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살일인不殺一人
인비성현人非聖賢 숙능무과孰能無過
모든 사람이 성현이 아닌데 누군들 잘못이 없을까.
지착능개知錯能改 선막대언善莫大焉
잘못을 알고 고친다면 어찌 훌륭한 일이 아니겠는가.
갑자기 불길이 거세게 일자 상황을 파악하려고 마교가 물러나며 싸움이 중단됐다.
그 기회에 옥무영이 외쳤다.
"동생, 괜찮은가?"
"네, 형님."
반 각도 안 된 사이에 수십 명을 죽인 구후영이다. 그러나 내공이 실린 소리는 떨림 하나 없이 평온했다.
그에 적과 아군 가리지 않고 모두 소름을 느꼈다.
"소림의 백팔나한진을 어떻게 깼는지 기억하는가?"
"기억나지 않습니다."
백팔나한진의 언급에 마교 무리가 크게 흔들렸다. 교주인 천마가 무림 최강을 자처하는 소림의 백팔나한진을 깬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겨왔기에, 천마의 제자라는 소문이 무성한 구후영이 백팔나한진을 이겼다고 하자 마음이 싱숭생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원철의 여래신장을 어떻게 파했는지는 기억하는가?"
옥무영의 연이은 질문에 화산과 종남의 사기는 무럭무럭 자랐고, 마교의 기세는 쨍쨍한 햇볕에 노출된 들풀처럼 쪼그라들었다.
"올바름으로 삐뚤어짐을 이겼습니다."
"그래. 이제 그만 옥녀봉을 떠날 생각이다. 죽이는 것보단 살리는 게 우선 아니겠느냐?"
"분부하십시오."
대화하면서 시뻘겋게 충혈됐던 구후영의 눈에서 핏기가 조금씩 빠져나갔다.
"앞장서라. 내가 왼쪽, 종남이 오른쪽, 화산이 뒤를 막는다. 다리가 멀쩡한 자는 중간에 가고, 거동이 불편한 자는 버린다."
구후영이 고개를 끄덕이고 앞장섰다. 그 뒤로 경미한 내상을 입거나 다리가 아닌 곳을 다친 자들이 따랐다.
원경과 강석은 어깨동무를 한 채 부상자 무리에 합류했다.
"넌 옥 대협을 도와라."
막불위와 종남 고수들이 오른쪽을 감싸고, 종남칠검은 왼쪽으로 가서 옥무영을 도왔다.
화산의 채 서른 명도 안 되는 무인이 후미를 자처했다.
합치면 삼백에 가깝던 숫잔데, 현재는 채 칠십도 안 되었다.
"가자."
옥무영이 건넨 봇짐을 어깨에 메고 검을 수납한 검집을 등에 멘 구후영이 평온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놈!"
화산과 종남이 이백이 넘은 주검을 옥녀봉에 남겼다면, 마교 역시 이백에 가까운 주검이 생겼다.
개중 삼 할이 넘은 주검을 구후영 혼자 만들었다.
당연히 원한이 없을 수 없고, 분노를 참지 못한 자들이 구후영을 덮쳤다.
청풍불류淸風拂柳.
구후영이 버드나무를 쓰다듬는 맑은 바람 같은 손길로 자신을 덮치는 자들을 오던 곳으로 온전히 돌려보냈다.
"제안 하나 하겠소."
단 하나의 초식으로 자신을 덮치는 자들을 모조리 돌려보낸 구후영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 쪽 사람 하나 죽으면 그쪽 사람 열을 죽이겠소."
'저딴 걸 제안이라고.'
마교뿐이 아니라 종남과 화산 제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대신, 우리 쪽 사람이 안 죽으면 난 그쪽 사람들에게 상처 하나 안 입히겠소."
"받아들이지."
용전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팽당을 이끄는 이대정이 반대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이 되오. 믿으시오."
백련교의 유복통과 한산동은 팽영옥과 사이가 좋았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서신으로 우정을 쌓았고 원나라 군대를 상대하며 서로 호응하던 아군이었다.
그렇기에 이대정이 백련교에 느끼는 감정 역시 나쁘지 않고, 내심 새 교주로 용전향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던 터라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일이 틀어지면 다 그쪽 책임이오."
그렇다고 고분고분 물러나지도 않았다.
용전향은 그런 이대정에게 고개를 작게 끄덕이곤 크게 외쳤다.
"암기든 독이든 상관없다. 모든 힘을 쏟아 구후영을 죽인다."
그제야 이대정은 구후영의 제안이 얼마나 황당한 건지 깨달았다.
