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무정流水無情
사람은 각양각색이지만, 기준에 따라 쉽게 분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감정이 앞서 분노를 표출하는 데 집중하는 사람과 이성적으로 사고해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면 하나고 둘이면 둘인 단순한 존재가 아니어서 대부분 사람은 두 가지 모습 모두 품는데, 현재의 구후영은 후자에 가까웠다.
"다 끝난 듯한데, 방장의 생각은 어떠시오?"
구후영의 말엔 여러 의미가 있었다.
진법을 구성한 나한 대부분이 다쳤으니 백팔나한진의 시험이 끝났다는 뜻이고, 원경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거짓말이 들통났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만하면 포기하고 진실을 밝히라는 뜻도 포함했다.
"계율원주, 사칙을 어기고 봉마림에 함부로 들어간 원경을 나포하여 죄를 묻는다."
방장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구후영의 말을 무시했다.
"십팔동인진을 통과하면 무성의 칭호를 받거나 온전한 몸으로 소림을 떠난다고 하지 않았소?"
구후영이 아까 방장의 기습을 막을 때 뽑은 검을 들어 다가오는 계율원주를 가리켰다. 그에 계율원주가 굳은 얼굴로 접근을 멈췄다.
"원경이 십팔동인진을 통과했는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오."
"원경 스님이 봉마림으로 도주했다는 말도 방장이 하셨고, 나오는 길이 십팔동인진을 통과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말도 방장이 하셨소."
구후영의 반박에 방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는 망신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렵게 마음을 다잡은 방장이 다른 핑계를 댔다.
"백팔나한진의 시험을 통과한 자만 십팔동인진에 도전할 자격이 생기오."
"전시殿試에 합격했는데 향시鄕試를 통과한 적 없으니 관리가 못 된다는 말이오?"
향시는 지방에서 치르는 시험이고, 전시는 순천부에 가서 치르는 황실이 주관하는 시험이다.
향시를 통과해야 전시에 도전할 수 있기에 구후영이 말한 상황은 생기지 않지만, 더 어려운 전시에 합격했는데 향시를 통과한 적 없다고 자격을 박탈하는 건 약간 어불성설이다.
"세상엔 법도가 있고, 모든 일엔 절차가 있는 법이오."
방장은 먼저 백팔나한진의 시험을 통과한 다음 십팔동인진에 도전하는 게 맞는 순서임을 강조했다.
"그리 법도와 절차를 중시하는 분이 다짜고짜 나를 포박하려 하셨소?"
말을 마친 구후영이 기운을 키워 소림이 더 억지를 부리면 무력도 불사하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이게 무슨 기막힌 상황인가.'
백팔나한진이 깨지고 나한들이 대거 내상을 입은 것만 해도 커다란 수치인데, 원병이 기습하고도 겨우 옥무영에게 작은 내상만 입혔다.
게다가 지금 구후영이 대놓고 도발하는데 응하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천 년에 가까운 기간에 이보다 더한 수모를 당한 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때의 소림은 지금처럼 무림의 태산북두가 아니었다.
'원경까지 깨면 모든 게 끝난다.'
그때, 막다른 지경에 빠진 방장한테 구후영이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만 끝내는 게 좋지 않겠소?"
구후영은 소림에 따질 게 정말 많다. 소림의 행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상했고, 과정에서도 모순되고 이해 안 가는 부분이 허다했다.
그러나.
소림의 치부를 낱낱이 까밝힌다고 무림의 태산북두가 그대로 허물어지는 건 아니고, 구후영이 옳다고 해서 편이 생기는 건 아니다.
이번 일로 소림에 어느 정도 타격은 있겠지만, 달라지는 건 전혀 없다.
구후영은 처음부터 자신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거로 소림의 생각을 바꾸려 했고, 지금도 상대의 잘못을 밝혀 맞서는 대신 어떻게든 좋게 마무리하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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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기운이 경맥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심지어 같은 경맥이 아닌 다른 혈도로도 아주 자연스럽게 흘렀다.
그에 그치지 않고 기운이 몸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예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단전을 채웠다.
"소림이 원로들은 부르지 않겠지?"
황홀하면서도 편한 느낌에서 구후영을 끄집어낸 건 얼굴이 조금은 창백한 옥무영이었다.
옥무영은 구후영을 구할 일념으로 원병의 기습에 속절없이 당했지만, 육전신공 덕분에 작은 내상으로 끝났다.
