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심위상功心爲上
성을 공략하려면 문을 열든가 아니면 성벽을 무너뜨리든가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호 선생의 단단한 입을 열려면 마음의 문을 열든가 마음을 무너뜨리든가 해야 한다.
구후영과 홍기영은 그에 관한 대책을 미리 세워두었다.
"마마, 대장군 홍기영이 신의 구후영을 대동하여 배알을 청하옵니다."
구후영은 새벽에 위종과 문서들을 태운 가마를 메고 가마꾼의 신분으로 황궁을 나갔고, 다시 구후영이 되어 황궁에 입성했다.
"어서 모셔라."
황후는 대신들에겐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를 받으나 군부엔 별 영향력이 없었다. 비록 홍기영이 이름뿐인 대장군이지만, 지금이건 태자가 등극한 다음이건 실권을 손에 꼭 쥐고 싶은 황후로선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홍기영이 마마를 뵙니다."
"구후영이 마마를 뵙니다."
"어서 몸을 일으키시오. 어제 꿈에 봉황이 나오더니 이리도 귀한 분들을 만나고자 했던 거였소."
"봉황을 보면 천하에 태평성세가 열린다는데, 확실히 세상의 기운이 대명과 마마를 돕는 듯합니다."
말주변이 평범한 홍기영을 대신해 구후영이 나섰다.
"오호. 구후 신의가 그저 안부나 물으려고 오진 않은 모양이오."
"마마, 저와 홍 장군을 믿을 수 있다면 주변을 물리쳐 주십시오."
황후는 잠깐 고민하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늙은 환관들이 궁녀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구후영은 그러고도 마음을 놓지 못해 내공을 풀어 말소리가 밖으로 안 퍼지게 차단하고서야 본론에 들어갔다.
"신의의 얘기가 정녕 사실이오?"
주먹에 너무 힘준 나머지 정성들여 기른 새끼손가락의 손톱이 부러졌지만, 황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놈들이 공 태감을 해친 걸 이미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공 태감의 시신을 어찌 처리했는지 캐내기 전에 놈이 독단을 삼키고 자결했습니다."
"어찌해야 하는 거요?"
"모든 환관과 궁녀를 모아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역용술로 변장한 자들을 모조리 잡아낼 수 있습니다."
황후가 시퍼런 얼굴로 연달아 명령을 내렸다.
'대단하구나.'
황제나 황태자의 형편없음과 비교하니 군대를 불러 황궁을 포위하고 금의위를 불러 황궁 전역을 통제하는 결단을 순식간에 내린 황후가 한결 대단해 보였다.
그러나 구후영의 감탄과 달리, 황후 역시 어쩔 수 없는 처지였다.
유근의 죽음으로 황태후가 몰락했듯이, 공현의 죽음으로 황후 역시 몰락할지도 모른다.
그저 공현이 죽은 거라면 다른 심복을 장인태감 자리에 앉히면 되겠지만, 이번 일은 역모죄에 해당하는 거라 황제와 황태자는 물론이고 황태후까지 참견하러 들 게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황후의 목소리가 작아질 수밖에 없고, 운 나쁘게 황태후의 사람이 장인태감이 되는 순간 모든 전세가 역전되고 만다.
황후로선 어떻게든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번 일을 해결하는 거로 발언권을 키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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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를 뵈옵니다."
"오호, 구후 태의의 근기根基가 훨씬 두터워졌군."
분명히 역모와 관련한 일임을 들었을 텐데도 황제는 아무런 긴장감 없는 얼굴로 나타났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그러나 왜 귀찮게 구냐는 심통 난 얼굴로 나타난 태자와 비교하면 황제는 양반이었다.
태자가 어려서부터 황제를 한심해하며 명군의 꿈을 키워왔던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구후영 등의 인사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태자가 자기 자리에 궁둥이를 붙였다. 그러나 마치 밑에 가시라도 있는 것처럼 들썩이는 것이, 마음은 이미 다른 데 가 있는 모습이었다.
"태후 마마를 뵈옵니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일에 황태후가 누구보다 먼저 도착했을 테지만, 권력을 잃은 지금은 그저 죽을 날을 기다리는 늙은이일 뿐이었다.
"그래. 역모에 준하는 큰일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오?"
