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한진大羅漢陣
예전의 소림엔 소나한진, 중나한진, 대나한진이 있었다.
소나한진은 강호에 널리 알려진 십팔나한진으로, 여기서 십팔은 내육근계內六根界와 외육진계外六塵界와 육식계六識界를 합친 십팔계를 의미한다.
중나한진은 삼십육나한진으로, 불가에서 삼십육은 이소견대以小見大를 뜻한다.
대나한진은 오삽사나한진으로, 보살이 수행해야 하는 오십사 개 단계를 뜻한다.
사실 이 셋은 칠십이절기를 창안한 법여대사가 남긴 수련법인데, 십팔은 육근과 육진과 육식을 최대한 강하게 단련해 큰 힘을 얻는 시작을 뜻하고, 삼십육은 얻은 힘들을 조화하면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뜻하고, 오십사는 힘을 버리고 깨달음만 남겨 부처와 같은 경지에 이르는 결과를 말한다.
그러나 법여대사의 이러한 바람과 무관하게, 너무 힘든 이 수련법은 세 개의 진법이 되었다.
개중 십팔나한진은 산을 무너뜨리고 폭포를 거꾸로 흐르게 하는 위력 때문에 당시 불심이 깊었던 소림에 봉인 당했고, 중나한진과 대나한진은 소나한진과 반대로 아무런 위력도 없어 버림받았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소림이 소나한진의 봉인을 풀었는데, 육근 중 비근鼻根과 설근舌根의 수련법이, 육진 중 향진香塵과 미진味塵과 법진法塵의 수련법이, 육식 중 비식鼻識과 설식舌識의 수련법이 사라졌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근耳根과 촉진觸塵의 수련법 역시 온전히 전해지지 않았다.
그에 소림은 여섯 명의 나한이 육합진을 이뤄 한 명의 진나한이 하던 역할을 대신케 했고, 십팔나한진을 소나한진, 백팔나한진을 대나한진으로 불렀다.
법여대사가 알았으면 답답해서 땅속에서 벌떡 일어날 만한 일이지만, 소림의 대부분 스님이 백팔나한진을 대나한진으로 호칭하는 걸 당연시했다.
"원경 스님의 증언을 듣는 게 옳은 순서 아니겠소?"
다짜고짜 구후영더러 포박받으라는 방장의 말에 옥무영이 반발했다.
"어디 믿는 구석이 있는 거요?"
'뭐지?'
방장의 얼굴을 빠르게 스친 미소를 놓치지 않은 옥무영은 자신이 실수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몰라 속이 갑갑했다.
"원경은 자신의 죄를 시인한 다음, 체포를 거부하고 봉마림封魔林으로 도주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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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가 마지막이다.'
최종필이 소림에 온 목적은 길잡이 형제를 찾는 것이고, 당연히 소림의 구조를 사전에 연구해 사람을 가둘 만한 곳들을 추려냈다.
개중에 이젠 한 곳만 남았다.
'저기도 없으면 둘이 죽었다는 뜻인데.'
늘 귀찮게만 하는 형제가 정말 싫었는데, 죽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내심 섭섭했다.
'아니지. 둘을 데려간 게 가짜 중인지도 모르지.'
마지막 후보지를 앞두고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최종필은 선뜻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저긴 빈집이다."
우문현의 목소리가 최종필의 귀에 울렸다.
"그게 나랑 뭔 상관인데."
최종필과 우문현은 성향이 상반될 뿐 무공이나 여러 면에서 백중세를 이뤘다. 그러나 각자 확연한 우위가 하나씩 있는데, 우문현은 과거는 떨어졌으나 향시를 합격한 수재로 최종필보다 확실히 유식하고, 최종필은 뻔뻔함이 우문현뿐이 아니라 세상 대부분 사람을 압도한다.
"돈 따위를 훔치려고 기웃거린 건 아닐 테니 사람을 찾는단 얘긴데, 저긴 아무도 없다."
최종필도 사람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해 확인하길 망설이던 차였던 터라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날 싫어하고, 나도 널 싫어한다."
우문현이 최종필과 눈을 맞추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나 너나 나나 상대방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뭔데?"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사명감."
사실 최종필은 글을 익힐 때 전혀 돌아가지 않는 머리가 수사할 때만 잘 굴러가는 게 좋아서 포두가 됐다.
