했다.
그에 손빈은 바로 후퇴를 결정했는데, 여기서 꾀 하나 냈다.
제나라 군대는 후퇴하는 첫날 밥 짓는 부뚜막을 십만 개 만들었고, 이튿날엔 오만 개, 사흘째엔 삼만 개로 줄였다.
이를 확인한 방연은 겁쟁이로 소문 난 제나라 군사가 패퇴하는 중에 도주해 채 삼 할도 남지 않았다고 판단했고, 보병을 버린 채 기병만 이끌고 다급히 추격했다.
그러다 마릉馬陵에 도착했는데, 커다란 나무에 뭔가 글자가 있었다. 날이 이미 어두운 터라 횃불을 밝히게 했는데.
방연은 이 나무 아래서 죽으리라.
이런 글귀가 혁연히 새겨 있었다.
동시에 수만 발의 화살이 날아와 무방비 상태의 위나라 기병을 쓰러뜨렸는데, 방연은 만회할 기회가 사라졌음을 깨닫고 칼로 목을 문질러 자결했다.
승기를 잡은 제나라 군대는 바로 깃발을 돌려 위나라로 진격했고, 태자신을 생포하고 수십만 위나라 군사를 소멸해 대승을 거뒀다.
이로써 손빈은 모함으로 자기 양발을 자른 방연을 죽여 복수했고, 위나라를 패주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제나라가 대신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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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에 기대면 불을 지른 흑철이 미리 숲에 와 있을 리 없다. 직선으로 달리면 일행에게 안 들킬 수 없고, 일행에게 안 들키게 빙 에돌기엔 시간이 모자라다.
그러나 단아는 혹시 흑철이 숨어 있지 않을까 하고 대비하는 마음이 아니라 반드시 있다는 확신을 품고 청풍불의공을 돌렸다.
흑철이 느낀 갑자기 스치고 지난 바람이 바로 단아의 청풍불의공이었다.
문제는 단아가 과하게 긴장했다는 거였다.
평소라면 흑철을 찾아내고도 모른 척하면서 구후영이 합류하기를 기다려 협력해서 공격했겠지만, 긴장한 나머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손이 먼저 나가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흑철도 평소의 흑철이 아니었다. 예전이었으면 미련도 없이 도망치고 새로운 계획을 세워 다시 접근했을 것이나, 강렬한 질투를 비롯한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에 침식당한 흑철은 피하는 대신 맞서기를 택했다.
여덟 개의 변화로 단아의 암기를 피한 흑철은 마지막 아홉 번째 변화로 단아를 덮쳤다.
'여기서 결판을 본다.'
화들짝 놀란 구후영이 급히 경공을 펼쳐 달려오곤 있으나, 흑철은 그 전에 단아를 끝장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단아의 양손이 허공을 화려하게 수 놓으며 십수 개 암기를 강하게 뿌렸다.
하나하나가 방금 던진 수십 개를 합친 것보다 위력적인 이 암기들은 단아가 직접 구상하고 양양의 왕 야장이 정성스럽게 갈아 만든 독문암기로 강호에 선보이는 건 처음이었는데.
같은 수법으로 던졌으나 각자 다른 움직임을 보여 흑철도 피하는 걸 포기하고 그저 몸으로 맞섰다.
'이런.'
흑살공黑煞功을 운기해 암기를 모조리 막아냈지만, 단아를 덮치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설상가상으로 내상까지 도졌다.
'그래도 한다.'
구후영은 여전히 멀었다. 자신에 대한 자부심으로 흑철은 재발한 내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단아를 향해 돌진했다.
그에 단아의 양손이 다시 기묘한 움직임을 보였으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감히.'
흑철은 단아의 허장성세에 흠칫했으나 곧 속았음을 깨닫고 홧김에 한층 속도를 더했다.
동시에 미약한 파팟 소리와 함께 두 개의 검푸른 표창이 흑철의 얼굴과 가슴을 노리고 날아갔다.
흑갑호위의 기관 암기였다.
'뒈질.'
홧김에 여력을 다 쏟은 흑철은 피할 길도 막을 방법도 없을 듯했다.
