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심파측人心叵測
연식이위기埏埴以爲器 당기무當其無 유기지용有器之用.
춘추春秋·노자老子·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말로, 흙을 빚어 도자기를 만들 때 그 속이 비어야 비로소 그릇의 쓸모가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재밌는 모순이 생긴다.
물이 가득 담긴 도자기는 쓰임이 있으나 더 담지 못해 그릇으로서의 쓸모가 없다. 빈 도자기는 쓸모는 있으나 담은 게 없어 쓰임이 없다. 물 대신 기름을 담으면 쓸모가 없는 건 똑같으나, 쓰임이 커진다.
단전도 마찬가지다. 내공을 담는 그릇이라는 관점에서 꽉 찬 단전은 쓰임이 있으나 쓸모가 없고, 텅 빈 단전은 쓸모가 있으나 쓰임이 없다.
즉, 쓸모가 있는 단전과 쓰임이 있는 단전이 상충한다. 내공을 많이 담으면 그릇으로서의 쓸모가 줄고, 내공을 적게 담으면 쓰임이 작아진다.
그럼 해결책은 뭘까?
간단하다. 단전이 크면 그만이다. 많이 담았는데도 더 담을 수 있다면 쓸모도 있고 쓰임도 있는 그릇이 된다. 거기에 물 대신 기름을 담는다면 쓰임이 훨씬 커진다.
일류에서 절정으로 가는 과정이 바로 이거다. 단전을 키워 더 쓸모 있는 그릇으로 만드는 동시에, 물 대신 기름을 담아 그 쓰임도 더 크게 한다.
그렇기에, 절정의 경지에 들고 제일 먼저 하는 게 단전을 비워 키우는 일이다.
#
'또 예전처럼 된 건가?'
무아지경에서 깬 구후영은 텅 빈 단전을 확인하고 망연자실했다. 경지만 높지 심법에 관한 지식은 턱없이 부족하여 당면한 상황을 정확히 바라보지 못한 탓이다.
'괜히 시간만 지체했어.'
구후영의 실력에 딱히 걱정할 만한 맹수는 없지만, 경계해야 할 건 맹수가 아닌 사람이다.
그러한 이유로 구후영은 길을 재촉하기보단 객잔에 방을 잡고 우선 내공을 회복하려 했다. 그런데 분명히 수련이 잘 되었던 거 같은데, 아침에 깨고 보니 내공이 하나도 모이지 않았다.
차라리 어제 떠났으면 지금쯤 자룡과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구후영은 후회만 잔뜩 치밀었다.
'그래. 이제라도 출발하자.'
뭐가 문젠지 알지 못하니 해결책도 모른다. 차라리 빨리 가서 자룡을 데리고 돌아가는 게 낫다. 내공이 안 모이는 문제는 절정인 임초현에게 같은 증상이 있었는지 확인하는 방법도 있고, 홍엽산장에 가서 장선이나 연무쌍에게 물어도 된다.
마음을 굳힌 구후영은 풀지 않고 그대로 침상에 뒀던 짐을 메고 객실을 나섰다. 짧은 복도를 지나 객당에 가니 이른 새벽이어서 그런지 점소이밖에 없었다.
"손님, 식사하시겠습니까? 오늘은 암탉을 잡아 면 육수가 끝내줍니다."
구후영을 본 점소이가 반색하며 말했다.
"식사는 됐고 제일 좋은 술로 두 근 주시오."
그동안 자룡의 일이 마음에 걸려 음주를 최대한 자제했던 구후영이다. 이젠 가장 큰 걱정거리가 사라졌으니 적절히 술을 즐길 작정이다.
"엽전 스무 개입니다."
엽전을 받은 점소이가 금세 사라졌다가 나타나서 술병 두 개와 마른 잎으로 싼 음식을 구후영에게 건넸다.
"말린 고기입니다. 짭짤해서 안주로 딱이죠."
"고맙소."
점소이의 친절에 감동한 구후영은 엽전 두 개를 슬며시 건넸다.
#
구후영은 술과 안주를 봇짐에 넣고 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자룡에게 술을 가르칠 생각 덕분에 내공이 안 모이는 사실도 잊고 그저 즐겁기만 했다.
그런데.
요긴한 일로 조용히 얘기했으면 합니다.
나무에 새겨진 글자가 구후영의 즐거움을 깨뜨렸다.
'나한테 하는 말인가?'
잠깐 고민한 구후영은 어쩌면 다른 사람에게 남긴 글귀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대로 지나쳤다.
