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대회武林大會
당나라 시절의 이야기다.
조계종의 육조 혜능이 법성사法性寺에 갔는데, 마침 중들이 바람이 움직였는지 깃발이 움직였는지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에 혜능은 풍부동風不動 번부동幡不動 인자심동仁者心動이라고 하였다.
움직인 건 바람도 깃발도 아닌 너희의 마음이라고 일깨워준 것이다.
'오늘인 모양이구나.'
고요하던 마음에 바람이 깃들자 구후영은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옷을 차려입고 전대모검을 등에 멨다.
그러곤 밖으로 나가서 편한 자세로 방문객을 기다렸다.
"혹시."
문을 열고 들어오던 푸른 가사를 걸친 중년 스님이 구후영을 보고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빈승이 올 걸 미리 아셨소?"
십여 일 만에 찾은 접객화상이 안부 대신 질문부터 던졌다.
"기척을 들었소."
구후영이 대답했다. 그에 접객화상이 얼굴을 굳혔다.
"진짜요?"
"소림의 스님들은 부처를 모셔서 그런지 다들 신중하군."
구후영의 비아냥에 접객화상은 귀까지 빨개졌다.
"방장 사형께서 시주와 대화하려고 자리를 마련했는데, 지금 안내하겠소."
"어디로 가는 것이오?"
"천불전千佛殿이오."
구후영은 편한 모습으로 접객화상의 뒤를 따랐으나 마음만큼은 얼굴이나 걸음처럼 느긋하지 못했다.
'그간 고심해서 내린 내 결론이 정확할까? 괜히 일을 망치는 건 아닐까?'
구후영의 고민은 천불전 앞의 연무장에 도착할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제. 이리로 오시오."
옥무영의 부름에 고민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형이 온 걸 보면 내 추측이 정확하지 않더라도 얼마 빗나가진 않은 것 같다. 일단 밥이 되든 죽이 되든 그간 정한 대로 가야겠다.'
마음을 다잡은 구후영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옥무영의 부름에 화답했다.
"사형,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주는 빈승을 따라오시오."
구후영이 무당 도사들이 모인 쪽으로 방향을 틀자 접객화상이 팔을 내밀어 구후영을 제지했다.
"난 소림을 도우러 온 사람이지 죄인이 아니오."
대꾸를 마친 구후영이 고집스럽게 걸음을 옮기자 접객화상이 얼굴을 굳히며 구후영의 앞을 막아섰다.
"시주의 자리는 따로 마련했소."
구후영은 고개만 살짝 돌려 소림이 마련한 자리를 살폈다. 대놓고 죄인 취급을 한 건 아니지만, 수백 명이 둘러싼 가운데 앉히는 건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고 노력해도 나쁜 의미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내 자리는 알아서 찾겠소."
말을 마치기 무섭게 구후영의 신형이 흐려졌다. 접객화상은 상상을 초월한 경공에 깜짝 놀라며 다급히 구후영을 쫓았다.
그런데.
"이해해주셔서 고맙소."
구후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뭐지?'
접객화상은 태연한 얼굴로 제자리에 있는 구후영을 보며 입이 딱 벌어졌다.
'사람들 표정을 보면 저 청년이 안 움직인 거 같은데.'
차라리 구후영의 경공이 뛰어나서 제자리로 돌아간 거라고 하면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받아들이겠는데, 현재 상황을 보면 구후영은 가만히 있고 자신만 난리를 피운 모습이었다.
[그만하거라.]
놀란 나머지 굳어버린 접객화상의 귀에 방장의 전음이 울렸다.
[더 하면 망신이다.]
'제길.'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들 눈엔 접객화상이 구후영의 이탈을 막으려다가 짧은 대화를 나눈 후 길을 내준 거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접객화상이 구후영을 다시 막으면 소림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소인배로 비친다.
게다가.
'어차피 내가 저 청년을 막는 건 불가능하니 오히려 다행인지도.'
막고 싶어도 막을 실력이 없다는 생각으로 자괴감을 느낀 접객화상은 무당의 무리에 합류하는 구후영을 풀 죽은 얼굴로 일별하고 자리로 갔다.
"사제. 무슨 상황인지 알겠지?"
구후영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옥무영이 속삭였다. 소림 방장 정도의 고수라면 전음을 엿들을지도 모르기에 차라리 입을 오므리고 소리를 낮추는 게 훨씬 나은 대화 방식이다.
"상황은 모르나 나를 알았습니다."
구후영은 일지봉을 떠나 소실산으로 오는 길에 깨달은 게 있다.