그러나.
흑철은 필경 흑철이었다.
고강한 무공 덕분에 위기는 별로 겪어보진 못했으나 강호에서 수십 년 구른 덕분에 몹시 당황하여 딱딱하게 굳은 몸으로도 유려한 회피 동작을 펼쳐냈다.
쿨럭!
흑철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단아가 필살을 자신한 두 개의 암기를 피했으나 내상으로 피를 한 움큼 크게 쏟았고, 설상가상으로 구후영이 근처까지 왔다.
일지한매.
구후영이 초원 부족이 쏜 화살을 상대하며 만든 초식을 펼쳤다.
'못 피한다.'
흑철은 비록 구후영의 검에 팔 하나 잘리긴 했으나 여전히 상대를 아래로 보았다. 왼팔은 독이 퍼지는 걸 막기 위해 일부러 내준 거란 생각으로 구후영보단 흑갑호위의 암기가 더 문제라고 여겼었다.
그러나 구후영이 펼친 일검을 정면으로 마주하자 자신이 얼마나 크게 오판하고 있었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제길.'
보통의 인간이면 이쯤에서 모든 걸 포기하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흑철은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천마쯤 되어야 막아낼 것 같은 초식 앞에서 흑철은 자기 죽음을 냉정하게 판단했지만, 순순히 받아들이진 않았다.
흑철은 구후영의 검이 자기 목을 가르는 순간 모든 힘을 오른손에 쏟아 격공장을 펼쳐냈다.
강호에 알려진 기껏해야 열 걸음 밖의 촛불이나 끄는 그저 그런 격공장이 아닌, 흑철의 필생 공력과 경지를 담은 일장이었다.
"억!"
목을 잘린 흑철은 조용한 대신 격공장에 배를 맞은 단아가 짧은 비명을 지르곤 그대로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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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후영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밤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구후영의 질문에 장선이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비록 눈이 시뻘겋게 물든 건 똑같으나, 아까는 없던 정기가 어느새 돌아와 있어 이대로 주화입마에 빠지는 게 아닌지 하는 걱정은 덜게 했다.
"기억이 전혀 안 나?"
"네. 한바탕 악몽을 꾸고 깬 기분입니다."
"우선, 단아는 무사해."
"다른 사람은 어떻습니까?"
힘이 풀리며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쉬던 구후영은 피로 칠갑을 한 장선의 몰골을 확인하곤 일행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억나지 않는 동안 자신이 일행을 해코지한 게 아닌지 걱정되었다.
"다들 멀쩡하다."
장선은 일행이 두려움에 멀찍이 피해 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흑철을 죽인 건 기억해?"
"네, 거기까지."
"흑철이 죽기 전에 단아를 공격했다. 단아는 흑갑호위가 입었던 흑갑으로 배를 보호하긴 했으나 흑철의 마지막 공격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구후영은 심장을 손으로 잡고 조이는 느낌을 받았으나 단아가 무사하다던 말을 떠올리고 천천히 긴장을 풀었다.
"네가 바로 침술로 치료했는데, 그사이 초원 부족이 달려들었다. 그걸 나랑 야효랑 양달이 어찌어찌 막긴 했는데, 양달이 조금 다쳤다."
"어딜 다쳤습니까?"
"화살 세 발 맞았는데 네가 이미 치료했다."
구후영이 애써 떠올리려 했으나 양달을 치료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저들은 오십 정도 죽고 물러났는데, 양달의 치료가 끝난 다음 이천 정도가 무리를 지어 다시 공격해왔다."
구후영은 경공을 펼쳐 나무 꼭대기로 올라갔다. 비록 이미 땅거미가 지고 난 완연한 밤이었으나 숲 밖에 잔뜩 널브러진 주검들이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제가 한 짓입니까?"
"대부분."
대충 세어도 오백 구는 넘은 주검을 보며 구후영은 가슴이 시려왔다.
그러나 원경과 단아의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억지로 추슬렀다.
"다른 사람은 어딨습니까?"
장선이 일행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다행이다.'
