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수라진阿修羅陳
소림의 자랑 백팔나한진은 사실상 십팔나한진의 변형이다.
소림 역사상 진나한眞羅漢 열여덟 명이 모여 십팔나한진을 펼친 일이 딱 한 번 있는데, 이들이 펼친 십팔나한진은 산을 허물고 폭포수를 거꾸로 흐르게 할 정도의 위력을 보였다.
당시 불심이 깊었던 소림은 살기가 너무 강한 진법이라고 여겨 봉인하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소림이 절간보다는 강호 문파가 더 어울리는 모습이 되었을 때, 십팔나한진의 봉인을 깼다.
그러나 기록에 적힌 경천동지한 위력은 없었다.
십팔나한은 각각 항룡·복호·소사·기상·좌녹·포대·파초·장미·환희·침사·과강·탐수·탁탑·알이·간문·개심·거발·정좌를 가리킨다.
단순히 무공 수준만 따지면 진나한의 기준에 부합하는 나한은 많았다. 그러나 진나한은 한 개 유파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말이지 그저 강한 나한에게 주는 칭호가 아니었다.
위력이 약하거나 실전에 쓸모가 없는 유파들이 사라진 바람에 소림은 십팔나한진을 펼치는 데 필요한 열여덟 명의 진나한을 모으지 못해, 나한 개개인의 무력은 예전보다 강한데 십팔나한진은 오히려 약해지는 우스운 상황이 되었다.
이에 소림사는 꽤 많은 심혈을 기울여 백팔나한진을 만들었다. 한 명의 진나한이 하던 걸 여섯 명의 나한이 힘을 합쳐서 하도록 융통한 것이다.
즉, 백팔나한진은 엄격히 말해 여섯 나한이 펼친 육합나한진 열여덟 개로 이뤄진 십팔나한진이다.
다재수사로 불리던 천마는 소림사를 방문해 백팔나한진에 도전했고, 백팔나한진의 비밀을 눈치챈 덕분에 육합나한진을 각개격파하는 거로 백팔나한진을 깼다.
그 과정에 놀라운 무재武才를 보여 천강구절이란 별호를 얻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천마는 백팔나한진을 모방해 아수라진을 만들었다.
백팔나한진처럼 수련에도 유용하고 실전에도 강한 진법은 아니지만, 수련 효과를 증폭하는 면에선 백팔나한진을 발아래로 봐도 될 정도다.
아수라진 덕분에 혈포규찰대는 짧은 기간에 무수한 고수를 배출해 천마가 종적을 감춘 지 몇 년이 지나도 마교의 다른 세력들이 함부로 못 움직이게 억제했다.
그리하여.
"자룡을 내 후계자로 키우던 중이다. 보내줄 수 없다."
규찰대주가 구후영의 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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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네 대주는 구후영이 자정이 지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자룡을 숨기고 일지봉으로 갔다.
공교롭게도 혈포규찰대가 마침 일지봉 근처에 도착했고, 우연히 자룡을 발견했다.
이들은 자룡을 묶은 밧줄을 칼로 베고 입을 막은 천도 뽑은 뒤 집이 어디냐고 상냥하게 물었다.
강호에 자자한 악명과 달리 혈포규찰대는 대체로 착했다.
문제는 자룡이었다. 혈포규찰대의 험상궂은 외모에 선입견이 생긴 자룡은 이들이 자신을 납치한 네 털보와 같은 편이고, 자신을 구하는 척하면서 호감을 사려 한다고 의심했다.
그러다 보니 상냥한 말투가 간사하게 들렸고, 걱정이 어린 얼굴도 가식으로 보여 일체 질문에 고개만 저었다.
이에 규찰대주도 오판했다.
자룡은 혈도를 짚이는 대신 밧줄에 묶였다. 규찰대주는 당연히 자룡을 묶은 게 무림인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묻는 말에 아무 대답도 못 하는 모습에 모자란 아이라고 여겼다.
더불어 덩치를 보면 힘깨나 쓸 거 같은데 버려진 걸 보면 웬만큼 멍청한 게 아니라고 판단했다.
얼굴이 험상궂고 몸이 우락부락해도 마음마저 그렇지 않은 규찰대주는 이대로 두고 가면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룡을 데리고 떠났다.
그 후, 긴 여정에도 자룡은 끝까지 입을 꾹 다물었고, 어찌하다 보니 혈포규찰대와 함께 천산까지 오게 됐다.