장문검의 비밀을 압니다.
그러나 반 각 뒤에 나타난 두 번째 글귀가 또 구후영의 발목을 잡았다.
구후영은 장문검에 큰 비밀이 있다는 말을 불과 한 달 전에 임초현에게 들었으나 별 감흥이 없었다. 임초현은 자신의 사부인 전대 장문인한테서 뭔가 비밀이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관련 단서는 한 글자도 알지 못했다.
'무시하자. 우리 문파만 장문검이 있는 게 아니고.'
은자를 주고 곧 죽을 망아지를 산 일. 여자 알몸을 안 보려고 눈을 감았다가 취화봉의 동굴에 떨어진 일. 오는 길에 위하에서 뱃놈들에게 속은 일.
비록 결과는 다 좋았지만, 떠올릴 때마다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화끈하다. 구후영은 천산의 차가운 공기로 뜨거워진 낯을 식히며 글귀를 무심하게 지나쳤다.
풍애협에서 만납시다.
안타깝게도 상대는 꽤 끈질긴 성격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자기 신분도 노출했다.
'전중광?'
어제 흑 장로의 손에 부러진 화산의 청안검이 글귀 옆에 놓여 있었다. 자루가 기러기 목을 닮았다고 하여 청안검으로 불리며 강호를 통틀어 화산파만 사용하는 특별한 검이다.
'어제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긴 했어.'
현현자와 겨루고 돌아갈 때 잠깐 눈빛이 스친 적 있다. 당시 깊은 감동에 빠져서 유의하지 않았으나, 지금 떠올려 보니 분명히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그럼 또 뭐해. 풍애협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상대가 화산 검종임을 확인한 구후영은 마음이 크게 동하긴 했으나, 계속 무시하기로 했다. 풍애협이 어딘지 모르는 것도 있고, 안다고 쳐도 똑바로 찾아갈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길을 따라 쭉 걷던 구후영은 풍애협風哀峽 세 글자가 커다랗게 적힌 표지판을 보고 말았다.
'운명인가?'
구후영은 뭐에 홀린 듯 글자가 적힌 나무판자에 다가갔다. 풍애협 세 글자 밑에 작은 글씨로 경고문이 있었다.
독초와 독물이 넘치니 절대 접근하지 마시오.
'함정은 아닌 것 같은데.'
구후영을 어떻게 하려고 함정을 판 거라면 굳이 풍애협처럼 위험한 곳에서 만나자고 할 리가 없다.
'무슨 얘긴지 들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어쨌든 같은 뿌리에서 나온 문파인데.'
정작 풍애협이 눈에 보이자 마음이 변한 구후영은 귀에 감각을 집중했다.
특별히 거슬리는 소리는 없었다.
'매복은 없는 것 같구나.'
완전히 확신하긴 어렵지만, 구후영은 홍엽산장에서 내공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친위대 사내의 미약한 숨소리를 들은 적 있다. 당시 연무쌍이 내공을 움직이고도 알아차리지 못한 걸 생각하면, 집중한 구후영의 청각은 믿을 만하다.
'내 귀를 속일 만한 자가 있다면 어차피 무사하기 힘들다.'
자신의 귀를 속일 정도로 대단한 자라면 함정이든 아니든 피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자 구후영은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래. 장문검에 위험한 비밀이 있는지도 모르니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결국 풍애협에 가기로 결정을 내린 구후영은 봇짐에서 술을 꺼내 몸에 뿌렸다. 겨울이어서 독충 따위가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풍애협이 가까워질수록 뭔가 이상했다. 분명히 겨울이고, 천산은 워낙 겨울이 춥고 길기로 유명한데 푸른색이 군데군데 보였다.
'어쩌지?'
상상과 다른 광경에 구후영이 걸음을 멈추고 망설일 때.
"화산 검종 칠 대 제자 황상엽이 구후 장문께 인사드립니다."
약 이십 장 거리의 바위 뒤에서 연회에서 본 화산 제자가 나왔다.
"반갑소."
"따라오시지요."
말을 마친 황상엽이 구후영에게 등을 보이고 걸었다. 구후영은 귀로 갖은 기척에 유의하며 천천히 황상엽의 뒤를 따랐다.
"어디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한참 걸어 벼랑 근처에서 발길을 멈춘 황상엽이 질문했다.
"혹시 어제 연회에 화산파가 칠 대 제자들이 대표로 나온 것이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의문이 없는 건 아니었소."
