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강호難解江湖
어떤 이는 살았으나 이미 죽었고,
어떤 이는 죽었으나 여전히 살았다.
어떤 이의 삶은 깃털보다 가볍고,
어떤 이의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다.
강호에선 힘이 최고다.
명분, 강호만의 규칙, 인간의 도리.
입으론 이러한 것들로 구실을 만들지만, 살을 가르고 뼈대를 확인하면 강호에서 통하는 건 결국 힘이다.
하지만, 힘은 그저 강호에 통하는 것 중 가장 큰 것일 뿐.
전부는 아니었다.
'외통수다.'
그저 널리고 널린 문파도 아니고, 명에 들면서 명성이 거듭 추락했다곤 하나 여전히 중원에서 네 손가락에 꼽히는 종남.
그런 종남의 장문이 목숨을 던지며 거래를 요구했다.
화산의 명예는 별 가치가 없다. 이제 화산의 주인이 된 기종이라면 몰라도, 겨우 마흔 정도 숫자에 태반이 중상을 입은 검종이 내주는 건 동네 강아지조차 외면할 정도로 값없다.
소림의 환속승인지 뭔지 하는 자 역시 마찬가지다. 환속승이면 실력이 범상치 않겠지만, 강호에 유명한 자가 아니어서 딱히 구미가 당기진 않았다.
구후영을 이겼다는 얘기는 귀가 솔깃했다. 자세한 정보는 모르지만, 옥녀봉 꼭대기에서 나눈 대화를 떠올리면 최근 원철의 여래신장을 이기고 소림의 백팔나한진도 깬 듯하다.
거기에 천마의 제자라는 소문도 있어, 이 소식을 들고 마교로 돌아가면 민심을 안정하는 데 아주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북원과 맺은 약속을 깨기엔 부족했다.
막불위가 한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마교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 실패가 확정된 상황이고 어느 정도 희생을 치를 게 분명하더라도 북원이란 동맹을 잃지 말아야 한다.
여기까지가 머리로 계산한 결과다.
그런데.
막불위가 자기 목숨과 명예를 던졌다.
문파를 위해서.
앙숙인 화산을 위해서.
팔십여 개의 목숨을 위해서.
이는 머리로 한 냉철한 계산을 완전히 뒤집는 거대한 변수였다.
"움직이지 마시오."
어느새 다가간 옥무영이 막불위의 몸을 고정하고, 구후영이 침으로 지혈했다.
"바로 손 쓰면 살릴 수 있습니다."
상황을 살핀 구후영이 기쁨이 섞인 말로 소곤거렸다.
"그럼 협상을 빨리 끝내야겠구나."
옥무영은 화산 검종을 마교한테 던져주고 막불위를 살릴 방법을 떠올렸다.
화산은 옥무영이 삼십 년 가까이 몸담았던 무당의 잠재적인 경쟁자고, 종남은 옥씨 가문의 뿌리인 문파다.
굳이 둘을 비교해 하나를 고르고 자시고 할 일이 아니다.
막불위에 대한 인간적인 호감도 있고 해서, 옥무영은 자기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날 죽게 내두시오."
그때, 쿨럭이며 피를 몇 모금 토한 막불위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세운 모든 계획의 끝엔 나의 죽음이 있었소. 절대 날 방해하지 마시오."
말을 마친 막불위가 치료를 거부한다는 듯이 몸부림을 쳤다.
"사형! 꽉 잡아요."
막불위의 비수는 심맥에 꽂혔다. 팔이나 다리라면 점혈로 출혈을 줄이고 치료하겠지만, 심맥이어서 점혈은 오히려 막불위의 죽음을 재촉하는 꼴이다.
어쩔 수 없이 침을 꽂아 절맥의 술을 펼친 다음 치료해야 하는데, 막불위가 거부하는 바람에 어려움이 컸다.
"아니다."
옥무영은 막불위의 몸 대신 구후영의 손목을 잡았다.
"막 장문의 뜻에 따르자."
옥무영에게 잡힌 손목이 바르르 떨렸고, 손에 잡은 침도 덩달아 흔들렸다.
'뭐가 맞는 거지?'
구후영은 자신이 살기 위해 상대를 죽여야 함을 받아들였다. 굳이 상대가 먼저 검을 뽑지 않더라도 자신 혹은 소중한 사람을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일을 망설이지 않기로 맹세까지 했다.
