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휴유용休休有容
늦가을의 옷자락을 잡고 성큼 걸음으로 다가온 겨울 장군이 눈보라를 휘몰아 세상을 하얗게 칠해 얼렸다.
그에 강물은 두꺼운 얼음 아래 숨어서 몰래 흐르고, 나무는 잎사귀를 떨구고 가지도 꺾은 앙상한 몸으로 가여운 척했다.
일지봉 역시 처마에 맺힌 고드름들이 뾰족하게 위협해 분위기가 더없이 날카로웠다.
"자꾸 우리한테 검에 집착한다고 하는데, 구후 장주야말로 태극권에 집착하는 거 아니오?"
태극혜검에 관해 토론하다가 또 말다툼이 일었다.
"비급 이름이 태극혜검이라고 해서 꼭 검으로 펼쳐야 한다는 게 더 억지 아니오?"
구후영은 자신이 황궁에서 지낸 경험 덕분에 흉금이 예전보다 넓어졌다고 여겼다. 그러나 다시 무당 장로들과 구결을 토론하며 꼭 그런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권법이 더 적합했으면 태극혜권이라고 했겠지. 대사형은 양의심법만 배우고 양의검법은 익힌 적이 없소. 그런데도 태극혜검이라고 이름을 달았으면 삼풍 조사의 무의에 가장 적합한 무기가 검이라는 뜻 아니겠소?"
장삼풍은 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구십 세에 갑자기 양의검법을 만들었을 때 다들 죽음이 가까워져서 심경의 변화가 온 게 아닌지 걱정했었다.
무당 장로들이 검에 대한 집착 역시 장삼풍이 뜬금없이 양의검법을 만들어 전한 데는 반드시 깊은 뜻이 있다는 추측에서 비롯되었다.
"혜검은 불가에서 모든 번뇌를 자르는 지혜를 뜻하는 말이오. 현현 진인은 당연히 태극에 관한 번뇌와 고민을 끊으라는 의미에서 태극혜검이라고 이름을 지은 게 아니겠소?"
불교는 중원에 들어오면서 제식이나 여러 방면에서 도교의 형식을 많이 빌렸고, 용어도 도교의 것을 많이 차용했다. 도교 역시 불교의 설화들을 새롭게 각색했고, 불교의 사상을 꽤 흡수했다.
그렇기에 무당 도사인 현현자가 혜검을 아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구후 장주의 말대로면 태극은 크고도 커서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건데. 비급의 이름을 태극혜검이라고 지은 건 대사형이 큰 깨달음을 얻어 자신감이 넘쳐서라고 생각하시오?"
현현자가 비급의 내용이 태극에 관한 번뇌를 모두 없앨 정도로 대단하다고 자신한 게 아니라면, 구후영의 해석이 틀린 셈이다.
"태극혜검이라고 한 건 이 비급에 대한 자부심이라기보단 바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낫지 않겠소? 태극에 관한 고민을 없애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생각하오."
"내가 아는 대사형은 그리 감상적인 분이 아니오."
장로 한 명이 구후영의 말에 반대했다.
"내가 현현 진인의 마음을 들여다본 건 아니지만."
구후영은 신중히 고민하고 입을 열었다.
"이 비급을 읽고 고민하며 각자의 태극을 찾아가길 바란 게 아니겠소?"
"각자의 태극?"
"각자 성격이 다르고 살아온 인생도 다르니, 누구의 태극은 크고 누구의 태극은 작고, 누구의 태극은 네모나고 누구의 태극은 동그랗지 않겠소? 타산지석은 가이공옥이니 타인의 태극을 보아 나의 태극을 연마할 순 있지만, 타인의 태극을 그대로 나한테 적용하는 건 틀린 행동이 아니겠소?"
장삼풍은 무학의 대종사다.
이유극강은 사량발천근, 이화접목, 두전성이 등 수많은 이름으로 무림에 쭉 존재해 왔다. 그러나 장삼풍처럼 하나의 완전한 무학으로 승화한 무인은 없었다.
그런 장삼풍이 이뤘거나 이루려 했던 태극을 품는 건 웬만한 자질론 어려운 일이다.
"하하."
현정자가 큰소리로 웃었다.
"구후 장주의 말에 완전히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이치에 맞는 해석이라고 생각하오. 고수는 맨손으로도 검법을 펼칠 수 있고, 검으로 창법도 펼칠 수 있으니 어떤 무기를 들지는 각자 마음에 달렸다고 생각하오."
