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고정신革古鼎新
무림대회가 소집됐고, 수십 개 문파에서 수백 명이 소림에 모였다.
이어서 구후영이 등장했고, 공유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고, 몇 번의 대련이 있었고, 중간에 설전도 있었고, 결국엔 백팔나한진마저 선보였다.
덕분에 평소보다 훨씬 긴 하루로 느껴졌는데.
여인이 등장하고 놀라운 진실이 연이어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또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른다고 한탄했다.
빠각.
원호의 볼기를 때리던 곤장이 뚝 부러졌다. 소금물에 담근 덕분에 더없이 질기지만, 원호의 호체기공護體氣功을 이기진 못했다.
"쉬지 마라."
원정의 재촉에 계도승들이 바로 물통에서 새 곤장을 꺼내 매질을 이어갔다.
컥.
곤장질이 백 대 넘었을 때 원호가 입으로 선혈을 토해냈다. 그에 계도승들이 곤장질을 멈췄고, 원정도 차마 재촉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멈추지 마라."
원호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계도승들이 이를 악물며 다시 곤장을 들었다.
퍽, 퍽, 퍽.
모진 고통에 원호는 어느새 기절했고, 계도승들은 목석이라도 된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곤장질을 무심하게 반복했다.
"숨이 끊어진 것 같소."
매질이 삼백 대에 가까워갈 때, 구후영이 입을 열었다.
그에 원정이 다가가 원호의 목에 손을 대고 맥박을 확인했다.
"태형을 마치지 못한 탓에 원호의 승적을 박탈할 수 없게 되었소. 그렇다고 이미 죽은 자에게 매질할 수도 없으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오."
원정이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원호의 승적을 유지할까 하는데, 반대하는 분 계시오?"
이미 죽은 자에게 죄를 더 묻기도 그렇고, 외인이 왈가왈부할 일도 아니라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다면 범계승犯戒僧 원호의 시신은 소림에서 화장하겠소."
승적을 박탈당하지 않았기에 원호는 파계승이 아닌 범계승의 신분으로 죽었다.
"이어서 전 반야당주 원철의 죄를 논하겠소."
계도승들이 원호의 시신을 수습하는 사이, 원정이 내공을 실어 외쳤다.
"원철은 강서와 복건 일대의 산채를 돌아다니며 삼백 명이 넘은 산적을 잔혹하게 학살했소. 소림도 악인을 벌하는 일엔 자비를 두지 않지만, 살인을 허락받은 건 계율원의 계도승뿐이오."
'뭐지?'
소림 스님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 원정이 무슨 짓을 벌이는지 궁금해했다.
"살인을 저지른 원철도 벌하고 싶으나 현재 주화입마의 중태에 빠진 점을 고려해 그저 승적을 박탈하는 거에 그치겠소."
"방장 사제. 소림의 일은 손님을 보내고 진행하는 게 좋지 않겠소?"
원호의 죽음으로 비통에 잠겼던 원병이 심정을 수습하고 원정을 제지하려 했다.
"공유 사숙의 죽음 역시 소림의 일인데 이리도 많은 손님을 모셨지 않소. 왜 원호 사형은 되고 난 안 되는 거요?"
조금 억지스럽긴 하나 원병이 더 반대하는 건 방장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소림 역사에서 방장이 된 스님 대부분이 나한당 당주 출신이었기에 더욱더 그렇게 보일 수 있다.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 괜한 오해를 만들기 싫었던 원병은 화를 삼키며 한발 물러났다.
"계율원 원주 원명은 소림의 재물을 횡령해서 속세의 가족에게 장원과 전답을 마련했소. 그에 그치지 않고 온갖 사치한 물건을 긁어모았소. 인정하시오?"
갑자기 화살촉이 자신을 향하자 계율원주가 기겁했다.
"아니, 그게 무슨."
"잘 생각하시오. 여기서 거짓말을 하면 부처께서 현신해도 그대를 구할 수 없소."
원정의 으름장에 계율원주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원로들이 물갈이하려나 보구나.'
원로들이 소림의 일에 개입하는 걸 막는 규정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무당처럼 장로들이 문파의 일에 시시콜콜 간섭하는 건 아니지만, 소림도 원로들의 영향이 지대하다.
"속세의 정에 끌려서 그만 실수했습니다."
원로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원명이 죄를 순순히 시인했다.
"잘못을 인정한 걸 봐서 재물을 회수하고 승적을 박탈하는 거로 그치겠소."
원정은 원철과 원명 다음으로도 십수 명의 죄를 폭로하고 일일이 승적을 박탈했다.
'숙청이 벌써 시작된 건가?'
지켜보는 사람들은 젊은 방장이 자신의 권위에 위협을 줄 만한 사형들을 제거하고 있다고 판단했고.