그러나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십수 년 동안 포두 생활을 하며 사명감까진 아니더라도 자부심 비슷한 뭔가가 생기긴 했다.
그렇기에 우문현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건 맞지."
"소림에는 외부인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소림의 속가제자 대부분이 모르는 곳이 있다. 네가 찾는 게 누군지 모르지만, 소림이 사람을 가둔다면 거기밖에 없다."
"어딘데?"
"봉마림이라고, 저기 있다."
우문현이 손가락을 따라 확인하니 소실산 자락을 덮은 숲 중에 유일하게 잎사귀가 다른 나무로 무성한 곳이 보였다.
"이름이 불길한데?"
"달마대사께서 자신의 마를 꺼내 봉인한 곳이라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소림의 성지聖地로, 나 같은 속가제자는 물론이고 방장이나 원로들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다."
'거짓말은 아니다.'
최종필은 상대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가리는 재주를 타고났다. 아주 가끔 틀리기도 하지만, 진실을 거짓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어도 거짓을 진실로 안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너는 못 가니까 내가 대신 가달라는 말이지?"
우문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널 도와 진실을 찾는데, 너도 날 도와야지 않겠어?"
따지고 보면 최종필이 사람을 찾는 일에 우문현이 단서를 준 거다. 누가 누굴 돕는지는 삼척동자가 와도 분별할 수 있는데, 최종필은 두꺼운 낯짝을 앞세워 진실을 호도했다.
"들어는 볼게."
"너도 진실이 궁금하다며? 원경이란 스님을 찾아줘."
우문현이 잠깐 고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간다."
우문현은 끝까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최종필은 시름을 푹 놓고 봉마림을 향해 서슴없이 움직였다.
그러나.
"나한테 부탁할 필요도 없는데."
최종필이 떠나자 우문현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거기 가면 다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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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마림에 가서 원경을 찾으면 되는 거 아니오? 거기가 크면 얼마나 크겠소."
옥무영의 말에 방장이 작게 탄식했다.
"소림 제자나 속가는 봉마림에 접근하는 걸 사칙寺則으로 금지하오."
"사안이 중대한데, 한 번만 변통하면 안 되겠소?"
옥무영의 추궁에 방장이 잠깐 고민하고 입을 열었다.
"봉마림엔 진법이 있는데, 입문入門만 있고 출문出門이 없소."
"들어가면 나올 길이 없단 말이오?"
"그건 아니오."
방장의 말에 옥무영은 물론이고, 연무장의 대부분 사람이 궁금한 얼굴로 이어지는 해명을 기다렸다.
"봉마림 안엔 십팔동인진이 있소. 십팔동인진을 통과하면 다른 곳으로 나올 수 있소."
"출구로 진입하면 그만이 아니오?"
옥무영의 말에 방장이 고개를 저었다.
"출구가 달마동이오. 문제는 달마동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고 쳐도, 십팔동인진을 거꾸로 통과해야 하오.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니오."
잠깐 고민한 옥무영이 질문을 바꿨다.
"원경은 왜 봉마림으로 들어간 거요?"
"소림 제자가 봉마림에 들어가는 이유는 두 가지요. 하나는 십팔동인진을 통과해 무성武聖의 칭호를 얻는 거고, 남은 하나는 온전한 몸으로 소림을 떠나기 위함이오. 원경이 십팔동인진을 통과하면 소림도 더는 죄를 묻지 못하오."
무승武僧이 소림을 떠나 환속하려면 단전을 폐하거나 사지의 인대를 끊어야 한다.
단, 십팔동인진을 통과하면 아무런 제재도 없이 내보내고, 자신이 익힌 무공을 후대에 전하는 것도 막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소림 제자가 아니면 봉마림에 들어가도 괜찮다는 뜻이오?"
가만히 듣던 구후영이 불쑥 질문했다.
"누구든 봉마림에 들어가려면 우선 대나한진을 상대해야 하오."
소림의 역사에서 십팔동인진을 통과한 사람은 세 명밖에 없는데, 개중 한 명이 바로 십팔동인진을 설계하고 제작한 법여대사고, 한 명은 실수로 봉마림에 들어간 진법가로 십팔동인진의 허점을 찾아 요행수로 통과했다.
마지막 한 명은 최초이자 유일하게 백팔나한진을 깬 천강구절이다.