현정자 덕분에 날카롭던 분위기가 해소되었고, 장로들과 구후영 모두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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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후영이 일지봉에서 고군분투하던 시각.
임초현은 태원부의 어시장을 기웃거렸다.
"임 대협. 천진위에서 온 농어가 있는데 잠깐 보시죠."
농어는 겨울철의 별미로 불리는 물고기로, 살이 도톰하고 가시가 적고 비린내가 없어 부자들이 자주 찾는다.
아쉽게도 태원부를 지나는 목마하에는 없고, 바다와 가까운 황하 하류와 장강 중하류와 천진위 등 지역에서만 잡힌다.
"물건이 싱싱하냐?"
"그럼요. 이 추운 날씨에 안 싱싱할 수 있겠습니까?"
장사치의 호언장담에도 임초현은 직접 농어들을 뒤집으며 꼼꼼히 살폈다.
"내가 다 사겠다."
"매번 고맙습니다. 제가 비늘을 벗기고 지느러미도 자르고 토막도 쳐 드릴 테니까 안에 따뜻한 데서 잠깐만 쉬고 계십시오."
"그래. 바쁘니까 서두르거라."
당부를 마친 임초현이 나무로 만든 허름한 방 안에 들어갔다. 안엔 마른 검불을 태우는 화로가 있어 바깥보단 훨씬 따뜻했다.
"오셨군요."
방 안에 있던 사내가 임초현을 보자마자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다름이 아니고, 태원부 하오문 문주가 된 사공 사내였다.
"그래. 무슨 일로 보자고 했지?"
물고기를 사는 건 구실이고, 약속한 곳에 묶인 흰 천을 보고 찾아온 거였다.
"먼저, 그전에 분부하신 용호표국과 동창의 관계에 관해 조사한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담진웅이 진짜 동창과 손잡았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확신할 수 없습니다."
"자세히 말해봐라."
"용호표국은 물론이고 태원부에 조금 권세가 있다 싶은 곳은 다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동창과 연관된 흔적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동창과 관계가 있다고 쳐도 담진웅 개인 인맥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솔직히 이 이상은 저희 능력으로 어려운 일이라서, 여기서 멈췄으면 합니다."
임초현은 잠깐 고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담진웅이라면 중요한 일은 혼자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니 더 조사하는 건 의미 없겠다. 이 일은 이만하면 됐고, 네 용건이 뭐냐?"
"조심스럽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데?"
"혹시, 구후 장문께서 보검을 분실했습니까?"
뜻밖의 말에 임초현은 턱에 힘이 들어갔다.
"어찌 알았느냐?"
"구후 장문의 동생을 찾을 때 동행한 항주 총단의 장로 두 분이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길잡이 형제가 보낸 소식이란 말에 임초현은 긴장을 조금 풀었다.
"뭐라고 하더냐?"
"항주의 죽개방 방주가 보검 하나 얻었는데, 검집과 자루가 구후 장문의 보검과 일치한다고 합니다. 타초경사 할까 봐 더 자세히 확인하지 못했지만, 거의 확실하다고 합니다."
"그쪽이 원하는 게 뭐지?"
"죽개방의 무공이 만만치 않아 직접 건드리는 건 무리입니다. 하오문은 이만 빠지고 낙화문이나 대유방이 나서서 확인하는 걸 바랍니다."
'의리를 아는 협객이군.'
돈 얘기가 나올 줄 알았던 임초현은 속으로 매우 감탄했다.
'잠깐. 이걸 유저한테 알려야 하나?'
구후영과 상의하고 답을 주겠다고 하려던 임초현이 문득 떠오른 생각으로 멈칫했다.
'장삼풍이 남긴 태극혜검을 완성한다고 들었는데. 괜히 검 때문에 차질이 생기는 게 아닐까?'
임초현 역시 구후영이 잃어버린 천공교검이 꽤 귀한 보검임은 안다. 그러나 못해도 이만 냥 이상 받는 귀한 물건임은 모른다. 구후영이 이런 거로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임초현 역시 검의 가격을 캐물을 정도로 속물은 아니었다.
"이 일은 자네만 알고 있나?"
"그렇습니다. 항주의 총단에도 총타주와 두 분 장로만 알고 계십니다."
"이 일은 일단 이대로 두는 게 좋겠다."
"네?"
"사내가 그깟 신외지물에 연연해서야 되겠느냐?"