그 과정에 규찰대주는 자룡이 바보가 아님을 알았고, 근골과 근성이 마음에 들어 혈포규찰대에 가입하라고 꼬드겼다.
자룡은 강한 무공을 가르친다는 말에 홀라당 넘어가 깊이 생각지 않고 동의했다.
어떤 고난이 자신을 기다리는지도 모르고.
혈포규찰대의 수련법인 아수라진은 정공靜功 수련과 동공動功 수련으로 나뉜다.
정공 수련은 구후영도 본 적이 있다. 백 명이 넘은 사람이 모여서 함께 내공 수련을 하는 걸 말한다.
이때 들숨, 쉼, 날숨, 쉼이 일치해야 한다. 조금 어긋나는 건 괜찮지만, 크게 어긋나면 수련 효과가 반 토막 난다.
동공은 천마가 만든 권법을 수련하는데, 실전에 쓰기엔 별로나 수련 효과는 정말 좋았다. 동공의 경우는 조금 더 어려워서 호흡뿐이 아니라 동작도 일치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동작이나 호흡이 크게 다른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효과가 반감된다.
그렇기에 틀린 자는 사정 안 보고 힘껏 밟아주는 게 혈포규찰대의 전통이다. 이 때문에 혈포규찰대의 신입 중 구 할 이상이 열흘을 못 버티고 그만둔다.
자룡은 처음에 호흡을 못 맞춰 수련에 끼지 못했고, 며칠 지난 후엔 어찌어찌 수련에 꼈으나 끝까지 호흡을 유지하지 못해 매일 밟혔다. 그러나 포기하고 떠나기엔 아수라진으로 얻는 수련 효과가 어마어마하여 어떻게든 이 악물고 버텼다.
다행히 자룡이 굴리는 머리는 별로여도 머리 자체가 둔한 게 아니어서 몇 달 만에 수련에 적응했고, 그때부터 밟히기보단 밟는 일이 부쩍 많았다.
그러던 중, 규찰대주는 자룡이 아수라진의 핵심 역할을 할 자질이 있음을 발견했고, 후계자 수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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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일부러 날 애먹이는 건가?'
규찰대주가 자룡을 후계자로 키우기 시작한 건 형제가 다녀간 다음의 일이다. 그때 자룡이 형제를 믿었거나 형제가 유저라는 이름을 떠올렸다면 규찰대주도 순순히 보내줬다.
"자룡 아니면 안 되는 거요?"
"자룡이 제일 잘해."
"난 꼭 데려가야겠소."
구후영의 결심이 굳건해 보이자 규찰대주도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혈포규찰대는 본인이 싫으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조직이다.
핵심이 유도하지 않으면 아수라진은 효과가 없다. 아수라진의 호흡법을 아는 건 천마와 규찰대주 뿐이고. 그렇기에 이제껏 수련법의 유출을 빌미로 사람을 잡아둔 적 없다.
동생을 데려가려는 구후영을 막기엔 규찰대주에게 명분이 부족하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는 상대를 속일 수도 있으나, 거짓말하기 싫어서.
"네가 나보다 자룡을 더 강하게 키울 수 있음을 증명하면 놔주겠다."
강호의 방식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무공으로 이기라는 말이오?"
"말로 설득해도 되고."
규찰대주가 말로는 절대 설득당하지 않을 얼굴로 말했다.
'어떡하지?'
악명이 자자한 혈포규찰대의 대주가 구후영보다 약할 리 없다.
'어설프게 도전하면 안 된다.'
한 번의 승패로 판가름하자는 말은 없었다. 그러나 섣불리 도전해서 지기라도 하면 마음이 위축된다. 마음이 위축되면 상대의 공격이 더 강하게 보이고 상대의 허점이 함정으로 보인다.
원래 고하가 분명한데 마음마저 지면 가능성이 일 푼도 없다. 자룡을 어떻게든 데려가고 싶은 구후영이기에 신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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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하는 거 구경해도 돼."
자룡을 데려가는 일엔 몹시 단호했지만, 규찰대주는 구후영을 꽤 호의적으로 대했다.
"방해가 되는 게 아니오?"
중원에선 타인의 수련을 구경하는 게 금기다.
"괜찮아. 수련에 끼어들지 못하면 방해할 수도 없지."
규찰대주가 하도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구후영도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수련을 보면 마음이 바뀔지도 몰라."
구후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규찰대주가 이미 자리를 잡은 백여 명의 사내들 중간에 갔는데, 특이하게 규찰대주만 남은 자들과 반대 방향을 바라봤다.
