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은고검灌銀古劍
하얀 눈이 세상을 통치하려 들자 강직한 소나무가 나서서 푸르름으로 저항했다. 다들 눈과 소나무의 싸움에 숨죽이고 있을 때, 어느새 가지를 뻗은 매화가 하얀 꽃을 피운 채 차가운 바람을 조롱했다.
여전히 하얗고 춥지만, 아늑히 먼 곳으로부터 봄의 기운이 다가옴이 느껴지는 늦겨울의 어느 날.
안문도에 귀인이 강림했다.
불과 몇 달 전에 은자 한 냥으로 마보를 품은 망아지를 산 전설의 그분이었다.
추운 겨울이어서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적고 마시장도 문을 닫아 인적이 드문데도 용케 소문이 퍼졌다.
"또 오셨군요."
"명인의 검이 몇 자루 있소? 내가 다 사겠소."
구후영을 맞이한 야장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폈다.
구후영의 치료를 받고 이틀 정도 쉰 일행은 바로 남으로 움직였고, 중간에 순천부에 들러 보석 일부를 팔아 은자로 바꿨다.
한 곳에서 너무 많이 풀면 제값을 못 받는다며 일부만 팔았는데도 두둑이 벌었다. 다른 일행은 응천부와 소주부와 항주부 그리고 서안부까지 돌며 남은 보석을 처리할 거라고 했고, 구후영은 빨리 문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따로 움직였다.
형제가 알려준 대로 관도로 보정부에 갔다가 방향을 서쪽으로 꺾어 길을 따라 쭉 걸었더니 오대산에 도착했다. 오대산에서 의형제를 맺은 원경을 만나려 했지만, 아쉽게도 외출하고 없었다.
하루 쉬며 피로를 푼 구후영은 군사들이 사용하는 길을 따라 한 눈 안 팔고 걸은 덕분에 안문도에 무사히 도착했다.
"바로 사람 보내서 검을 가져오겠습니다. 최고급 용정차도 곧 올리겠습니다."
"명인을 뵙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겠소?"
"아무렴요. 바로 말씀 전달하겠습니다."
검이 먼저 도착했다. 구후영은 검을 일일이 확인해 가격을 흥정했다. 유일검법을 배우면서 검 휘두르는 법을 더 명확히 익힌 덕분에 검을 보는 눈도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기본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예전과 달리 검을 몇 번 휘두르기만 해도 어느 게 나은지 확실한 느낌이 왔다. 구후영은 어려운 초식을 익히는 데만 정신 팔지 말고 기본 수련에 좀 더 공을 들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자네가 날 보자고 했는가?"
흥정이 거의 끝날 무렵 명인이 등장했다.
"두 가지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구후영은 우선 침통을 꺼냈다. 일부는 부러져 없고 일부는 흘려서 침이 부족했다.
"서역 장인이 만든 침이라고 합니다. 혹시 같은 수준으로 새로 만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침을 구부려 탄성을 확인하던 명인이 입을 열었다.
"굳이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야 하나? 더 잘 만들 수 있는데."
"그렇다면 최고 품질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괜히 치료할 때 침 부러지고 그러면 안 되지. 얼마 필요한가?"
"일단 세 통 만들어 주십시오."
"세 통이면 사흘 정도 걸리겠어. 사람 구하는 훌륭한 물건이니까 은자 서른 개만 받겠네."
명인이 만든 검 한 자루가 최저 서른 냥이었던 걸 떠올린 구후영은 속으로 한탄했다.
'성현들이 아무리 훌륭한 말씀을 많이 하면 뭐 하나. 세상이 그렇지 않은데. 그래도 언젠간 검보다 침을 많이 찾는 날이 오겠지?'
"또 뭐 있는 건가? 부탁이 두 개라고 하지 않았나?"
"이 검에 검집을 만들어 주십시오."
원래 검집은 이동하던 중에 결국 깨졌다. 검날이 하도 예리해서 구후영의 검은 현재 천으로 감싼 다음 가죽으로 감싸고, 쇠로 만든 커다란 도집에 넣었다.
"검 이리 줘보게."
구후영의 검을 받아 모양을 살피던 명인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이거 어디서 난 건가?"
"우연히 얻었습니다."
"이거 진나라 이후 제작 방법이 사라진 관은검 같은데."
"관은검이요?"
명인은 검을 몇 번 휘두르고 구후영에게 돌려줬다.
