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양권법六陽拳法
소림에서 백팔나한진을 격파하고 별호가 다재수사에서 천강구절로 바뀐 천마는 무당으로 향했다. 물론, 그땐 아직 천마로 불리기 전이었다.
무당에 도착한 천강구절은 장삼풍에게 도전했고, 자신의 태극권을 실전으로 다듬으려는 생각에 장삼풍은 어린 후배의 당돌함을 전혀 나무라지 않고 흔쾌히 응했다.
천강구절은 장삼풍과 대결하는 과정에 육양권법을 만들었으나, 끝내 태극권을 이기지 못했다.
"야, 싸우자."
규찰대주가 구후영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나도 좀 쉬고 싶소."
"사내자식이 엄살 부리기는."
구후영도 규찰대주와 벌이는 대결이 안 반가운 건 아니다. 그러나 대결 요청이 하도 잦아서 얻은 깨달음을 정리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하루만 쉬면 안 되겠소?"
"안돼. 뭔가 생각났단 말이야."
저녁을 먹고 쉬려던 구후영은 어쩔 수 없이 규찰대주의 일곱 번째 대결 요청을 받아들였다.
"오늘 이 대결이 마지막이고, 더는 새벽에 자는 사람 깨워서 대결하자고 조르지 않겠다고 약속하시오."
"나 거짓말 싫어해."
무참한 거절에 구후영은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태극권의 기수식을 취했다. 규찰대주는 구후영이 자세를 잡기 바쁘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벌이랑 나비가 싸우는 거 같아."
둘의 대결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육양권은 주먹을 내지르고 거둠에 있어 직선만 고집한다. 태극권은 거의 모든 움직임이 곡선을 고집한다.
그 때문에 공격 일변도인 규찰대주는 독침을 세운 말벌 같고, 수비에 전념하는 구후영은 날개를 저어 침을 막는 나비처럼 보였다.
"야, 너도 공격 좀 하라니까."
"공격하는 법은 못 배웠다고 말했잖소."
하루에 적으면 예닐곱 번, 많으면 열 번 이상 대련한 덕분에 구후영에게도 여유가 생겨 대결 도중에 입이 열렸다.
"굳이 배워야 하나.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법도에 어긋나면 무공이 흐트러지오."
구후영의 말에 규찰대주가 훌쩍 뒤로 물러나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에 구후영이 슬금슬금 뒷걸음쳤다.
"아니야. 아직 안 끝났어. 기다려."
구후영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너, 그 자세 말이야."
고민을 마친 규찰대주가 불쑥 질문했다.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요?"
"태극권의 자세야?"
그제야 자신의 자세를 확인한 구후영이 머리를 갸웃했다.
'뭐지?'
구후영은 규찰대주와 대결할 때 늘 수비에만 치중했다. 그렇기에 수비적인 자세를 취함이 마땅한데, 현재는 공수를 겸비한 균형 잡힌 자세였다.
"맞아. 내가 짜증 난 게 바로 그거야. 언제나 공격할 것처럼 자세를 잡으면서 실제로 공격은 한 번도 안 했어. 그런 기만은 비열한 짓이고 상대에 대한 예의도 아니야."
규찰대주가 억지를 부리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어서 구후영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규찰대주가 한 말까지 무시하진 못했다.
'무릇 태극이면 원만해야 한다. 수비가 있으면 공격도 있기 마련인데.'
쇄악곡에 있을 땐 다른 문파의 절기라는 생각과 어서 떠났으면 하는 마음 때문에 적극적으로 배우지 않았다. 자세나 초식은 정학이 가르친 대로 곧잘 해냈지만, 무공 자체에 대한 고민은 깊지 않았다.
그런데 태극권의 고수인 현현자와 대결하고 태극권을 이기기 위해 만든 육양권과 대결하다 보니 온갖 의문이 떠올랐다.
"야, 일단 싸우자."
구후영이 오래 고민할 것처럼 보이자 규찰대주가 인내심을 잃고 공격을 재개했다. 구후영은 여전히 수비에 전념하며 자신의 자세를 유심히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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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좋은 꿈을 꿨는데."
잠에서 깬 규찰대주가 구후영을 째려봤다. 그에 새벽마다 규찰대주에게 단잠을 방해받았던 구후영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소."
"그래?"
규찰대주는 잠에서 깨며 치솟았던 짜증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기적을 맛보았다.