"이제 마지막 한 명만 남았소."
원정이 말한 마지막 한 명이 원병이라고 확신했다.
그랬기에.
"십여 년 전에 소림 주변에 산불이 연속 인 적이 있소.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수많은 생령이 도탄에 빠졌소. 그 방화범이 바로 나요."
뜻밖의 자백으로 사람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원정에게 승적을 박탈하는 벌을 내리겠소."
숨을 깊이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뿜은 원정의 얼굴이 한결 편해졌다.
#
"오정. 앞으로 나서라."
원정의 외침에 나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정. 내 말이 안 들리냐?"
그에 몇몇 스님이 코와 귀가 다른 사람의 두 배 정도로 큰 특이하게 생긴 스님의 등을 떠밀었다.
"네? 제자를 불렀습니까?"
떠밀려 나온 오정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질문했다.
"나는 방화의 죄를 저질러서 승적을 박탈하기로 했다."
"잘됐군요."
원정의 연이은 발표로 소림은 이미 상갓집 분위긴데, 오정이 거기에 부채질했다. 그 탓에 오정을 바라보는 스님들 눈에 언뜻 살기가 깃들었다.
"뭐가 잘됐다는 거냐?"
원정이 진지한 얼굴로 질문했다.
"잘못은 누구나 하는 거기에 딱히 흠이 아닙니다. 그걸 숨기는 게 흠이죠. 사숙께서 잘못을 인정하고 벌까지 달갑게 받겠다니 잘된 일 아닙니까?"
오정의 말에 원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방장 자리를 네게 물려줄 생각인데, 어떠냐?"
원정의 말에 연무장의 모든 시선이 오정에게 집중됐다.
그러나 수백 명이 숨죽인 채 자신만 바라보는데도 오정은 꿋꿋이 침묵을 고수했다.
"오정. 대답 안 하냐?"
기다리다 못해 인내심이 바닥난 원정이 재촉했다.
"방장 자리가 장난입니까?"
"응?"
"다른 자리도 아니고 소림의 방장 자리를 준다는데, 생각도 안 하고 대답합니까?"
오정의 당돌한 태도에 원정은 말문이 턱 막혔다.
'저런 놈인 줄 몰랐던 건 아니지만, 진짜 소림의 미래를 맡겨도 괜찮은 걸까?'
원정이 자신의 결정을 조금 후회하고 있을 때.
"진지하게 고민해 봤는데, 방장 자리를 받겠습니다."
"원병 사형. 반대하시겠소?"
원정이 고개를 돌려 원병을 바라봤다.
'저 눈빛은 뭐지?'
반대한다고 말하려던 원병은 원정의 눈빛에 망설임이 생겼다.
"아까 달마정에서 받은 서신을 생각하시오."
원병의 얼굴에 망설임이 스치자 원정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협박을 가했다.
'그러고 보니.'
소림은 일이 틀어지자 대결을 멈추고 달마정에서 한 선생과 다시 협상하려 했었다. 그때 이미 죽은 오득이 서신을 나눠줬는데, 거기엔 각자의 치부가 적혀있었다.
원호의 결정에 아무도 반대하지 않고 순순히 따랐던 건 역근경과 세수경을 얻으려는 욕심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치부가 밝혀질까 봐 두려웠던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왜 난 가만히 놔뒀지?'
원병은 멍청하지 않으나 두뇌 회전이 빠른 자도 아니다. 그 탓에 공유가 죽고 원철이 약관의 애송이한테 패한 지금 자신이 소림 최고의 고수가 되었음을 미처 자각하지 못했다.
옥무영과 원병의 대결을 원호가 걱정했던 이유와 마찬가지로, 원정 역시 소림을 대표하는 고수인 원병을 쫓아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반대하지 않겠소."
"현 방장이 비위로 승적을 박탈당한바, 방장 인계식은 약식으로 진행하겠소."
무림의 태산북두로 불리는 소림인데 하루 안에 원철이 패배하고 백팔나한진이 파훼되었을 뿐만 아니라 방장이 두 번 바뀌었다.
이 놀라운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음이 무거웠다.
'왠지 강호에 큰 풍랑이 일 것 같구나.'
사람들이 걱정하거나 말거나.
원정과 오정은 진지한 얼굴로 방장 인계식을 마쳤다.
"소림을 부탁하오."
누런 가사를 오정의 몸에 씌운 원정이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오늘 수많은 일이 있었소."
오정의 맑은 목소리가 연무장에 고르게 퍼졌다. 무공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공 경지는 절대 얕지 않은 듯해 새로운 방장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게 일었다.
