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궁서고皇宮書庫
망포를 입은 유근이 탁자 앞에 앉고, 열 명의 환관이 양측에 시립한 영제궁靈濟宮의 서창 집무실을 미약한 촛불이 어둡게 비췄다.
"이게 사건의 경과입니다."
강창휘가 용 태감으로 부르던 어린 환관이 말을 마쳤다.
"그자가 북원의 간세인 건 어찌 알았느냐?"
"관외關外(장성 밖) 말투였고, 몸에 문신이 있었습니다. 놈들이 황궁에 침입해 구출한 걸 보면 예사 인물이 아닌 게 분명합니다."
"행방은?"
"이미 탈출한 거로 보입니다. 제게 경공술이 뛰어난 자 열 명만 주시면 기필코 흔적을 추적해 잡아 오겠습니다."
"됐다. 지금은 큰일을 도모할 때다."
심드렁한 얼굴로 용 환관의 요청을 묵살한 유근이 고개를 돌려 정 태감에게 질문했다.
"철혈방이 무당에 고개를 숙였다고?"
"그렇습니다."
"경과는 파악했어?"
"호북의 세력이 제멋대로 일을 벌여 타초경사 한 듯합니다."
구후영과 단아가 돌아다니며 양왕의 이름을 빌려 겁을 준 바람에 양양의 세력이 와해하다시피 했고, 누구도 나서서 책임지려 하지 않은 탓에 경과보고가 반년도 더 지나고서야 겨우 유근의 앞에 도착했다.
"육시를 해도 시원찮을 발칙한 것들."
유근은 진무관 건축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 충분한 은자가 호북에 풀린 다음 철혈방을 칠 생각이었다.
"철혈방이 무당에 고개를 숙이면 해결된 거 아닙니까?"
이립 정도로 보이는 환관이 말했다.
그에 유근이 탁자에 놓인 벼루를 집어 경솔하게 입을 연 수하 쪽으로 던졌다.
"멍청한 놈. 강호의 무리는 순서만 다를 뿐이지 모두 제거 대상이다. 철혈방과 무당이 서로 싸워 같이 죽어야지, 하나가 다른 하나한테 숙인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정 태감은 험악해진 분위기가 진정되길 기다려서 보고를 이어갔다.
"뒤늦게 올린 보고서를 봤는데, 꽤 그럴듯한 계획이었습니다. 마근이 중간에 욕심을 부린 바람에 일이 틀어진 듯합니다."
"무슨 욕심?"
"홍엽산장을 끌어들였습니다. 아무래도 금검당과 은도당의 사업을 삼키려 했던 것 같습니다."
정 태감의 말에 유근이 살이 잔뜩 찐 얼굴로 비웃음을 지었다.
"멍청하긴. 뱀이 코끼리를 삼키면 삼 년을 움직이지 못해 쥐새끼도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서 똥을 싸는 걸 모르나? 그건 그렇고, 요즘 구후영이란 이름이 너무 자주 들리는데? 마교의 일 역시 그놈이 망쳤다지?"
"마교는 표면적으로 구후영이 문제긴 한데, 실질적인 방해자는 신창 악불형입니다."
"신창이라."
유근의 얼굴에 수심이 깊어졌다.
"참으로 걱정입니다. 구후영이란 자가 폐하를 치료하면 호북 쪽은 더는 건드릴 수 없습니다. 마교는 새 계획을 실행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종남 역시 시기상조입니다."
"입을 조심해! 폐하께서 건강을 회복하시는 일보다 더 중한 게 어딨다고 함부로 망발이냐!"
"송구하옵니다."
정 태감이 허리를 푹 숙였다.
"폐하께서 건강히 일어나실 수만 있다면 내 목을 달라고 해도 웃으며 내주겠다."
유근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진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소신에게 묘책이 있습니다."
한껏 숙연해진 분위기를 깨며 용 환관이 나섰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입을 함부로 열지 말라는 분부를 잊었느냐!"
용 환관을 회의에 데려온 정 태감이 안절부절못하며 유근의 눈치를 살폈다.
"괜찮아. 지금은 옹알이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유근의 윤허에 어린 환관이 입을 열었다.
"마교, 종남, 철혈방 다 당장 손 쓰기 어려우니, 목표를 바꾸는 건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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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는 태후 마마의 전횡이 더 심해지겠어."
황후가 탄식했다.
"송구하옵니다."
공현이 머리를 연신 주억거렸다.