'난 성현이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성현이 어찌할지 부처가 어찌할지 백날 생각해봐야 결국엔 내 생각일 뿐이다.'
구후영은 자신이 성현의 말씀에 따라 살았다고 생각했었고, 원각 역시 자신이 부처를 품고 산다고 생각하는 듯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구후영은 성현의 말씀을 핑계로 삼았고, 원각 역시 부처의 뜻이 아닌 본인의 의지를 관철하며 살았다.
"절에서 지내더니 고리타분한 냄새를 풍기는구나."
"그간 잘못 보셨군요. 전 어릴 때부터 고리타분했습니다."
둘이 속삭여 대화하는 사이, 누런 가사를 몸에 걸친 소림 방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덕한 몸으로 소림의 방장을 맡은 원호라고 하오. 다망한 중에 무림첩을 받고 무림대회에 흔연히 참석한 모든 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오."
방장의 말에 손님들이 잡담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이미 아시는 분도 계시고, 아직 모르는 분도 계실 거요. 달포 전에 공유 사숙께서 원적圓寂하셨소."
손님 중 대부분은 처음 듣는지 하나같이 놀란 표정이었다.
"공유 사숙께선 자신의 방에서 돌아가셨는데, 왼쪽 가슴에 검 하나가 꽂혀 있었소."
이어지는 말에 고요하던 연무장이 십일장이 열린 장터처럼 소란스럽게 변했다. 구후영 역시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소림 방장이 직접 말하니 느낌이 달랐다.
"흉수는 잡으셨습니까?"
누런 승복을 입었으나 삭발하지 않은 사내가 질문했다. 차림으로 봐선 소림의 속가제자 같았다.
"우문 사질이군. 아쉽게도 흉수의 행방은 묘연하나 불행 중 다행으로 단서는 있소."
방장이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이 우문현이 부족하나마 강남제일포두로 불립니다. 단서를 알려주시면 어떻게든 흉수를 찾아내 벌하겠습니다."
우문현은 개봉부의 포두다. 흉명을 떨친 악적을 여럿 잡아 백성의 칭송이 자자하며, 대명삼대포두大明三大捕頭로 불렸다.
"공유 사숙을 해치려면 어디 무명소졸은 아닐 거요. 잡아 벌하는 건 소림이 할 테니, 우문 사질은 흉수를 찾는 일까지만 도우시오."
방장의 말에 우문현이 바로 대답했다.
"보잘것없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악적을 찾아내겠습니다."
'미리 입을 맞췄구나.'
대단한 무공은 물론이고 불법을 깊이 깨달은 고승으로서도 존경받는 공유 스님이 피살됐다는 소식에 놀라 제정신이 아닌 대부분 사람과 달리, 정신을 똑바로 차린 옥무영은 방장과 우문현의 대화 흐름이 너무 작위적이라고 느꼈다.
"사제. 저쪽이 준비를 제대로 한 거 같은데, 마음을 단단히 먹어."
옥무영은 소림과 싸울 수밖에 없음을 예견했고, 일부러 장로들을 배제하고 사제와 사질들만 데리고 소림을 방문했다.
괜히 장로들까지 와서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 크게 충돌하는 것보단 젊은 옥무영과 배분이 상대적으로 낮은 제자들이 와서 적당히 져주는 게 무당엔 훨씬 이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림이 하는 작당을 보니 장로들을 안 데려온 게 딱히 잘한 일 같지 않았다.
"제 마음이 고요한데 바람이 분들 깃발이 나부낀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이놈은 왜 또 이러지?'
옆 동네 똥개 다툼을 보는 듯한 심드렁한 말투에 옥무영은 기가 찼다.
"공유 사숙의 가슴에 꽂힌 검의 손잡이와 가까운 검신에 천공교검 네 글자가 새겨 있소. 혹시 우문 사질은 누구 검인지 아시오?"
"견문이 짧아 들은 적 없습니다."
옥무영이 고심하는 사이, 방장과 우문현이 만담을 이어갔다.
"괜찮소. 다행히 검의 주인이 유명 인사라 쉽게 찾았소."
"누구입니까?"
"산서검룡으로 유명한 낙화문 장문 구후영 소협이오."
방장의 말에 연무장이 고요해졌다.
구후영은 황제를 치료한 의원으로 유명하여 아무리 소림이어도 함부로 건드리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무림대회를 소집한 건 뭔가 생각이 있어서일 테니, 다들 오늘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낙화문 장문이 흉수란 말입니까?"
"원호 대사. 빈도가 한마디 해도 되겠소?"