"파계승 원철이 패배했소. 태극혜검에 졌다기보단 그릇된 마음으로 익힌 여래신장이 파탄을 보였다고 판단하오. 내 말이 맞소?"
오정의 눈길을 받은 구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얘기요."
"백팔나한진 역시 마찬가지요. 진안이 하나여야 하는데 둘이 되었고, 힘이 둘로 나뉘며 두 분께 각개격파 당했소. 내 말이 맞소?"
"맞는 얘기요. 백팔 명이 이룬 진법이어서 둘로 나뉘어도 괜찮을 듯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였소."
"구후 대협의 고견에 감탄하는 바요."
구후영을 칭찬한 오정이 잠깐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역근경과 세수경을 잃은 소림은 뿌리를 잃은 나무와 같았소. 지엽이 하도 무성해서 누구도 말라가는 걸 몰랐던 거요. 다행히 오늘 구후 대협을 비롯한 여러 의사義士 덕분에 썩은 부위를 도려낼 수 있었고, 부처님이 살피셔서 뿌리도 되찾았소."
오정의 말에 적지 않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오늘 일을 곰곰이 돌이켜보니 소림을 이리 만든 건 누구도 아닌 소림이었소. 소림 방장의 이름으로 오늘 일에 관해 구후 대협과 옥 대협과 원경 사숙을 비롯한 누구한테도 원한을 품지 않을 것을 천명하오."
오정의 결정에 사람들이 작게 환호했다.
"더불어."
오정이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소림 스님들을 둘러봤다.
"소림 방장의 이름으로 향후 삼십 년간 봉문封門할 것을 선포하오."
뜻밖의 말에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웅성거렸고, 소림 스님들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반대하오."
오늘 일로 소림의 체면은 바닥에 떨어졌다. 워낙 높은 곳에 있었기에 바닥에 떨어져도 꽤 높이 튕겨 오르겠지만, 무림의 태산북두 자리를 유지하려면 더 활발히 강호 활동을 해야 한다.
"반대한 사람은 누구요?"
오정이 얼굴을 짐짓 찌푸리며 질문했다.
"나한당 당주 원병이오."
그에 오정이 편한 웃음을 지었다.
"원병 원로께선 방장 사질의 결정을 왜 반대하십니까?"
'이런 젠장.'
그제야 오정에게 방장 자리를 물려준 원정의 속셈을 알아챈 원병은 주먹으로 바닥을 치고 싶었다.
"원병 원로께 다시 묻겠습니다. 원로께선 지금 방장의 행사를 간섭하려는 겁니까?"
"아니오."
오정이 방장이 되며 원자 항렬은 전부 원로가 되어 소림의 행사에 끼어들 권리를 잃었다.
거기에 반야당과 나한당, 접객원과 계율원 모두 당주와 원주가 정해지지 않았다.
즉, 현재 방장인 오정이 뭐라고 하면 그게 곧 소림의 결정이 된다.
'이따 보자.'
원병은 원정이 무슨 속셈으로 이런 짓을 벌였는지 꼭 캐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럼 이만 사숙과 사백들은 달마원 명부에 이름을 올리시고."
오정이 원정에게 눈길을 줬다.
"파계승들은 각서에 서명한 후 처분을 기다리시고."
원정과 눈맞춤을 마친 오정이 다시 손님들에게 합장했다.
"원로의 손님들께 미안하지만, 봉문한 소림을 당장 떠나주시오. 아직 접객원주가 정해지지 않아 멀리 배웅하지 못하는 점 양해 바라오."
- 작가의말
혁고정신 - 낡은 것을 고치고 새로운 것을 세우다.
소림 - 역사 유구한 대기업.
무당 - 덩치를 빠르게 불렸으나 창업주를 잃은 신흥 대기업.
종남 - 한때 잘나갔으나 정권 교체로 몰락한 대기업.
원병 : 반대하오. 오정이 방장 자격이 있다고 생각지 않소.
오정 : 비밀로 하려 했는데, 어쩔 수 없군. 난 나방신권을 익혔소.
원병 : 삼대신권에 속한 나방신권?
오정 : 그렇소.
원병 : 나한권을 12성까지 익힌 다음 천만 원짜리 강화템으로 강화할 때 0.1% 확률로 나타난다는 그 나방신권?
오정 : 맞소.
원병 : 과금 300억을 한 랭킹 1위도 얻지 못했다는 그 나방신권?
오정 : 그렇소.
원병 : 반대하지 않겠소.
원경 : 삼대신권이 뭐요? 내 금강인보다 더 강한 건가?
원병 : 나방신권, 북두신권, 그리고 오만원신권. 여기서 네가 이길 만한 무공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원경 :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군.
소림 파트를 마무리하고 재정비의 시간을 가질까 합니다. 자세한 건 내일 연재분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Comment '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