"만에 하나 남은 자들이 우릴 공격하면, 지금 약속은 없던 게 된다."
잠시 둘러보면서 사람들이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길 기다린 용전향이 구후영에게 질문했다.
"약속이 성립된 거요?"
"그렇소."
구후영이 대답을 마치자 종남과 화산의 제자들이 뒤로 달려가 상처가 심하거나 다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한 자들을 등에 업었다.
"그럼, 시작하지."
말을 마친 구후영이 발걸음을 뗐고, 남은 사람은 무기를 단단히 잡고 경각심을 잔뜩 키운 채 뒤따랐다.
'원시천존이시여, 이대로만 가게 해주십시오.'
팽팽한 대치에 따른 거대한 압박감에 아무도 경거망동하지 못해 구후영이 편하게 걸음을 옮기던 가운데.
"놈!"
옥무영의 기원이 무색하게 마교 무인이 악을 쓰며 공격을 개시했다. 구후영은 짧은 보폭으로 연속 세 걸음 걷는 거로 상대의 도끼를 피한 동시에, 습격자의 발목을 잡아 마교의 무리로 던졌다.
"뭐야!"
바로 몸을 일으켜 구후영을 다시 덮치려던 습격자가 경악에 차 외쳤다.
"점혈?"
감각은 멀쩡한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은 탓이었다.
"발목을 잡았는데 무슨 수로 점혈을."
마교의 무인들이 분분히 떠들었다.
"독인가?"
구후영이 한 건 점혈이 아닌 절맥切脈이었다.
점혈은 중요한 혈도를 찍어 흐름을 원활치 못하게 하는 거로 상대의 운기 혹은 행동을 방해하는 수법이다.
절맥은 아예 맥 일부를 끊는 방식으로, 점혈보다 어려운 건 둘째 치고 엄청나게 비효율적인 일이다.
혈도 몇 개 찍으면 되는데 맥에 속한 최소 십수 개, 많게는 수십 개의 혈도를 찍어야 하니까.
하지만.
절맥이 점혈보다 나은 점도 분명하다.
혈도를 짚으면 맥을 따라 흐르는 기운들이 계속 혈도와 세차게 부딪치며 상해를 입힌다. 마치 잘 흐르는 강을 둑으로 막은 것과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맥 자체를 차단하면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즉, 점혈보다 절맥이 몸에 상해를 덜 준다.
게다가 점혈은 혈도를 정확히 찍어야 하지만, 절맥은 상대 몸에서 운기할 능력만 있다면 아무 곳에 손을 대도 된다.
이러한 이유로 무인들은 절맥이란 수법에 무지하며, 설사 알았다고 해도 익힐 생각이 없다. 혈도를 짚는다는 건 적대적인 관계란 뜻인데, 굳이 어려운 방법으로 상대를 배려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구후영도 치료에 쓰는 절맥의 수법을 생사가 오가는 싸움터에서 꺼낼 줄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잔챙이들은 빠져."
이러한 사정을 알 길이 없는 마교는 구후영을 대단한 고수로 판단해 무작정 공격하는 걸 멈췄다.
"혼자서 공격하는 것도 자제한다."
점혈과 절맥의 차이를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한 오판이긴 하지만, 대부분 침으로 하는 어려운 걸 구후영은 상대 발목의 곤륜혈을 통해 쉽게 해냈기에 아예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구후영이 성큼 걸음을 내디뎠고, 화산과 종남의 무리가 구후영의 뒤를 따라 옥녀봉 아래로 움직였다.
#
"이대로 지켜볼 거요?"
백련교와 팽당에서 자신이 고수라고 자부하는 자 수십 명이 손발을 맞춰가며 공격했다.
그러나 아무도 구후영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고, 하나같이 절맥의 수법에 당해 행동의 자유를 잃었다.
개중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부하의 등에 업혀 이동하며 용전향을 채근하는 이대정도 포함했다.
"내가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이해했소?"
"이해했지.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은가."
제안을 받아들인 덕분에 마교는 남은 칠십 명이 넘은 무인을 무시하고 구후영만 상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종남과 화산이 부상자들을 무리에 끼우면서 전력이 한층 약화됐다.
여기서 구후영을 죽이거나 큰 상처를 입힌다면 약속을 깨고 남은 자 전부를 도륙할 수 있다.
구후영이 꺼낸 최선은 마교 입장에서도 손해가 전혀 없는 훌륭한 제안이었다.
문제라면 구후영의 옷깃조차 건드리지 못한 채 뒤꽁무니만 졸졸 따르는 현실이었다.
"하나의 일에서 셋을 보고 열을 생각하라."