아마 다른 심법을 익혔다면 지금보다 내공이 배로 많아도 즉사했거나 무공을 전폐할 정도의 깊은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땐 도망쳐야죠."
무당에 정학이 있듯이, 소림에도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원로 고수들이 있다.
그러나 구후영은 소림의 원로들이 아니라 원로까지 동원한 소림이 두려웠다. 사태가 거기까지 번진다면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구후영을 꼭 죽이겠단 뜻이다.
"단지 잘생겨서 그런 거라면, 내가 먼저일 텐데."
옥무영의 농에 구후영이 피식 웃었다.
"제가 소림에 십여 일 연금되어 지내는 동안에 지키는 사람은커녕 감시자도 없었습니다. 마치 내가 도망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말이죠."
"그건 확실히 이상하구나."
"애초에 내가 아닌 무당이 목표였다는 거겠죠. 혹여 내가 도주하면 그걸 핑계로 무당을 제대로 매질하려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나는 이러한 판단으로 나서서 소림과 무당의 충돌을 막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방해꾼이어서 치우려고 하는 것까진 이해하는데, 그것 때문에 무당의 혐의를 순순히 벗겨준 건 이상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방해꾼인 구후영을 치우려고 최종 목표인 무당을 놔주는 건 본말도치本末倒置의 어리석은 짓이다.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이 어리석을 리 없으니, 뭔가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원경 스님이 봉마림이라는 곳에 들어간 것도 이상하구나. 도주할 생각이었다면 왜 굳이 모습을 드러낸단 말이냐."
옥무영이 구후영의 의견에 맞장구쳤다.
"현영 진인이 생각납니다."
"공유 스님이 뭔가 태극혜검처럼 대단한 걸 남기셨단 말이냐?"
옥무영은 아까 잠깐 떠올렸다가 연이은 사건 때문에 잠시 묻어뒀던 가능성을 다시 끄집어냈다.
"저들의 눈을 보십시오."
옥무영은 원병의 탐욕과 원망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확인하곤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되돌렸다.
"왠지, 무섭구나."
그때, 긴 고민을 마친 방장이 입장을 확실히 밝혔다.
"구후 소협은 뭐가 찔려서 자꾸 끝내자고 하는 거요? 소림이 무림대회를 소집해 강호 동도들을 부른 건 억울한 자가 없도록 사건의 진실을 낱낱이 밝히기 위함이오."
원하는 대답이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구후영도 생각해둔 게 있었다.
"방장께선 진정 진실을 밝히길 원하시오?"
"당연하오."
"그렇다면, 우선 방장이 생각하는 진실을 듣고 싶소."
'교활한 놈.'
주장하는 바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부족하면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거짓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 지금처럼 입장이 엇갈리는 상황에선 먼저 주장하는 자가 불리하기 마련이다.
"진실은 생각으로 만들어내는 게 아니오."
"그렇다면, 원경 스님을 깨워 진실을 듣는 건 어찌 생각하시오?"
구후영이 장군을 외쳤다.
"좋은 생각이나, 작은 우려가 있소."
방장이 태연한 기색으로 응수했다.
"어떤 우려인지 들려주시겠소?"
"원경은 공유 사숙이 죽은 다음 매일 술로 세월을 보냈소. 사부를 시해한 사실을 인정한 것도 취중에 진담이 나온 건데, 술을 깬 지금 진술을 번복하지 않을지 우려되오."
"그건 쉬운 일이오."
옥무영이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원경 스님에게 술을 잔뜩 먹이고 질문하면 되지 않겠소?"
예상치 못한 조롱에 방장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차라리 방장도 함께 술을 마시고 진담을 토하는 게 어떻소?"
기세가 오른 옥무영이 한술 더 떴다.
"여긴 소림이오."
침묵하는 방장 대신 원병이 나섰다.
"어이쿠. 난 또 도축장인가 했지 뭐요."
말을 마친 옥무영이 한쪽 구석으로 옮겨진 죽은 돼지들이 실린 수레를 일별했다.
그에 연무장의 분위기가 조금씩 변화했다. 평소 소림과 가깝게 지내던 자들은 여전히 입장을 견지했지만, 그렇지 않은 문파들은 구후영과 옥무영을 응원하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쿨럭.
옥무영의 재치로 분위기가 조금씩 유리하게 바뀌던 그때.
기절했던 원경이 드디어 눈을 떴다.
"형님, 괜찮습니까?"