"이 검이 꽤 긴데도 무척이나 가볍지? 속이 비어서 그래. 그런데 그저 빈 게 아니라 안에 은을 넣었거든. 그래서 휘두를 때마다 은이 움직여."
"은이요? 그런데 왜 소리가 안 납니까?"
"은자 만드는 그 은 말고 수은水銀을 말하는 거야. 쇠보다 두 배 정도로 무거운 놈이지."
수은은 구후영도 안다. 독의 한 종류로 모르고 먹으면 무게 때문에 창자가 뚫려 고통스럽게 죽는다.
"우리 야장은 수은도 쇠의 한 종류로 쳐. 다루기 까다로워 다들 기피하는 바람에 관은검을 만드는 법은 누구도 몰라."
"관은검은 왜 만드는 겁니까?"
명인이 허허 웃었다.
"자네 무인 아닌가? 왜 쇠 두드리는 늙은이한테 묻는 건가?"
"그냥 쇠 잘 두드린다고 명인인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남과 다른 뭔가를 이뤘으니 명인으로 불리는 거겠죠. 후배가 염치없이 한 수 가르침 부탁합니다."
"허허. 눈에 정기가 넘쳐서 올곧은 놈인 줄 알았는데 혀에 기름을 발랐어."
명인은 구후영의 손에서 다시 검을 받아 갔다.
"자. 이렇게 들면 수은이 손잡이 쪽으로 오겠지?"
명인이 검 끝을 위로 향하게 하고 말했다.
"자루가 무거운 검은?"
"변화에 능하다."
"자. 내가 지금 찌르기를 펼치겠네."
명인이 천공교검으로 허공을 찔렀다.
"나야 힘밖에 없으니 이 정도밖에 안 되지만, 무인이면 훨씬 빠르겠지?"
구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공이 얼마 없는 구후영도 방금보다 몇 배는 빠른 찌르기를 펼칠 수 있다.
"이때도 수은이 손잡이 쪽으로 몰리지. 그럼 어떻겠어? 찌르는 중에 경로 바꾸기가 조금은 쉽겠지?"
구후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휘두를 때는 수은이 검 끝으로 가. 검 끝이 무거우면?"
"휘두름에 힘이 실린다."
"기록에 따르면 관은검을 잘 다루는 자들은 검의 변화가 신귀막측神鬼莫測(신과 귀신도 예측하지 못함)했다네."
명인의 설명을 들은 구후영은 별안간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명인께선 관은검을 만들 수 있습니까?"
"방법을 알면 만들 수 있지. 속을 어떤 형태로 비우는지와 수은을 얼마나 넣는지만 알면 그깟 게 뭐가 어렵겠나."
"혹시 이 검을 해체해서 관은검 만드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습니까?"
"수은 무게를 정확히 재야 하는데, 그거야 뭐 양을 비슷하게 하고 여러 개 만들면 되지. 하나 정도는 제대로 되지 않겠어?"
얼핏 무책임한 말처럼 들리지만, 명인의 자신감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열 자루 만드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나도 모르지. 한 자루 만들면 감이 확실히 잡힐 텐데. 내가 다른 일 다 팽개치면 대략 두 달 안에 어떻게든 해낼 것 같네."
곁에서 경청하던 야장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중원에 이름을 떨친 명인 앞으로 삿된 것을 물리치는 벽사검 제작 주문이 잔뜩 들어왔다. 만약 고집불통인 명인이 관은검인지 뭔지 하는 신기한 물건을 만드는 데 정신이 팔리면 납품 날짜를 모조리 못 지킬지도 모른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진짜 괜찮은가? 이거 임자 만나면 은자 이만 냥도 받을 거 같은데."
이만 냥이란 말에 구후영은 입술이 바짝 말랐다.
'재능이 부족해도 관은검을 들고 유일검법을 열심히 수련하면 일류 정도 실력까진 무조건 이른다. 특히 외공을 익힌 자가 들면 위력이 더 강하다.'
자신은 물론이고 동생도 내공 수련이 신통치 않다. 가난한 문파라 자질이 출중한 제자를 많이 받지 못해 낙화문의 궐기가 요원하다.
그런데 관은검이란 괜찮은 해결책이 나타났다.
구후영은 그깟 이만 냥보다 문파의 미래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열심히 설득했다. 생각 밖으로 구후영이 재물에 집착이 강한지 설득이 어려웠지만, 결국엔 뻣뻣한 고개를 억지로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누가 봐도 안 괜찮은 얼굴이었다.