"공 애경愛卿(수하를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의 잘못이 아니다. 폐하께서 엄한 곳에 정신이 팔려 태후의 심복인 유근이 마음껏 날뛰게 한 게 문제의 근원이지."
현 황제는 태자 시절부터 황제 노릇은 뒷전이고 신선이 되는 데 정신이 팔렸다.
어의였던 신한천은 문화전의 비밀 문을 통해 정해진 위치에 책을 갖다 놓는 거로 당시 태자였던 황제가 연단술을 익히도록 도왔다.
신한천이 나중에 단전을 폐 당하고 쫓겨난 것도 십중팔구 죽을 선대 황제를 치료하지 못한 것보다 당시 태자였던 황제에게 연단술에 관한 서적을 구해준 것에 대한 벌이었다.
신한천이 후궁과 황족 대부분이 아는 남훈전의 문을 모르고 황제와 태자만 아는 문화전의 비밀 문을 아는 것도 현 황제와의 이러한 친분 덕분이다.
"그때 무리해서라도 유근을 처리하는 건데."
당시 태후의 비호 때문에 적극 가담자인 유근은 무사했고 신한천만 쫓겨났다.
"돈 좀 굴린 걸 들킨 게 그리 대단한 일입니까?"
태자가 전혀 이해 가지 않는 얼굴로 질문했다.
"유근이 마마와 전하의 약점을 잡았으니 운신이 더 어려워졌습니다."
공현이 말했다.
"그거 누구나 다 하는 일이잖은가?"
황후와 태자는 수중의 은자를 민간에 투자해 꽤 큰 이득을 봤다. 어차피 태후를 비롯한 대부분 후궁이 하는 일이고, 고관대작도 다수 연루되었기에 딱히 흠이라고 할 순 없다.
"태자 전하. 그리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오."
황후의 지적에 태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소자가 우매하여 어마마마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유근에겐 증거가 있으나, 우리 손엔 증거가 없소."
태후도 민간에 돈을 굴렸다. 그러나 관련 증거가 황후나 태자한테 없고, 태후의 사람인 유근은 황후와 태자가 돈을 굴린 증거가 있다.
"증거가 있다고 쳐도, 함부로 집안 어른의 허물을 까밝히면 유생들이 불효라고 질책할 거요."
"자의로 권력을 휘두르지 않은 아바마마와 달리, 소자는 타의로 권력을 잡지 못하겠군요."
"태자 전하는 분발하셔서 태후와 유근이 앗아간 황제의 권력을 되찾으셔야 하오."
이를 살짝 갈던 태자가 공현에게 질문했다.
"공 애경은 며칠 전 일로 유근의 목을 자르는 건 어떻게 생각하는가?"
공현은 황후의 눈치를 살짝 본 다음, 사실대로 말했다.
"태후 마마의 비호가 있으니 기껏해야 강창휘의 목을 자르고 대학사를 면직하는 거로 끝날 겁니다. 새로운 대학사 역시 태후 마마와 유근의 사람일 테니, 추궁하는 건 별 의미 없습니다."
"역모에 준하는 죄로도 유근을 어쩌지 못한단 말인가?"
태자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소신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유근을 탈 없이 처리하겠습니다."
그에 황후가 지시를 내렸다.
"공 애경은 동창을 장악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고, 유근을 제거하는 동시에 서창을 완전히 없앨 방안을 추진하게."
"명을 받듭니다."
"난 후궁들을 회유할 테니, 태자 전하는 유근을 제거하면 대신들이 서창을 없애자는 상소문을 올리도록 분위기를 조성하시오."
"그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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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목어림藏木於林 장인어시藏人於市라는 말이 있다.
숲에 나무를 감추면 보고도 알지 못하고, 사람을 군중 속에 숨기면 쉬이 구분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책을 숨기기엔 서고가 최고다. 그게 출입이 어려운 황궁서고라면 더욱더 그렇다.
"공자. 제가 서창의 비밀문서를 찾았습니다."
새벽에 음식과 물을 들고 황궁서고에 들어간 구후영에게 단아가 뜬금없이 말했다.
"서창의 비밀문서요?"
단아는 황궁서고에 들어온 첫날에 책을 어떤 방식으로 분류했는지 모조리 파악했고, 이튿날부터 분류 방식을 따르지 않은 책을 일일이 찾아내 확인했다.
덕분에 며칠 사이에 황제와 황태자의 심부름을 핑계로 서창이 몰래 숨긴 문서를 꽤 찾았다.