천공교검의 가격을 알았으면 누구보다 연연했을 임초현이지만, 모르는 게 약이었다.
"구후 장주가 대공을 이루면 그때 얘기할 거니까 너도 입을 꾹 다물고 있거라."
임초현은 구후영이 태극혜검을 완성한 후에 검에 관해 얘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임 대협도 흉금이 어마어마한 분이셨구나.'
사내는 최소 수백 냥을 호가할 보검을 신외지물로 취급하는 임초현에게 깊이 감탄했다.
"두 분 장로껜 검의 행방에 유의해달라고 부탁하고."
임초현은 품에서 오십 냥짜리 은원보를 꺼내 사공 사내한테 건넸다.
"이건 담진웅을 조사한 수고비와 보검의 소식에 관한 대가다. 일단 쓰고 모자라면 내게 말해라."
'이런 훌륭한 분이니 구후 장문 같은 대협을 키우셨겠지.'
임초현의 흉금이 조금은 더 크게 느껴졌다.
#
양춘삼월이 가까워져 올 무렵, 무당 장로 대부분이 돌아갔다. 각자 자신의 태극을 찾아야 한다는 구후영의 말에 동의하고 태극혜검의 구결에 더는 집착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장주를 처음 봤을 땐 단단함이 넘치나 예기가 부족했는데, 이젠 대종사의 기도가 느껴지오."
마지막까지 남았던 현정자 역시 구후영에게 작별을 고했다.
"처음 봤을 때 장로께선 예기가 넘치나 유연함이 부족했는데, 이젠 솜보다 부드럽소."
구후영의 대답에 현정자가 소리 내 크게 웃었다.
"그랬군. 내 예기가 강해서 장주의 단단함만 부각됐던 거였소. 지금은 내 예기가 많이 갈무리된 덕분에 장주의 예기를 비로소 느끼게 되었고, 장주의 단단함 덕분에 내 부드러움이 겉으로 드러났소."
"난 그렇게 말한 적 없소."
"그렇지. 장주의 뜻이 아니라 내가 느낀 거겠지."
즐겁게 웃던 현정자가 갑자기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장주를 일찍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일찍 만났으면 장로한테도 나한테도 좋은 일이 아니었을 거요. 나도 장로도 준비가 덜 됐을 테니 말이오."
끊임없이 부딪치며 첨예하게 대립하는 과정에 큰 성과를 얻었다. 도덕경이 세상의 진리를 담은 게 아니라 진리에 다가가는 마음가짐을 적었듯이, 태극혜검 역시 태극에 다가감에 있어 주의할 점을 적은 지침서이지 태극으로 이끌어주는 인도서가 아님을 다들 인정했다.
이러한 발상의 전환은 무당 장로들보다 구후영에게 훨씬 도움이 됐다.
무당 장로들은 이미 어느 정도 틀이 생긴 상황이고, 성취도 높은 편이다. 단지 무공 성취를 따지면 대부분이 구후영에 못 미치나, 무학의 성취는 구후영보다 낮은 자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제 와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단기간에 기존 틀을 깨고 새롭게 발전하는 건 어렵다.
구후영은 근래에 무학에 관한 깨달음을 잔뜩 얻었으나 자신의 틀을 미처 만들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 커다란 깨달음을 얻어 목적지를 알고 나아가야 할 방향도 명확히 인지한 덕분에 기틀을 차근차근 마련해 어느새 무당 장로들을 추월했다.
예전엔 무공만 강하고 무학에 관한 조예는 무력에 한껏 못 미쳤으나, 이젠 무공에 어울리는 이해를 갖추게 되며 짧은 기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인 양 기도가 확 달라진 바람에 무당 장로들도 대놓고 감탄할 정도였다.
"나이를 먹으니 느는 게 욕심밖에 없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생각에 다급해져서 그런 건지."
현정자의 말에 구후영도 불쑥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황제도 신선이 되고픈 마음에 뭔가 사고를 치지 않을까?'
황제가 딱히 하는 일은 없지만, 천하가 태평한 지금은 그게 차라리 낫다. 괜히 황태자가 등극해 의욕적으로 뭔가 하려고 들면 오히려 천하에 혼란이 올지도 모른다.
- 작가의말
휴휴유용 - 군자의 흉금이 아주 큼을 묘사하는 사자성어입니다.
이번 편의 군자는 아무래도 수만 냥 은자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임초현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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