팽영옥이 남긴 말을 들은 이대정이 얼굴을 찡그렸다.
"빙빙 에둘지 말고 시원하게 얘기하시오."
팽영옥은 지혜로운 자로 명성이 자자한데, 후손을 자처하는 팽당의 무리는 무식하기로 혈포규찰대와 일등을 다툰다.
"난 사람을 보내 현재 상황을 다른 세력에 알렸소."
이대정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우린 구후영이란 자가 얼마나 강한지 직접 눈으로 봤지만, 다른 자들은 아니오."
"차도살인?"
팽당이 무식하긴 하나 백 년도 더 전에 죽은 팽영옥의 후광으로만 여태껏 버텨온 건 아니다.
"누가 죽든 이득 아니오?"
구후영이 죽어도 좋고, 약속을 깨고 다른 사람을 건드려 구후영 손에 경쟁 세력이 죽어도 좋고.
용전향 입장에선 전혀 손해가 아니었고, 당장의 일보단 아무런 상관도 없는 종남이 왜 끼어들었고, 구후영 등이 왜 여기 나타났는지, 흑철의 속셈이 뭔지 알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북원과 한 약속을 지키는 것도 문제다.'
북원이 움직이면 명의 군대도 움직인다. 그렇기에 북원 기병은 최소 삼 일 거리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즉, 마교는 관문을 차지한 다음 명나라 군대에 맞서 사흘 동안 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런데 고작 관문 하나를 차지하면 의미가 없다. 명나라는 오히려 다른 관문을 열고 장성 밖으로 나가 북원 군대를 요격할 것이다.
마교는 열 개가 넘은 관문을 동시에 장악해야 하며, 명나라 군대의 공격을 사흘 동안 버텨내야 한다. 아무리 고수가 많은 마교여도 이러한 군사 행동에는 자신이 전혀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종남과 구후영 등의 출현으로 화산 검종을 다 죽인다는 약속마저 못 지킬 상황이다.
"역시, 교의 미래는 용 당주한테 달렸소."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 줄도 모르고 기뻐하며 칭찬하는 이대정에 한숨이 나올 뻔했으나 꾹 참았다.
팽당이 예전부터 백련교를 지지하는 티를 내긴 했으나, 상황에 따라 언제든 변심할 수 있기에 비위를 거스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장사성이 몰락하며 명교에 투신한 염선방鹽船幇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적과 수적도 진저리를 친다는 암염상 출신의 후손들이어서 지독하기가 마교 최고다.
"우습지도 않구나."
용전향이 보낸 백련교 무인의 입을 통해 현재 상황을 전해 들은 염선방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바로 옥녀봉으로 달려왔다.
"그렇게 큰소리를 쳐놓고."
이번 일을 기획한 건 백련교다. 당연히 검종만 남은 화산을 쳐서 공을 세우는 것도 백련교의 몫이었다.
다른 세력들은 그에 불만이 꽤 컸으나, 강소와 절강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준다는 명분에 감히 반대할 수 없었다.
괜히 반대하면 충심으로 따르던 자들의 태반이 무리를 이탈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 용전향이 실패했다고 하자 염선방은 공을 세우기 위해 누구보다 급히 달려왔다.
"놈만 친다."
아쉽게도 용전향의 바람과 달리 용선방은 구후영만 공격했다. 처음에야 무작정 좋다고 달려왔지만, 여기까지 오는 기간 머리란 게 있으면 왜 이런 상황이 됐는지 생각할 겨를이 있었던 탓이다.
"상대를 죽이고 자신은 살 생각을 버려라."
염선방을 이끄는 자가 말했다.
"팔다리를 잘리고 상대 몸에 생채기 하나 내도 남는 장사고, 목숨으로 상대를 피 흘리게 한다면 그 역시 기뻐할 일이다."
살기를 날카롭게 다듬으며 명령만 기다리던 염선방 고수들이.
"죽여라."
허락이 떨어지기 바쁘게 생사를 도외시한 채 구후영에게 칼날을 들이밀었다.
- 작가의말
글 초반에 잘못을 고치는 건 훌륭한 일이라고 했는데, 여기 잘못은 구후영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구후영의 기지로 잘못된 상황이 바로잡힌 걸 말하는 겁니다.
예전에 불교에선 살인이 무조건 나쁘다는 식으로 표현했다가 댓글로 지적받은 적이 있습니다. 필력이 한참 부족하던 때라 툭 서술만 던지고 상황 연출이나 설명을 게을리한 탓이었죠.
그때를 떠올리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레 해명합니다.
이상, 쫄보 글쇠였습니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