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적금왕擒賊擒王
십보살일인十步殺一人
열 걸음에 하나씩 죽이니,
천리불류행千里不留行
천 리 길을 아무도 막지 못하네.
고요한 가운데 모닥불이 불찌를 터뜨리는 탁탁 소리만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일깨워줬다.
"흑철의 몸에서 나온 거다."
멍하니 모닥불만 쳐다보던 장선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꾸러미 하나를 헤쳤다. 안엔 온갖 잡동사니와 은자와 전표 그리고 책자 몇 개가 있었다.
구후영은 잡동사니를 무시하고 책자부터 살폈다.
"황금을 숨긴 곳들을 적어둔 것 같은데."
책자의 내용을 살핀 구후영이 고개를 저었다.
"자기만 알도록 지명은 모두 꼬아서 썼습니다."
"제게 주십시오.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야효의 칙칙하던 얼굴에 살짝 생기가 돌았다. 구후영은 고민도 없이 바로 책자를 야효한테 던져줬다.
"양 형. 내가 일자무식이라 그러는데, 같이 해보겠소?"
양달이 구후영을 잠깐 바라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방주께 나 같은 짐은 없는 게 나은 것 같으니, 소일 삼아 해보지."
단아의 부상 때문에 침울했던 야효와 생각보다 쓸모없는 자신의 실력에 실망했던 양달이 조금은 활기를 찾았다.
"그 꼬부랑글씨는 뭐냐?"
구후영이 가장 얇은 책자를 들자 장선이 넌지시 질문했다.
"천축어입니다."
"천축어?"
"내용은 모르지만, 제목은 저도 아는 글자입니다."
구후영이 잠깐 숨을 고르고 장선의 궁금을 풀어줬다.
"대수인의 비급입니다. 종이 상태가 양호하고 먹이 고른 거로 보아 원본은 아니고 필사본인 듯합니다."
장선이 눈을 반짝였으나 이어지는 구후영의 말에 곧 시무룩해졌다.
"이건 원경 형님한테 드려야겠습니다. 오대산에서 천축어를 공부했으니 해독할 수 있을 겁니다."
대수인의 비급을 품에 넣은 구후영이 마지막 책자를 펼쳤다.
"그것도 무공 비급이지? 모르는 글자가 많긴 한데, 내 느낌이 그래."
몇 장 빠르게 훑은 구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흑사장의 비급인데, 글씨체로 보아 흑철이 직접 적은 것 같습니다."
곤륜은 청해보다 더 서쪽에 있다. 곤륜에서 태어난 흑철 역시 독 선생처럼 요즘 글자보단 옛날 글자를 많이 사용했다.
그 탓에 장선이 모르는 글자가 많긴 했으나 웬만한 의원이나 선비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숙부께서 적당한 사람한테 전수하시지요."
흑사장은 흑 장로의 독문무공으로 이걸 전수한 제자는 흑철이 유일하다.
흑철이 죽어 이대로 소실될지도 모르니 전수자를 찾아 명맥을 잇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
새벽에 일어난 구후영이 눈곱을 뜯었다.
흑철의 죽음으로 기습에 대한 걱정이 가신 덕분에 오래간만에 푹 잤다.
그러나 일행은 아닌지 다들 자다 만 얼굴이었다.
"서두릅시다."
구후영의 검이 번뜩이며 나무들이 우수수 쓰러졌고, 야효와 장선이 비수로 가지를 쳤다.
그렇게 매끈하게 다듬은 나무들은 양달과 모용연의 도움을 받아 목책으로 탈바꿈했다.
"정말 혼자서 싸울 생각이야?"
군데군데 목책을 세워 화살 공격에 대한 대비를 마치고 쉬는 사이, 장선이 걱정스럽게 질문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구후영이 단단한 얼굴로 대답했다.
#
투멘은 사시 말쯤(오전 11시)에 수십 개 깃발에 둘러싸여 나타났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구나.'
구후영은 사흘에서 나흘 정도 버텨야 투멘이 모습을 드러낼 거로 예상했었다.
예상을 벗어난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병력도 이만이 넘어 보이는데.'
곧 양들의 번식기라 풀이 무성하고 물도 많은 곳으로 이동할 시기인데 이만 명이나 모일 줄은 몰랐다.
'할 수 있을까?'
장수를 잡으려면 말부터 쏘고, 무리를 상대할 땐 우두머리부터 잡아라.