원경은 며칠 전과 똑같은 얼굴로 잠든 듯 있었고, 단아는 창백한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 마찬가지로 잠들어 있었다.
야효는 울기 일보 직전의 얼굴로 있다가 구후영을 보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팔과 다리에 천을 칭칭 감은 양달은 힘없는 웃음을 지었다.
모용연은 정신이 반쯤 나간 얼굴로 원경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
"은인, 은인. 어디 계십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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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원이 세 개 세력으로 갈라졌단 말이요?"
"그렇습니다."
지금의 북원은 세 명의 황제가 나눠 통치했는데, 구후영을 죽이려고 부족들을 모은 자는 동쪽을 통치하는 투멘으로 정예 기병만 육만을 보유하여 여진족도 감히 맞서길 꺼리는 동부의 강자였다.
"나는 왜 죽이려는 거요?"
"은인을 죽이는 조건으로 누군가가 막대한 양의 식량을 주기로 했답니다."
"원한 때문이 아니고?"
"그런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족장에게 몽한약을 탄 술을 일행한테 먹이라고 시켰다. 족장은 죽어도 안 한다고 버텼고, 그 탓에 불이 일 때까지 잡혀있었다.
"그냥 한다고 하고 우리한테 말하면 되잖소."
양달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하면 우리 부족은 변절자로 찍혀 영원히 고개를 못 쳐들고 다닙니다."
족장으로서도 난감했던 게, 저들의 지시를 따르면 은혜를 모르는 놈이 되고 저들의 지시를 따르는 척하면서 구후영 일행에게 위험을 알리면 변절자가 되고 만다.
그에 족장은 차라리 자기 목숨을 버리기로 했었다.
그러나 새벽에 불길이 일면서 혼란한 틈에 은혜를 아는 누군가가 몰래 밧줄을 풀어줬고, 그제야 말을 타고 구후영에게 위험을 알리기로 한 것이었다.
"놈들이 쫓아오는 걸 보고 방향을 틀었는데 말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걸어오느라 이제야 도착했습니다."
중원에선 오랑캐를 간교하고 은혜를 모르는 미개한 무리라고 비하한다. 그러나 두루 겪어보니 그저 사람에 따라 다른 거지 딱히 중원인이 오랑캐로 불리는 자들보다 나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족장의 의리에 감동하는 것도 잠시.
'다친 사람이 셋이다.'
원경과 단아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양달은 팔과 다리에 골고루 화살을 맞았다.
'흑철이 없으니 숲으로 가도 되는데, 그러면 두 달도 더 걸릴 것 같구나.'
단아와 원경 모두 상세가 갑자기 악화할 수 있으니 두 달은 너무 길다. 이젠 선택할 여지도 없이 무조건 말을 타고 초원을 달려야 할 판이다.
그러나 초원 부족들이 계속 화살로 괴롭힐 걸 생각하니 차라리 숲이 낫지 않나 싶기도 했다.
"당신이 보기엔 저들이 이대로 포기할 것 같소?"
구후영의 질문에 족장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저들은 또 몰려올 겁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이번 일에 참여하는 모든 부족이 이 년 정도는 식량 걱정이 없을 만큼 많은 양이라고 합니다."
'연 선생인가 하는 자의 농간일까? 아니면 나를 노리는 또 다른 세력일까?'
잠깐 고민한 구후영은 연 선생의 짓이라고 단정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최소 수십 개 부족이 이 년을 넉넉히 먹을 양의 식량을 대가로 내줄 만큼 큰 원한을 산 적이 없었다.
"혹시 식량을 주기로 한 자가 누군지 들은 적 있소?"
"어제 모인 자들도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아마 투멘만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잠깐 고민한 구후영이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혹시 투멘이란 자가 직접 나설 가능성은 있소?"
"바깥에 쓰러진 자들이 공을 탐내서 서로 죽인 게 아니라면."
족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작 열 명도 안 되는 무리가 수백 명을 도살했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두려움이 치솟은 탓이었다.
"투멘이 직접 나설 가능성이 큽니다."
- 작가의말
허허실실.
허허 소리 내 웃는 놈이나 가만히 실실 쪼개는 놈이나 매한가지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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