"속이 쓰리구나. 어디 꿀물 없느냐?"
전날 과음한 주정꾼 같은 모습에 웃음이 연신 터졌다.
"원경, 술은 깼느냐?"
방장은 구후영 일행에게 우호적으로 바뀐 분위기를 되돌리기로 했다.
"사형은 미망에서 깼습니까?"
그런 방장의 속셈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원경이 평소와 달리 아주 정중한 태도로 반문했다.
"미망에서 깼으면 벌써 부처가 되었겠지."
"미망에서 못 깨면 아수라나 나찰이 될 텐데, 사제의 걱정이 참으로 큽니다."
구후영과 원경은 오늘이 세 번째 만남이다. 앞선 두 번의 만남 모두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났기에 특별히 추억이랄 게 없었다.
덕분에 옥무영도 원경에 관해 들은 바가 전혀 없었는데, 알몸을 하고도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는 젊은 스님이 마음에 들어도 너무 들었다.
'친해지고 싶다.'
"세상 사람 모두 미망에 빠져 사는데, 아수라나 나찰이 되는 사람은 없지 않나?"
"그건 평범한 사람들 얘기죠. 역류이상逆流而上은 불진즉퇴不進卽退입니다."
흐름을 거스를 땐 나아가지 못하면 뒤로 밀려난다. 수행은 흐름을 거슬러 모든 것의 시작인 근원根源을 찾는 여행이다.
괜히 흐름에 밀려나고 있는데 자신이 잘 나아가고 있다고 믿으면 엉뚱한 곳을 근원으로 여기게 되며, 결국엔 마魔에 빠지고 만다.
'지금이다.'
방장은 술을 마시는 행위를 비난하는 거로 원경의 신뢰성을 깨뜨리려 했다. 그런데 원경이 상상했던 이상으로 훌륭히 대처하며 오히려 불심이 깊은 스님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대화가 길어지면 원경이 말실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구후영은 이만 본론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형님. 저들은 제가 준 검으로 형님이 자신의 사부를 시해했다고 합니다."
"방금 네가 한 말에서 내가 네 형이라는 거 빼면 진실이 하나도 없구나."
원경이 대놓고 방장이 했던 말을 부정하자 연무장이 크게 술렁였다.
원경이 거짓말하고 있는 거라면 그나마 괜찮은데, 원경의 말이 진짜고 방장이 진실을 호도한 거라면 그 여파가 만만치 않은 탓이었다.
"원경, 너는 약 열 살부터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스님이 지켜야 할 계율을 밥 먹듯이 어겼다."
방장의 말에 연무장이 술렁였다.
"그에 그치지 않고 사질들한테는 물론이고, 사형들한테도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기억납니다."
"수양이 얕은 동자승들에게 술을 먹이고 고기를 먹였고, 나한당의 건물을 세 번이나 불태웠지."
"그땐 사제가 철이 없었습니다."
"너는 사부를 시해했다고 인정했다."
그에 원경이 고개를 저었다.
"사부는 수명이 다했는데 이 못난 제자 때문에 억지로 버티셨습니다. 그러다 중독된 모자란 놈을 구하려고 목숨을 버리신 겁니다. 저 때문은 맞으나, 시해는 아닙니다."
"말을 바꿔도 소용없다. 네가 봉마림으로 도주한 건 어찌 설명할 거냐?"
도둑이 먼저 몽둥이를 든다고, 방장이 뻔뻔하게 봉마림을 언급했다.
"방장인 나와 계율을 수없이 어긴 너 중에서 누구의 말이 더 진실할 것 같으냐?"
옥무영이 겨우 바꾼 분위기가 다시 소림 쪽으로 확 기울었다.
- 작가의말
낙화유의落花有意 유수무정流水無情.
떨어지는 꽃잎은 호감이 있는데, 물은 그저 무심하게 흐른다는 말입니다. 마교에 갔을 때 신창이 낙화문 대신 유수문이라 한 것도 여기서 비롯했습니다.
어제 종일 잤습니다. 그나마 괜찮은 부작용이 걸려서 다행입니다. 그러나 약이 쌓이면 또 어떤 게 올지 몰라 약간 걱정입니다. 증상이 경미한 초반에 확 치료했어야 했는데, 이명을 듣고서야 뒤늦게 알아차렸습니다. 여러분은 몸이 주는 작은 신호를 무시하지 마시고 건강을 해치는 것들은 초반에 조져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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