흑철에게 원경이 상처를 입자 바로 마음을 독하게 먹은 것도 그 때문이고, 수십 명을 죽이면서 살기에 완전히 침습 당하지 않은 것도 그러한 마음가짐 덕분이었다.
그러나 잠시 다툼을 멈추고 정신을 차린 후 걷잡을 수 없는 후회가 밀려왔다. 다시 똑같은 상황이 오면 오히려 더 단호하게 상대를 죽일 거면서도, 마음이 괴로운 건 결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제안을 했고, 그 제안으로 옥녀봉 아래까진 죽은 사람 하나 없이 '평화롭게' 내려왔다.
'내가 너무 쉽게 포기했다.'
이 난관을 헤쳐 나갈 방법이 전혀 떠오르지 않아 심란했던 구후영은, 개울까지 가면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는 막불위의 말을 반겼다.
더 이상 고민하는 걸 포기한 채.
그 결과가 비록 몰락했다곤 하나 여전히 화산 위로 평가받는 종남의 장문이 자신의 목숨을 적의 전리품으로 바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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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의 침묵과 주시 아래 부상자들이 부축받으며 우선 개울을 건넜고, 멀쩡한 자들이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형."
끝까지 남은 건 코끝이 빨개진 막불손, 하늘을 보며 탄식을 거듭하는 옥무영, 표정을 가라앉힌 구후영 그리고 가는 숨을 겨우 이어가는 막불위였다.
"넌 이름이 막불손인데 늘 불손했다."
막불위가 눈 하나만 뜬 채 힘겹게 말했다.
"그렇다고 나까지 아무것도 안 할 수 없구나."
막불위는 자기 이름대로 자리에 어울리는 뭔가를 했다.
"옥 대협 일행을 자무산紫霧山까지 안내해라. 그리고 내가 남긴 안배를 따라라."
말을 마친 막불위가 숨을 몰아쉬다가 고개를 픽 돌렸다.
"형!"
쌍둥이 형의 죽음에 막불손 몸에서 살기가 넘실거렸다.
"이만 가는 게 좋겠소."
어느새 평온을 찾은 옥무영이 막불손의 어깨를 두드렸다.
"시신은."
"마교의 것이오."
옥무영이 냉정한 얼굴로 딱 잘라 말했다.
그때.
"막 장문의 시신은 종남에서 후장厚葬하시오."
용전향이 말했다.
"명교의 명성을 챙겨줘서 고맙고, 종남이 오늘 일을 마음에 너무 두지만 않는다면 명교는 계속 종남을 친구로 여기겠소."
"내가 종남을 대표할 자격은 없으나."
막불손에 앞서 옥무영이 나섰다.
"명교의 의견을 종남에 최대한 좋게 전달하겠소."
"손님이 폐를 많이 끼쳤소. 주인께 사죄하며 이만 물러가겠소."
말을 마친 용전향이 먼저 몸을 돌렸고, 마교의 무리가 용전향을 따라 미련 없이 떠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구후영의 가슴엔 온갖 감정이 몰아쳤다.
'아쉽구나.'
비록 숨이 끊어졌다지만, 곁에 안물이 있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라면 막불위를 멀쩡하게 살려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침밖에 없는 상황에 구후영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갈 길이 먼데, 우리도 이만 떠나지."
옥무영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막불위의 가슴에 꽂힌 비수를 뽑았다.
"형, 집에 가자."
울먹이며 말한 막불손이 바로 막불위의 시신을 들어 등에 업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이 물건을 나한테 줄 수 있소?"
구후영이 가리킨 건 막불위의 가슴에서 뽑은 비수였다.
"막 장문이 어떤 의지였는지 이걸 보며 곱씹고 싶소."
"보기 싫은 물건을 치워준다니 내가 오히려 고맙군."
허락이나 다름없는 대답에 구후영은 비수를 천에 감싸 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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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는 왜 물러갔을까?'
셋 모두 경공 고수다. 그러나 누구도 개울을 뛰어넘을 생각을 하지 않고 옷을 적시며 천천히 건넸다.
'왜 마지막 순간에 포기했을까?'
막불위가 말한 대로면 상황이 마교에 몹시 불리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막불위가 거짓말을 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에, 구후영은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최소 반나절은 더 대치할 거로 예상했었다.