"젊은 친구가 대단하군."
명인이 감탄하며 검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구후영은 물론 야장들도 일거리를 놓고 명인을 따라갔다.
도제들도 구경하고 싶으나 감히 그러진 못하고 안타까움에 발만 동동 굴렀다.
대장간에 들어간 명인은 허리띠를 고쳐 묶은 후 표주박으로 구석의 단지에서 술을 가득 퍼 입에 넣은 다음 망치와 모루에 반씩 뿜었다.
실질적인 도움이 있는 건 아니고 그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습관적으로 하는 의식 같은 거였다.
"이걸 부러뜨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 달궈서 하면 수은이 증기가 돼서 빠져나갈 테니 절대 안 되고."
혼자 중얼거린 명인이 망치를 들고 정신을 모았다. 그러다 갑자기 기합을 지르며 망치로 검을 힘껏 내리쳤다.
검은 멀쩡했고 망치에 작고 하얀 흠이 났다.
'무인으로 치면 절정의 경지다.'
구후영은 눈을 뜨고 있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뇌리엔 온통 명인이 망치를 휘두르는 모습뿐이었다.
'검에 이를 때 힘이 최고조에 달한다. 내공 없이 육체로 내는 힘의 한계치다.'
구후영의 머릿속에선 유일검법의 기본 기술들과 낙화검법의 온갖 초식들이 마구 엉켜서 날아다녔다.
"자네. 자네!"
"네?"
"계속하다간 내 아까운 망치만 부서지겠어. 이건 세상 누가 와도 못 부수니까 그냥 자네가 쓰게."
구후영이 검법에 정신이 팔린 사이 명인은 세 번이나 더 시도했고, 망치에 흠집 세 개만 추가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침이랑 검집을 부탁하겠습니다."
"알았네. 글피에 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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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가지가 허공을 갈랐다.
'아니야.'
구후영은 명인의 망치질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이틀째 밥도 거른 채 방에 박혀서 나뭇가지만 휘두르는 중이었다.
'이것도 아니야.'
천공교검은 너무 예리해서 자칫 실수하면 벽이고 침상이고 다 맹수 발톱에 뜯긴 먹잇감처럼 너덜너덜해진다. 균형도 엉망인 나뭇가지가 마음에 안 들지만, 검을 받길 기다리기엔 구후영의 마음이 너무 조급하다.
'답은 책에 있다.'
나뭇가지를 바닥에 버린 구후영은 유일검법과 낙화검법을 꺼내 자세히 정독했다. 똑같은 글자에 똑같은 구절이지만, 예전에 볼 때와 느낌이 달랐다.
'결국 수련이 답이다.'
뭔가 깨달음을 얻어 단번에 명인의 휘두름과 같은 경지에 이를 방법은 없다. 천고의 기재라면 또 모를까.
구후영은 빨리 가는 것보다 느리게라도 멀리 가는 게 낫다던 성현의 말씀을 떠올리며 조급한 마음을 달랬다.
'동생이 돌아갔으니 괜찮겠지?'
동생이 납치되어 구하러 간다는 쪽지를 남긴 게 늘 마음에 걸렸던 구후영이다. 괜히 자신과 동생 때문에 사부가 표행도 버리고 찾아 나설까 봐 걱정이었는데, 자신이 출발하자마자 동생을 돌려보냈다고 하니 마음이 놓였다.
사부가 구후영을 더없이 믿기에 동생만 무사하면 굳이 중요한 일까지 팽개치고 찾으러 나서지 않는다.
'그런데 돌아가면 또 벌을 받는 게 아닐까?'
이번엔 명인의 검 열세 자루에 은자 수백 냥은 물론, 처분하지 않은 보석까지 있다. 게다가 낙화검법의 예전 검법서도 찾았고 은자 이만 냥짜리 검도 있다.
아무리 엄한 사부라도 이 정도면 그냥 봐줄 것 같았다.
'문파 건물을 새로 짓고 영약도 잔뜩 사들이고. 사숙들도 더는 표행에 안 나서도 되고. 사제들도 봄가을 농사를 도우며 푼돈을 안 벌어도 되고.'
상상만으로도 좋았다.
'유일검법은 자룡더러 익히라고 해야지. 운기가 안 돼서 외공을 익히기로 했으니 잘됐어. 덩치도 나보다 클 테니 천공교검을 들면 금방 고수가 될 거야.'
- 작가의말
관은고검 - 수은으로 속을 채운 옛날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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