"강호편을 보면 철혈방과 홍엽산장에 관한 언급도 있습니다."
"어딨습니까?"
"따라오시죠."
황궁의 지하서고는 홍엽산장의 연무장 정도로 컸다. 그 큰 곳에 높이가 이 장에 가까운 책장이 빼곡히 줄 섰고, 책장마다 온갖 서책이 촘촘히 꽂혀 있었다.
'자칫하면 여기서도 길 잃겠다.'
구후영은 한가한 생각을 하며 단아를 따라 걸었다. 그러나 심장이 쿵쿵 뛰고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게, 태연하고 싶은 바람과 달리 본심은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마음을 가라앉히시죠."
"전 괜찮습니다."
"홧김에 문서를 훼손하거나 하면 문제가 될지도 모릅니다."
"주의하겠습니다."
단아는 신신당부를 마치고서야 비로소 구후영에게 문서를 건넸다.
천하대계天下大計 강호편江湖篇 서창극비西廠極秘
얇은 가죽을 재단해 씌운 책뚜껑에 내리 석 줄 써진 글씨를 본 구후영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서두르세요.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가야잖아요."
단아의 재촉에 구후영은 표지를 넘기고 안의 내용을 빠르게 확인했다.
화산과 무당을 지원하는 계획. 무당과 화산에 간세를 넣는 계획. 마교에 간세를 넣는 계획. 종남을 약화할 방법.
온갖 내용이 있었고, 중간쯤에 철혈방이 언급되었다.
'지독한 놈들.'
거기엔 철혈방을 와해할 계획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대략적인 계획을 확인한 구후영은 이를 갈며 책장을 빠르게 넘겨 홍엽산장이 나오는 부분을 찾아 읽었다. 덕분에 홍엽산장이 왜 수난을 겪었는지 똑똑히 알게 됐다.
'지시는 서창이 내리고, 실행은 은마단이 했다.'
이십 년 넘게 끈질겼던 건 일의 주모자가 서창이기 때문이고, 거듭 실패했던 건 실행자가 은마단이기 때문이었다.
은마단은 정체를 들켜선 절대 안 되기에 행사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거듭 실패하면서도 서창의 지시를 거스르지 못해 꾸준히 시도했다.
가짜 구후영이 나타난 이후 별다른 시도가 없었던 것도 서창이 홍엽산장이 철혈방에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해 추가로 지시하지 않은 덕분이다.
'죽은 네 대주를 위협해서 관의 표물을 털게 한 건 서창의 지시가 아닌가?'
생각이 여기에 미친 구후영은 바로 단아에게 질문했다.
"복장표국의 표물을 턴 것이나 작년의 일은 누구 지시인지 알아냈습니까?"
"안 그래도 그 부분이 의심스러워 수많은 문서를 읽어봤는데, 지금까지 찾은 문서들엔 어떠한 단서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단아가 잠깐 멈췄다가 신중히 입을 열었다.
"별도의 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찾아봐야겠지만, 감찰인지 뭔지 하는 자도 서창 소속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강호편뿐이 아니라 어떤 문서에도 감찰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구후영은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들을 털어버렸다.
"확실한 건,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해한 배후가 서창이란 거네요."
"유근. 서창의 창공廠公이 흉수입니다."
유근은 서창의 창공이자 장인태감으로 품계는 공현과 같다. 그러나 휘두르는 권력은 훨씬 강하다. 공현은 황후와 황태자를 모시는 환관으로, 현 황제가 죽고 황태자가 황위에 등극해야 비로소 위세를 부릴 수 있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야겠습니다."
"한두 끼 굶는다고 탈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너무 자주 내려오지 마세요."
단아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제가 기척을 듣는 귀는 누구보다 밝습니다. 그러니 들킬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나저나, 우호법은 왜 계속 저를 피하는 겁니까?"
무려 황제의 치료를 담당한 종오품의 태의가 상처를 치료한다는데도 완고하게 거절했고, 구후영이 음식을 들고 내려올 때도 늘 멀찍이 거리를 벌린 채 대화를 거부했다.
"글쎄요."
단아는 대답하면서 눈동자를 오른쪽으로 굴려 구후영의 시선을 피했다.
- 작가의말
- 열여섯 명이 죽었는데 사건의 진실을 파헤칠 생각은 아무도 없습니다. 중요치 않다고 여겨 무시하거나 이용 가치가 있는지에만 관심을 두죠.왜냐면 여긴 자금성. 여의도 국회의사당 따위는 우습게 보이는 곳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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