이대로 두면 속절없이 휘둘릴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옥무영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무당의 옥 장문이시군. 현 사안에 도움이 된다면 백 마디도 귀를 기울여야지요."
옥무영의 신분이 밝혀지자 신검의 유일한 제자가 어떻게 생긴 놈인지 궁금했는지 다들 목을 뽑고 고개를 돌려 얼굴을 구경하려 애썼다.
"천공교검이라면 작년 이월에 무당 해검지에서 분실했소. 당시 검을 지키던 사제의 호위가 독 묻은 비수에 당했고, 검을 훔치려던 자들도 열 명 가까이 죽었소."
"오, 그렇다면 무당은 보검을 훔친 무리가 누군지 아시겠군."
'내가 끼어들 걸 예상했구나.'
외통수에 걸린 기수棋手의 마음이 이해 가는 순간이었다.
"아쉽게도 검의 행방을 찾으려고 수십 명의 제자를 투입했으나,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소."
"소림과 달리 무당산 주변엔 사람이 별로 안 사는 거로 아오. 더구나 겨울에 분실했다고 하니 흔적 찾기가 어렵지 않았을 텐데, 정말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소?"
방장이 추궁했다.
"그게 문제였소. 겨울이어서 흔적이 오래 남아 어느 게 놈들의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었소. 사람이 살지 않아 목격자도 없으니 도무지 단서를 잡기 어려웠소."
'만만한 자는 아니구나.'
상대가 태극혜검을 핑계로 대면서 인력이 부족했다고 하면 일의 경중을 모른다고 비꼴 예정이었는데, 옥무영은 방장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다.
"공유 사숙을 해한 흉기의 주인은 옥 장문의 사제인 구후 소협이고, 검을 분실한 곳은 무당 해검지요. 소림이 구후 소협이나 무당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가진 단서가 이것밖에 없어서 그러는 거니, 오해하지 말았으면 하오."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무작정 오해하지 말라고 하진 못하겠소."
구후영과 무당이 오해받을 상황이니 오해하는 걸 이해한다는 말이면서도, 소림이 일부러 오해가 생기게끔 상황을 몰아가는 걸 따끔하게 지적했다.
"이해한다니 다행이오. 그럼 우선 검을 분실했는지 확인하는 게 어떻소? 검을 분실한 게 사실이고 되찾은 적도 없다면 구후 소협은 일단 혐의에서 제외할 수 있지 않겠소?"
"확인이 어렵소."
가만히 듣고 있던 구후영이 불쑥 끼어들었다.
"검을 분실한 걸 증명할 사람은 내 호위와 무당 해검지를 지키던 제자들이오. 당연히 방장께선 믿지 않으실 테고."
"증언에 모순됨이 없으면 당연히 믿지 않겠소?"
"아니오. 내가 그간 접한 바론 소림은 솔직하게 말해도 곧이곧대로 믿으려 하지 않고 늘 의심했소."
구후영의 비난에 방장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게다가 소림이 믿는다고 쳐도, 검을 되찾지 못했다는 걸 어찌 증명하오? 무당이 검을 못 찾았다고 하고 나도 검을 찾지 못했다고 하면 방장은 곧이곧대로 믿으시겠소?"
방장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통찰력이 뛰어난 걸까. 아니면 화나서 마구 뱉은 걸까?'
구후영과 무당이 뭐라고 주장해도 증거를 대고 증인을 대라고 계속 닦달할 생각이었는데, 구후영이 이렇게 대놓고 얘기할 줄 몰랐다.
"어차피 나나 무당은 의심받는 처지니 무슨 말을 해도 핑계밖에 더 되겠소? 차라리 방장께서 누굴 흉수로 의심하는지 밝히시고, 그게 타당한지 검토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오."
- 작가의말
깃발이 나부꼈다 - 현상(고전물리학)
바람이 불었다 - 원인(고전물리학)
마음이 움직였다 - 인식(양자물리학)
"공유 사숙께선 자신의 방에서 돌아가셨는데, 왼쪽 가슴에 검 하나가 꽂혀 있었소."
“무슨 소리요? 검이라니?”
소림 스님들이 방장의 말에 크게 반발했다.
“왼쪽 가슴에 분명히 검이 꽂혀 있었잖은가.”
스님들이 단체로 반박하자 방장이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설마.”
옥무영이 입을 뗐다.
“방장의 속세 이름이 지은탁이오?”
“아니. 내 속세 이름은 은교요.”
방장이 대답했다.
위 내용은 드라마 도깨비를 본 사람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Commen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