황제가 질문했다. 그에 구후영이 강호에서 사람을 해치는 칠살문을 뒤쫓은 일과 그 과정에 발견한 황궁과의 연결, 그걸 파다가 알아낸 공현의 죽음을 간략히 고했다.
"칠살문의 역도들은 역용술에 능합니다. 이들이 공 태감을 살해한 다음 그 얼굴을 하고 조정의 기강을 혼란한 거로 추측합니다."
추측이 아니라 사실이지만, 구후영은 자기 입으로 일을 키울 생각이 없었다.
"유근 때는 이런 일이 없었건만."
황태후가 이때다 싶은지 한마디 던졌다.
"다행히 공현 태감이 평소 행실이 바르기에 칠살문의 역도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했습니다. 행실이 바르지 못한 자가 장인태감이었다면 세상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황후가 지지 않고 받아쳤다.
황후의 말처럼 일 처리가 합리적이고 온건한 공현이었기에 칠살문이 함부로 날뛰지 못했다. 만약 유근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면 무슨 짓을 벌여도 의심을 눈초리를 받지 않아 어떤 사고가 터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원래 선善으로 가는 길엔 고난과 역경이 가득한 법. 다행히 이번에도 하늘이 구후 태의를 내게 보냈군."
구후영이 명나라의 충신이라면 지금 광경에 속이 터져 화병으로 뒈졌을 것이다.
"소신의 침술로 역용술을 풀 수 있습니다."
구후영의 말에 사람들이 술렁였다.
"일단 짐부터 시작하는 게 어떻소?"
황제는 신선술에 미쳐 세상에 관심이 없는 거지 멍청한 건 아니다. 현재 일이 귀찮은 것임을 파악한 황제는 자신을 첫 검증 상대로 하는 거로 모든 반발을 단번에 물리쳤다.
황제가 솔선수범했는데 누가 감히 구후영의 검사를 거부한단 말인가.
단, 이는 빨리 일을 끝내고 수련에 몰두하고 싶은 마음의 발로였지 절대 황실이나 나라의 안위를 걱정해 내린 결단은 아니었다.
"잠시 불충을 저지르겠습니다."
황제가 어떤 마음이었든, 구후영에겐 큰 도움이 되었다. 구후영은 황태후나 황후 등이 반대의 말을 꺼내기 전에 침을 뽑아 들고 황제한테 다가갔다.
"구후 태의도 신선술을 익히는 듯한데, 일이 끝나고 잠시 심득을 교류하는 게 어떻소?"
황제가 침을 꽂는 구후영에게 말했다.
구후영은 거절할 말을 찾다가 이내 생각을 바꿨다.
"폐하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그저 무공이라면 사대신협 중 셋과 안면을 튼 구후영으로선 자문할 상대가 궁하지 않다.
그러나 태원현경의 수련은 그저 시키는 대로 운기할 뿐 깨달음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어쩌면 수십 년 동안 신선술에 푹 빠진 황제가 누구보다 이쪽으로 조예가 깊을 수 있기에 구후영은 거절하는 어려운 길보단 엎드린 김에 절하기로 했다.
"폐하 다음엔 나를 검사하시오."
황제의 검사가 끝나자 태자가 자원했다. 어서 검사를 끝내고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인 듯했지만, 황후의 매서운 눈초리에 결국 고분고분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고 말았다.
황태후와 황후까지 끝낸 다음, 환관들의 검사가 시작됐다.
"컥!"
얼굴 가죽이 꿈틀거리자 발각되었음을 안 칠살문 문도가 독단을 발동해 자결했다.
"허! 세상에 이런 황망한 일이."
자신을 근처에서 보필하던 환관이 다른 사람이 변장한 것임을 발견한 황태후가 시커멓게 죽은 얼굴로 두 눈을 꼭 감았다.
'생각대로다.'
황후의 심복인 공현이 저들 손에 죽었다. 그렇다면 굳이 위험하게 황후 주변의 환관까지 대체하진 않았을 거다.
태자 역시 마찬가지고, 아무래도 황제나 황태후 근처의 환관이 대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황후와 황태자의 발언권이 커지며, 어차피 태자는 황후와 같은 배를 탔기에 새로운 장인태감 자리에 자기 사람을 앉힐 수 있다.