구후영은 숲을 끼고 며칠 버티다가 투멘이 나타나면 죽일 예정이었다. 구후영이 이들과 철천지원수를 진 것도 아닌데 투멘이 죽은 상황에도 죽어라 덤비지 않을 거란 계산이 깔린 계획이었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에 자신감이 사라졌다.
"대화로 풀어볼까?"
그냥 이만 명이 모여도 위압감이 장난이 아닐 텐데 이들은 말을 타고 무기까지 들었다. 더구나 구후영이 혼자 싸우겠다고 해서 장선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숙부라면 이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열도 안 되는 무리와 협상하겠습니까?"
"미안하구나."
도움은커녕 헛소리로 사기만 떨어뜨렸다는 생각에 장선이 진심으로 사과했다.
"숙부께서 미안해할 일이 아니죠."
구후영은 고개를 살짝 돌려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잠에 빠진 단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불안하게 뛰던 가슴이 조금은 안정됐다.
'가자.'
당장은 원경도 단아도 생명의 위험은 없다. 그러나 내상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도질지 모르는 일이라 안심하긴 이르다.
망설이는 게 아니라 서둘러야 할 때다.
"다녀오겠습니다."
적이라곤 하나 얼굴 본 적 없고 그저 지시에 따르는 것뿐인 자들을 죽여야 한다는 것에서 오는 심적 압박.
이만이나 되는 무리를 상대로 싸워 이길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감.
어중이떠중이들이 유근을 건드려 경각심을 일깨우기 전에 먼저 도착해 해치우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대백산에 도착하기 전에 유근을 죽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에 대한 후회.
유근을 죽이고 바로 떠나지 않은 어리석음에 대한 원망.
구후영을 괴롭히던 수많은 감정이 일시에 깨끗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이보다 더 단단할 수 없는 필살의 의지였다.
#
"쏴라!"
구후영이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투멘이 외쳤고.
부웅.
가까이 있던 부하들이 분분히 목에 건 뿔나팔을 입에 대고 힘껏 불었다.
슈슝!
뿔나팔 소리와 함께 수백 발의 화살이 날아갔고, 곧이어 수천 발의 화살이 뒤따랐다.
팟!
구후영의 모습을 가릴 정도로 새까맣게 날아가던 화살이 갑자기 사라졌다.
"계속 쏴!"
군대로 무인의 무리를 상대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끊임없이 괴롭혀서 상대를 철저히 지치게 하는 것.
구후영에 관한 소문이 전부 진실이라고 믿진 않았으나, 투멘은 구후영을 사대신협 정도의 고수로 상정하고 상대하기로 했다.
또 날아오는 어마어마한 수량의 화살에 구후영의 검이 분주해졌다.
"쉬지 말고, 쏴!"
한 사람한테 쏟아붓기엔 과해도 한참 과한 화살 공격도 구후영을 어찌하진 못했다. 그러나 수천 명이 번갈아 가며 끊임없이 쏟아내는 화살 때문에 구후영은 급격히 지쳐갔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외공을 익힌 적 없는 구후영이고 아직 호체기공을 얻지 못했다. 흘리기엔 너무 양이 많고 피하기엔 공격 범위가 너무 넓어 검으로 막아내는 방법밖에 없는데, 숨을 쉬면 동작이 흐트러질 수 있다.
구후영은 화살 공격이 이어지는 내내 무호흡을 유지한 채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이게 너무 길어지니 체력이 달리는 건 물론이고 내공도 회복하지 못했다.
'선과 면이라.'
위기는 곧 기회다.
갑자기 들이닥친 위기는 구후영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선사했다.
흡!
숨을 크게 들이켠 구후영이 잠깐 멈췄던 검을 다시 휘둘렀다.
그러나 전처럼 직선을 긋는 게 아니라 적당한 크기의 원을 그렸다.
후!
시작이 있고 끝이 있던 직선과 달리 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돌았다. 덕분에 선 하나 그을 때마다 새로 운기하던 수고를 던 채 운기가 쭉 이어졌고, 숨 쉴 여유도 얻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구후영은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원 근처에 이른 화살들이 태풍을 만난 것처럼 원과 멀어지는 방향으로 궤적이 홱 틀린 덕분에 걸어도 괜찮은 상황이었다.
"저격을 준비해라."
투멘의 지시에 철궁을 든 자들이 앞으로 나서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확실한 기회를 노려라."
철궁으로 쏘는 강철 화살은 야장이 며칠 정성을 들여 단조한 것으로, 개중에서도 열에 여덟은 버려야 했다.
그 탓에 화살이 겨우 열한 발밖에 없었다.