"그건 장로와 사숙들이 부상이나 내상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풍애협에서 말이죠."
황상엽의 말에 구후영이 흠칫 놀랐다.
"마교랑 싸웠다는 말이오?"
"마교가 아니고 기관입니다. 풍애협에 낙화검법의 최종 오의가 있습니다. 갓 절정에 이르러서 운기가 불안한 저를 뺀 검종의 모든 제자가 그걸 찾으러 갔다가 하나같이 부상이나 내상으로 거동이 불편합니다."
"낙화문의 오의가 왜 천산에?"
"낙화문이 천산에서 시작한 문파니깐요."
뜻밖의 정보에 구후영은 머리가 복잡했다.
"날 여기 부른 이유는 뭐요?"
"검종이 험난한 길을 통과해 최종 오의가 있는 방 앞까지 갔는데,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문이 있고 열쇠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설마?'
"저희는 낙화문의 장문검이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원하는 게 뭐요?"
"방까지 가는 길의 모든 기관은 이미 파훼했으니, 셋이서 문을 여는 건 어떻습니까? 무당의 대장로 현현자와 동수를 이룰 정도인 구후 장문께서 저와 전 사형을 걱정할 일은 없고, 저와 전 사형도 현현자를 대하던 구후 장문의 흉금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잠시 고민해 보겠소."
"풍애협은 특이하게 겨울에도 따뜻해 독초가 만발하고 온갖 독충이 득실거립니다. 검종은 그간 꽤 큰 대가를 치러 길을 찾았습니다. 입구 위치도 혼자 힘으로 찾는 건 어려우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어렵다.'
구후영은 깊은 고뇌에 빠졌다.
황상엽의 말이 거짓일 때와 진실일 때. 일부가 거짓이고 일부가 진실일 때. 전부 진실이라고 쳐도 황상엽의 제안이 진심일 때와 함정일 때. 제안이 진심이더라도 끝까지 변심하지 않을 거란 믿음 혹은 장치.
'돌아가서 사부와 논의하는 게 낫겠다.'
임초현은 외모나 사제들의 평판과 달리 굉장히 섬세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다. 강호 경험도 풍부하여 머리만 좋은 구후영보다 훨씬 나은 선택을 할 가능성이 크다.
'정 안 되면 단 소저한테 자문해도 되고.'
배월교와 낙화문을 키움에 있어 서로 돕자고 약속했기에 이 정도 부탁은 괜찮다.
"마음을 정하셨습니까?"
구후영의 표정으로 뭔가 결정을 내린 걸 알았는지 황상엽이 한 걸음 다가오며 질문했다.
"돌아가서 태상장문 및 문파의 호법들과 상의하고 결정하겠소."
"구후 장문. 곧 강호에 대란이 입니다. 그게 아니어도 외부인이 천산에 대거 유입된 지금이 아니면 두 번 기회가 없습니다."
배산에게 다신 천산에 오지 않기로 약속한 걸 떠올린 탓에 구후영도 마음이 흔들렸다.
"게다가."
황상엽이 좌우를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를 한껏 낮춰 말했다.
"구후 장문께선 어제 절정의 경지에 드셨잖습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오?"
구후영은 자신이 절정의 경지에 든 것과 장문검으로 문을 여는 게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었다.
"제가 약 보름 전에 절정의 경지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잘 아는데."
구후영은 점점 낮아지는 황상엽의 목소리에 귀를 한결 기울였다.
"갓 절정에 들면 내공이 전부 사라집니다."
말을 마친 황상엽이 양손을 불쑥 내밀어 구후영을 공격했다. 구후영은 다급히 태극권의 야마분종으로 황상엽의 공격을 양쪽으로 흘렸다.
"흥!"
기습이 실패했음에도 황상엽은 당황하지 않고 어깨로 구후영을 공격했다.
구후영에게 매우 낯선 투로의 이 무공은 다름 아닌 추산공으로, 지저분한 초식들 때문에 대놓고 사용하기 그래서 근 수십 년간 화산 제자들마저 잊고 지내던 화산의 정통 무공이었다.
"억!"
추산공의 견파산肩破山에 가슴을 정통으로 맞은 구후영은 숨이 컥 막혔다.
"밑에서 기다려. 곧 갈 테니."
그런 구후영을 향해 황상엽이 내공을 잔뜩 실은 양 주먹을 내질렀다.
- 작가의말
절벽 + 비밀 + 배신 + 추락 = ?
Comment '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