'진법을 하늘까지 칠 리는 없으니, 들어갔다가 날아서 나오면 그만이다.'
구후영은 귀검동에서 운기하는 동시에 축기하는 법을 깨달았고, 주변에 형성된 세 개의 구궁 덕분에 세상 누구보다 단전이 크다. 거기에 운기 재능도 특출나서 밖에서 정해진 위치에 돌멩이를 던져주면 원경 한 명 정도는 들고나올 자신이 있었다.
'이형만 찾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
구후영은 원경이 자기 사부를 시해할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했고, 봉마림에 들어가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럼."
결정을 마친 구후영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대나한진을 펼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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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전 앞 연무장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제,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때?"
옥무영이 양손을 맞잡아 비비면서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구후영은 전혀 설득당할 얼굴이 아니었다.
"사형, 이게 안전한 길입니다. 저들은 나를 죽이려 합니다."
대련 상대인 원철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접객화상이나 원병한테서 언뜻언뜻 보였던 살기는 어떤 해석을 갖다 붙여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렇구나."
옥무영은 단 한마디로 구후영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소림이 구후영을 죽일 생각이라면 어차피 백팔나한진을 꺼낼 것이다. 이미 실전에선 공유보다 강하다고 알음알음 알려진 원철을 일대일 대결로 이겼기에 소림으로선 이 방법밖에 없다.
"그래도 조심해."
어차피 상대해야 할 백팔나한진이다. 그러나 구후영이 포박을 거부하고 소림이 끝내 백팔나한진을 꺼내 제압하는 것과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봉마림에 들어간다는 명분으로 구후영 스스로가 백팔나한진에 도전하는 건 의미가 다르다.
후자의 경우, 소림도 눈치가 보여 대놓고 구후영을 죽이기 어렵다.
"제가 위험해지면 사형이 밖에서 진법을 흔들어 주십시오."
뜻밖의 말에 옥무영은 잠깐 멍한 얼굴이 되었다가 고개를 젖히고 통쾌하게 웃었다.
'사제는 큰 줄기를 꽉 잡고 흔들리지 않았구나.'
옥무영은 사태의 변화에 따라 생각을 바꾸며 영활하게 대응하려 했다. 구후영은 반대로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처음 생각대로 쭉 밀고 나갔다.
누구의 방식이 더 나은지 우열을 가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고 누가 더 정확히 대응하는지가 중요한데, 정보가 부족한 현재 상황에선 분명히 구후영이 더 잘하고 있다.
그에 옥무영의 마음에서 희망이 무럭무럭 자랐다.
'잘하면 사제가 백팔나한진을 깰지도 모르겠구나.'
진법을 상대할 때 중요한 건 두 가지다.
하나는 핵을 찾아내 진법 전체를 흔들거나 파괴하는 거고, 하나는 진법의 흐름에 절대 휩쓸리지 않는 거다.
현재 구후영이 보여준 단단함이라면 진법의 흐름에 쉬이 쓸리지 않을 듯하고, 진의 핵을 찾는 일도 그리 어려울 것 같진 않았다.
"통과 여부는 어떻게 판단하는 것이오?"
실성한 듯 웃는 옥무영 때문에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구후영이 질문으로 되돌렸다.
"백팔나한진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한당주가 알아서 판단할 것이오."
방장의 말에 구후영은 원병과 슬쩍 눈을 맞췄다.
질투와 분노와 살기.
기세를 다루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구후영은 짧은 눈맞춤에서 수많은 감정을 읽었다.
'그래도 너무 대놓고 하진 못할 테니.'
영문은 여전히 모르지만, 상대가 자신을 곱게 놔두지 않을 거란 단서는 이미 여럿 있었다.
'방심하진 말되, 긴장하지도 말자.'
마지막으로 마음을 한 번 더 다스린 구후영이 태연한 얼굴로 백팔나한진 앞으로 걸어갔다.
"개진開陣!"
원병의 외침에 진법이 열렸고.
구후영이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 작가의말
소림의 무공은 대부분 하자가 있습니다. 나한진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이게 다 뿌리를 버려서입니다. 소림에 ‘뿌리 깊은 나무’의 단체 시청을 권장합니다.
칠십이절기와 나한진에 관한 설정은 얼추 마쳤고, 아직 십팔동인진이 남았습니다. 모든 설정을 다 펼치면 소림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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