그러나 황후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구후영이 역용술을 펼친 자를 연속으로 잡아내자 갑자기 궁녀 중에서 음독하고 자결하는 자들이 속출했는데, 황후를 근처에서 모시던 궁녀도 여럿 있었다.
"말세로다."
이러한 광경에 황제마저 신선술을 뒷전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고, 흐리멍덩하던 태자의 눈에 빛이 돌기 시작했다.
아무리 장생불로하면 뭐 할까.
나라가 망해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망한 나라의 황실 혈통으로 죽지 않는다? 이는 저주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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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후영은 역용술을 간파하는 침술을 태의와 어의들에게 전수했다.
의원과 선비 모두 토납술을 익힌다. 비록 대부분은 그저 정신을 맑게 하는 수준에 그치지만, 내공을 얻은 자도 없지 않다.
물론, 이들에게 무공을 가르치고 초식의 진행에 따라 운기하라면 어려워할 수도 있다. 몸을 쓰면서 동시에 운기하는 건 재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그러나 그저 침을 꽂고 정해진 방식으로 운기하는 건 이들한테도 어려울 게 없었다.
덕분에 환관과 궁녀에 이어 황궁을 지키는 금의위도 검사를 받았고, 조정 대신들도 모두 검사받았다.
그러는 기간, 구후영은 황제의 말동무가 되어줬다.
"태의 덕분에 개안한 느낌이오."
신선술에 관해 아는 게 없는 구후영은 태극혜검에서 얻은 깨달음들을 무공과 무관하게 바꿔 얘기했다.
다행히 황제가 흥미진진하게 들었고, 보답으로 구후영에게 신선술에 관한 수많은 얘기를 해줬다.
예전이었다면 일 푼어치도 못 알아들었을 구후영이지만, 태원현경을 익힌 덕분에 도움이 되는 말이 꽤 있었다.
'잘하면 내 내공을 잃지 않을 수도 있다.'
구후영은 이미 이 년 반이나 단아를 보지 못했다.
태원현경을 익혀 오기조원과 삼화취정을 이룬 구후영은 자신이 지금까지 쌓은 모든 내공을 희생해 단아의 자궁을 치료하려 했다.
구후영이 태원현경의 방식대로 자신의 내공을 전부 희생한다면 단아의 자궁을 건강한 상태로 되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치료하기 전날 단아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사라졌고, 여태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아무래도 구후영이 그간 쌓은 모든 걸 버리는 게 싫어서 도피한 듯한데, 수련의 경지가 깊어진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모든 내공을 희생해야 하는 건 똑같지만, 한 가닥 불씨를 남겨 처음부터 새로 수련할 수 있다.
"폐하의 말에 여태까지 막혔던 게 모두 뚫리는 기분입니다."
내심 한심하게 생각하던 황제였는데 뜻밖의 도움을 얻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배울 게 있는 자가 반드시 한 명 있다던 공자의 말을 떠올리며 구후영은 깊이 반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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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선생. 기분이 어떠시오?"
역용술로 황궁에 침입한 자들이 모두 죽었다. 대부분은 정체를 들키기 전에 자결했고, 일부는 요행을 바라고 끝까지 버티다가 역용술이 풀리기 무섭게 자결했다.
그렇게 생긴 수십 구의 시체에 공현을 가장했던 자의 시체와 점혈로 꼼짝도 못 하는 호 선생을 섞어서 황궁 밖으로 내보냈고, 홍기영과 구후영이 호 선생만 몰래 빼돌렸다.
"이미 다 끝난 일이오."
구후영의 입에서 칠살문의 근거지가 있는 곳들이 하나하나 튀어나왔다.
이들은 각 지역의 칠살문을 관리하는 동시에 호 선생에게 보고하고 지시받아가는 몸통 역할이었다.
이미 호 선생이 잡히며 반쯤 망한 칠살문인데 몸통마저 칠 할 이상 드러나며 철저히 끝장이 났다.
"그럼 믿고 점혈을 풀겠소."
여기서 호 선생이 자결한다면 구후영은 침술로 강제 자백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다행히.
"칠살문이 하려던 게 뭔지 알리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군."
호 선생은 자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 말을 듣고 보면 너희들도 칠살문을 망하게 한 걸 후회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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