'지금이다.'
원을 그리던 구후영의 검이 살짝 주춤했다. 갑자기 깨달음을 얻으며 동작이 흐트러진 건데, 시위를 팽팽하게 당긴 채 기회만 엿보던 명궁은 다르게 해석했다.
슉!
강철 화살 하나가 구후영의 가슴으로 쏘아졌다.
그런데 화살이 수백에서 수천 발씩 비처럼 쏟아지는 와중에도 눈 하나를 따로 빼뒀는지 구후영이 검으로 강철 화살을 건드렸다.
"억!"
명궁이 날린 화살은 가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돌아왔고, 자신을 날린 원주인의 이마 정중앙에 정확히 꽂혔다.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사내는 성공의 희열이 잔뜩 섞인 미소를 미처 거두지 못한 탓에 웃는 얼굴로 피와 뇌수를 뿜어냈다.
그에 투멘은 마음의 동요가 생겼다.
'호 선생이 오만 석의 식량을 약속한 건 다 이유가 있어서구나.'
오만 석이면 투멘을 따르는 부족 모두가 이 년은 먹고도 남을 양이다. 미리 오천 석을 받은 덕분에 호 선생이 약속을 안 지켜도 손해는 아니라고 여겼는데, 이제 보니 오만 석도 싼 대가인 듯했다.
"화살이 거의 떨어졌습니다."
이만 명 중 활을 든 자가 채 만 명이 안 된다. 그리고 활을 든 자들은 화살을 열 발에서 스무 발 정도만 소지한다.
어차피 시간이 오래면 습기가 차거나 마르면서 화살이 구부러져 못 쓰기에 많은 양을 들고 다니는 자가 없다.
지금은 사냥이 아니라 전쟁을 상정해 최대한 많은 양을 들고 오긴 했지만, 쉬지 않고 쏟아붓다 보니 벌써 동이 났다.
"양익을 돌진시킨다."
투멘의 진영은 전군과 후군 없이 중군과 좌우익만 있었다.
중군은 갑옷을 차려입은 투멘의 정예 중기병과 각 부족에서 차출한 가죽옷이나마 차려입은 자들로 채웠고 좌우익은 천 옷을 입은 그저 기병이었다.
투멘은 양익을 희생해 구후영의 체력을 빼기로 했다.
둥두두둥!
가까이 있던 부하들이 소가죽으로 만든 북을 두드렸다.
잠깐 무슨 지시인지 헷갈려 작은 소란이 일긴 했으나 곧 양익이 출동했다.
앞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쓸어버릴 것 같은 두 갈래 홍수가 구후영을 덮쳤다.
구후영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검을 축 늘어뜨린 채 바닥에 빼곡히 꽂힌 화살들을 밟으며 천천히 전진했다.
"어!"
두 무리의 경기병이 삼 장 근처까지 접근했을 때, 구후영이 갑자기 사라졌다.
슉! 슉!
동시에 강철 화살 두 대가 날아갔다. 명궁이라 불리는 자들은 눈이 다른 자들보다 훨씬 밝아 경공으로 빠르게 움직인 구후영을 놓치지 않았다.
틱! 탁!
매섭게 쏘아진 강철 화살을 하나는 검 면으로 막고 하나는 작게 휘둘러 쳐낸 구후영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다시 천천히 걸었다.
기회인 듯싶어서 빠르게 접근하려 했는데 무공을 안 익힌 자들이라고 쉽게 볼 게 아니었다.
일말의 불안감으로 여력을 남긴 덕분에 어찌어찌 화살 두 개를 모두 막아내긴 했지만, 단숨에 배불리려고 투멘을 덮쳤다간 몸에 구멍 두 개가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단, 몸서리친 건 투멘도 마찬가지였다.
'괴물이군.'
예전에 마교의 이인자로 불리는 흑철이 북원의 기마병과 싸운 적 있는데 이백 명 정도 죽이곤 도망쳤다.
흑철이 사대신협보다 반수 정도 처진다는 평가를 생각하면 현재 구후영이 보여준 모습은 그야말로 놀라웠다.
"투멘!"
그때 괴물이 포효했다.
"내년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포효를 마친 괴물이 느리나 꾸준한 걸음으로 전진했다.
- 작가의말
서두의 시는 이태백이 쓴 협객행의 한 문장입니다.
이태백은 당나라 유명한 시인일 뿐만 아니라 검객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검무를 추기 좋아했다고도 하는데, 당나라 검술 서열 2위라는 주장도 가끔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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