"강호는 참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구후영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옥무영이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하는 강호는 이익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계산하기 편했지. 다툼은 늘 이권을 두고 벌어졌고, 그러한 다툼으로 이득을 얻는 게 누군지 알아내면 뭘 해야 할지 눈에 보였으니까."
'난 강호가 힘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철혈방의 문제에서 무당은 힘을 바탕에 깔긴 했으나 명분 따위에 집착하는 행태를 보였다.
소림 역시 힘으로 밀고 나오긴 했으나, 명분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다. 힘 대결로 몰아가며 난장판을 만든 건 소림이 아닌 구후영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목숨이 대가라면, 난 이러한 강호를 더 알고 싶지 않구나."
옥무영의 탄식에 구후영은 벼락 맞은 기분이었다.
'강호는 모든 걸 던지는 곳이다.'
뭔가를 차지하려고, 혹은 뭔가를 지키려고 자신의 모든 걸 던지는 곳이다. 심지어 자신이 갖지 못한 것까지 던져야 한다.
힘을 과시하고 명분을 쌓고 이익으로 자기편을 만들고. 목적을 위해선 결국 목숨까지 던져야 하는 비정하면서도 난해한 곳이었다.
'막 장문은 자신이 꼭 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했지.'
막불위가 임종 전에 한 말을 떠올린 구후영은, 그 이유가 뭔지 꼭 알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종남에 무례를 무릅쓰더라도.'
마음을 다잡은 구후영이 입을 열어 질문했다.
"사형께 여쭙겠습니다. 마교는 왜 순순히 물러난 겁니까?"
"졌으니까."
옥무영이 조금은 기운 차린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는 사이, 일행은 넓이로 봐선 강으로 불러 마땅하나 깊이가 얕아 개울이란 이름이 더 어울리는 하천을 다 건넜다.
"장문!"
종남 제자들이 꾹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고, 화산 제자들은 장로의 인솔 아래 일제히 막불위의 시신을 향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였다.
"마교가 졌다는 말입니까?"
구후영과 옥무영은 그런 자들과 거리를 두고 속삭여 대화했다.
막불위의 임종을 지키고 개울을 건너면서 어느 정도 심정을 수습했는데 다시 저 비통한 무리에 끼어 슬픔을 느끼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저들은 마교가 중원으로 돌아오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던질 각오였다. 자기들끼리는 어림도 없음을 알고 화산 기종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 같은데, 그게 무력한 발버둥임을 본인들도 모르진 않았을 거다."
"성공이 묘망한 일에 자신들의 목숨은 물론 무고한 자들의 목숨까지 밀어 넣었단 말입니까?"
애써 평온을 찾긴 했지만, 옥무영의 말에 화가 다시 치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셈이지. 그런 자들 앞에서 막불위가 자기 목숨을 던졌다. 마교의 사기가 어떻겠느냐?"
애막대어심사哀莫大於心死.
모든 희망이 사라져 마음이 죽는 것보다 슬픈 일은 세상에 없다.
"비수는 막불위의 가슴에만 박힌 게 아니지. 막불위는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마교에 절대 뽑을 수 없는 비수를 깊숙이 꽂아버렸다."
군룡무수群龍無首.
마교는 예전부터 여러 세력의 연합체였으나 교주라는 구심점이 있었다.
지금의 마교는 그러한 구심점 없이 모두가 인정하는 하나의 가치로 뭉쳤다.
그러나 교와 교도들을 위해 희생한다는 마교의 그러한 가치는 막불위 앞에서 무력했다.
"종남파 제일의 고수에 장문이기도 한 자신의 죽음을 무기로 휘둘러 마교의 마음을 완전히 꺾어버린 거지."
구후영은 마음으로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으나, 머리론 옥무영의 말에 백 번 수긍했다.
"그래서 말입니다."
구후영이 진지한 얼굴로 질문했다.
"오늘 제가 어찌했어야 맞는 겁니까?"
그에 옥무영이 서글픈 얼굴로 탄식했다.
"아까 말했다시피, 정답을 아는 데 목숨이 대가라면 난 그 답을 알고 싶지 않구나."
"그렇군요. 저도 평생 해답을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구후영이 탄식했다.
"강호는 그저 난해한 상대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 작가의말
1학년 - 대학은 어떤 곳일까?
2학년 - 대학은 이런 곳이구나.
3학년 - 대학은 대체 어떤 곳이지?
4학년 - 대학은 모르겠고, 회사는 어떤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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