"당신이 태극권을 펼치고 내가 육양권을 펼쳐서 대결하는 건 어떻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일단 해보고 아니면 마는 거지."
규찰대주는 단순한 걸 좋아한다. 배산이 사라졌다는 말 한마디로 위험한 상황을 파악하는 머리는 있으나, 그 좋은 머리를 쓰기 싫어한다.
보름에 가까운 동행 기간에 그걸 절실히 깨달은 구후영은 말로 설득하는 대신 강짜를 부렸다.
"그래. 마침 잠도 깼는데."
둘은 일행이 자는 곳과 삼십 장 정도 떨어진 공터에 가서 대결을 펼쳤다.
"근데 또 두 명이 사라진 것 같소."
그간 곁눈질로 배운 육양권으로 열심히 공격하며 구후영이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단단하지 못한 놈들이 파도에 먼저 씻기는 거니까. 혈포규찰대는 떠나는 자를 잡지 않아."
규찰대주가 어설픈 태극권으로 구후영의 공격을 흘리며 대답했다. 규찰대주의 태극권이 어설픈 만큼 구후영의 육양권도 경지가 낮아 공수가 바뀌어도 여전히 동수를 이뤘다.
"그럼 자룡은 왜?"
그러려니 하고 흘리려던 구후영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규찰대주를 추궁했다.
규찰대주는 아차 싶었으나, 뱉은 말을 도로 담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미안하다."
규찰대주의 변명 없는 솔직한 인정에 구후영은 화가 불쑥 치밀었다. 규찰대주가 부린 강짜 때문에 청첩을 위조해서 배산의 연회에 참석했고, 거기에서 화산의 절정고수와 검을 겨루고 무당의 최고수인 현현자와 무려 내공 대결까지 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장문검의 비밀에 욕심을 부리다가 황상엽의 수작에 넘어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을 뻔했고, 목숨을 구한 전중광에게 속아 독에 죽을 뻔했고, 비급을 독차지하려고 욕심을 부린 화산 검종 때문에 진법에 죽을 뻔했다.
"어허. 미안하다고 했잖아."
화가 담긴 구후영의 주먹이 한결 빨라지고 매서워졌다.
"사내자식이 속이 좁기는. 그래, 사죄하는 의미로 아수라진의 수련에 널 끼워줄게."
살짝 열세에 처한 규찰대주가 협상을 시도했다.
"사람이 한 명이라도 많아야 효과가 좋아서 그러는 걸 모를 줄 아시오?"
규찰대주를 따르는 자는 이제 서른 명 정도 남았다. 천산을 떠날 때 이미 반이나 되는 마교 출신이 행렬에 끼지 않았고, 중원으로 가는 사이에 마음이 바뀐 자들이 하나둘 떠났다.
"너 평소엔 멍청한데 이럴 때만 똑똑하더라."
그때, 구후영이 갑자기 공격을 멈췄다.
"이번엔 또 뭐?"
"알았소."
말을 마친 구후영이 규찰대주를 무시한 채 모닥불을 피운 곳으로 돌아갔다.
"저 새끼. 내가 하던 거 그대로 돌려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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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은 조금 달라도 되니 호흡을 맞추는 것에 더 집중해라."
이동하는 중에 혈포규찰대는 수련 횟수를 세 번으로 줄였다. 새벽에 일어나서 내공 수련을 하고, 점심 먹기 전에 육양권을 수련하고, 황혼 무렵에 내공 수련을 했다.
구후영은 숨이 깊어 내공 수련엔 끼지 못하고, 육양권 수련에만 참여했다.
"좋아. 다들 잘하고 있어. 역시 정예만 남아서 그런지 실수가 전혀 없어."
성취는 재능이지만, 노력은 간절함이다. 아직도 남은 자들은 절실함이 남달라서 수련 도중에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일이 전혀 없었다.
구후영 역시 수련에 더없이 집중하며 곁눈질로 배워 어설펐던 육양권을 점점 훌륭하게 익혀냈고.
그 모습을 보는 규찰대주는 가슴이 타들어 갔다.
'이러다가 저놈한테 지겠어.'
그런데 다시 생각하니 진다고 딱히 나쁜 건 아니었다.
'저놈이 이기면 육양공이 승리한 셈이다.'
그제야 이번 대결의 모순을 발견한 규찰대주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자신이 이기면 태극권의 승리 때문에 기분이 나쁘고, 육양권이 이기면 자신이 져서 기분이 나쁘다.
'저놈이 노린 게 설마 이건가?'