"시작한다. 집중해."
백 명이 넘은 사내가 주먹을 내지르며 권법 수련을 시작했다. 이들은 똑같은 자세와 속도로 주먹을 내질렀고, 호흡마저 규찰대주와 똑같이 맞췄다.
'방해 안 된다는 게 이런 뜻이었구나.'
반 각 정도 지나자 규찰대주의 호흡에 맞추지 못한 자들이 풀 죽은 얼굴을 하고 나왔다.
그중에 자룡은 없었다.
'즐거워 보이는구나.'
자룡은 낙화문에 있을 때 운기에 실패했다. 그런데 아수라진을 이용해 수련하며 운기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축기와 연기도 아주 잘 됐다. 구후영도 경지가 일류에 이른 덕분에 자룡의 상황이 비교적 정확히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간의 사정만 캤지 자룡한테 나랑 함께 떠나고 싶은지 묻지 않았구나.'
자룡도 이젠 열네 살이다. 열여섯부터 성인으로 인정받긴 하나, 열넷이면 나라에서 장가가도 된다고 허락한 나이다. 딱히 검법에 재능을 보이지 못한 자룡으로선 혈포규찰대에서 수련하는 게 낙화문으로 가는 것보다 기꺼울지도 모른다.
'아니지. 일단 규찰대주를 이겨서 주도권을 쥔 다음 자룡에게 선택을 넘겨야 한다.'
규찰대주를 이겨야 하는 상황에 자룡한테 떠나고 싶은지 남고 싶은지 묻는 건 형이 돼서 동생에게 짐을 지우는 짓이다.
구후영이 규찰대주를 이겨 떠나도 남아도 되는 상황에 자룡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는 게 구후영도 자룡도 마음에 응어리가 지지 않는 최고의 선택이다.
마음을 정한 구후영은 규찰대주를 이길 방법을 고민했다.
'마교에서도 위명이 자자한 고수를 어떻게 상대하지?'
구후영의 이마가 풀리지 않는 고민으로 시종 찌푸려 있던 그때, 수련에서 빠진 사내 중 한 명이 구후영에게 다가왔다.
"조용히 얘기하고픈 게 있소."
구후영은 조용히 일어나 사내를 따라갔다. 사내는 수련 장소와 꽤 멀어지고서야 걸음을 멈췄다.
"동생과 함께 떠나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 방법이 하나 있소."
"무엇이오?"
구후영이 반가운 얼굴로 질문했다.
"혈포규찰대는 딱 두 명의 명령을 듣소. 하나는 천강구절이고, 하나는 배산 공자요."
"배산 공자가 누구요?"
사내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마교에 관해 아는 게 없군. 배산 공자는 천강구절의 장자요."
배산이 바로 장방선생한테 천마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던 장본인이다.
"배산 공자의 허락을 얻으면 동생을 데리고 떠날 수 있다는 말이오?"
"그렇소. 대주와 배산 공자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으니 부탁을 들어줄 가능성이 크오."
구후영은 상대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지 잠시 의심했지만,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어디 가면 배산 공자를 찾을 수 있소?"
"마교 총단. 백옥봉 중턱에 있소. 그러나 지금 가면 안 되오."
"이유가 뭐요?"
"아무나 찾아가서 만나고자 하면 만나주는 사람이 아니요. 사흘 뒤면 배산 공자의 아들이 한 살 되는 생일이니까 그때 찾아가면 막지 않을 거요."
"고맙소."
"자룡이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 거니까 고마워 안 해도 되오. 부디 가족끼리 모여서 잘 살기 바라오."
말을 마친 사내가 몸을 돌려 떠났다.
"무슨 얘기를 한 거요?"
둘의 대화를 멀리서 지켜보던 형제가 다가와 질문했다. 구후영은 배산 공자의 허락을 받으면 자룡을 데리고 나갈 수 있음을 형제한테 얘기했다.
"의원, 우린 사정이 있어 더는 함께하지 못하겠소. 대신 총단까지 가는 길을 자세히 알려줄 테니 잘 암기하시오."
"제가 모자라서 두 분한텐 계속 도움만 받는군요. 어찌 보답할지 모르겠습니다."
"보답은 무슨. 아는 사이끼리 서로 돕고 사는 게지. 좋은 결과가 있길 기원하겠소."
구후영은 형제가 알려준 마교 총단으로 가는 길을 열심히 외웠다.
- 작가의말
악의 구렁텅이 마교 총단으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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