"어?","어!","어어?"
잘 수련하던 사내들이 갑자기 멈추고 일제히 규찰대주를 쳐다봤다.
"대주가 틀렸다!"
누군가가 용감하게 외치자 사내들이 반사적으로 달려가 규찰대주를 쓰러뜨리고 발로 힘껏 밟았다. 눈치를 보던 구후영 역시 달려가 속이 시원하게 풀릴 때까지 규찰대주를 꾹꾹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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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대련은 없소."
육양권으로 우위를 점점 크게 점해가던 구후영이 갑자기 선언했다. 규찰대주는 화가 잔뜩 치밀었으나, 구후영이 말한 대로 무공을 바꿔 대련하면서부터 느끼고 배운 게 많아서 꾹 참았다.
"이유는?"
"쉬지 않는 수련은 학대에 불과하오. 그간 나나 대주나 다른 무공을 펼치며 뭔가 깨달은 게 있소. 그게 체화될 때까지 당분간 쉬는 게 좋겠소."
"하나만 대답해 줘. 나도 그간 깨달은 게 꽤 있는데, 왜 깨달은 거지?"
'아수라진의 문제점이다.'
아수라진과 육양권 모두 정공이다. 그렇기에 빨리 강해진다고 딱히 문제가 생기진 않는다. 그러나 노력과 시간에 비례하지 않고 빠르게 강해지는 일에 아무런 결함도 없는 건 이치에 어긋난다.
구후영 역시 빠르게 강해졌기에 여러 부작용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육양권은 어떤 무공이오?"
"세상에서 제일 간단한 무공. 주먹에 힘을 실어 가장 빠른 경로로 공격하고, 공격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최대한 빨리 주먹을 거둬들여 다음 공격을 이어간다."
"태극권은 어떤 것 같소?"
"잘은 모르겠는데, 그간 너와 대련하며 느낀 바로는 늘 상대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머리를 굴려야 하는 것 같더라고."
"육양권은 상대를 상관하지 않고 자기 공격만 하는 무공이고, 태극권은 상대의 공격에 대응하는 무공이오."
"그래. 내 생각도 그래."
"그런데 말이오. 무려 천마와 장삼풍이 만든 무공인데, 공격뿐이고 수비뿐일까?"
규찰대주는 눈을 연신 껌뻑이며 말을 아꼈다.
"우리가 잘못 익힌 거요. 육양권도 분명히 수비가 있는 무공이고, 태극권 역시 공격이 있는 무공이요. 단지 우리가 부족해서 공격 혹은 수비로만 익히고 펼치는 거요."
"좀 맞는 말인 거 같다."
"그래서 무공을 바꾸자고 한 거요. 공격적인 당신은 태극권을 펼치며 수비를 고민하고, 수비적인 난 육양권을 통해 공격을 고민하고. 이젠 그간의 고민으로 우리의 권법을 바꿀 시간이오. 그러지 않고 이대로 똑같이 대련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소."
"야. 우리 결의형제 하자."
구후영의 말을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던 규찰대주가 뜬금없이 제안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당신은 내 사부보다 나이가 훨씬 많소."
"나이가 뭔 상관인데."
"내겐 의결금란을 맺은 형님이 세 명 있소. 그러니 당신과 또 맺을 순 없소."
"괜찮아. 내가 일일이 찾아가서 설득할게."
"삼형은 도인인데, 현재 정학 진인 밑에서 태극권을 배우고 있소."
정학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규찰대주가 이마를 찌푸렸다. 구후영이야 무당 사람이 아니니 괜찮지만, 천마의 무공을 익힌 자로서 무당 제자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이형은 스님인데, 소림 제자요."
'제길. 무당의 말코에 고리타분한 땡중까지. 참 어울리는 조합이구나.'
의형제끼리 만나서 데친 채소를 놓고 물만 마시는 광경을 떠올리자 규찰대주는 의욕이 확 식었다.
"대형은 부자인데, 친척 중에 고관대작이 여러 명 있소."
"젠장. 그래. 없던 일로 치자."
땡중이나 말코는 어디까지나 그렇다고 쳐도, 응견鷹犬(관의 앞잡이)과 연루되는 건 죽어도 싫은 규찰대주였다.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말씀하시오."
- 작가의말
청빈 : 헥헥. 피가 부족해.
원경 : 헥헥. 술이랑 고기가 부족해.
왕제상 : 헥헥. 여자가 부족해. 기루로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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