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본심觀照本心
최고의 화백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할 완벽한 얼굴이 미약하게 찌푸려지더니 곧 몸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끝내는 피부에 균열이 생겼다.
그러다가 갑자기 하얀 연기로 화해 허무하게 흩어졌고, 주인을 잃은 검은 비단옷이 바닥에 퍼지며 풀썩 먼지를 일으켰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람?
천마가 지팡이에 심장을 찔린 순간부터 아무도 반전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마가 입을 열어 뭔가 단서라도 줄 것은 누구라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렇게 눈길 한번 안 주고 그대로 사라질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저놈을 죽여야겠지?"
팽창회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래야겠지."
천마가 이길지도 모르는 상황에선 보수적으로 나오던 홍기영과 풍불지도 결국 위종을 죽이는 데 동의했다.
"그런데 어떻게?"
천마와 가장 친분이 깊은 악불형이 차가운 목소리로 추궁했다.
"아까 문을 열어 초 형을 도왔다면 몰라도, 지금 저자를 어떻게 죽이지?"
악불형의 질문에 구후영이 질문으로 대답했다.
"예전에 저한테 길치여서 무공 익히기에 참 좋겠다고 하신 적 있죠?"
"그래. 평범한 사람은 늘 주변 사물과 방위에 영향을 받지. 길치는 그 영향을 최소한으로 받을 수 있어 육합을 벗어나는 게 훨씬 쉽다."
절간에 들어간 사람은 불상과 마주 서려 한다.
손님을 맞이한 주인은 늘 문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자리에 앉는다.
네모난 방석은 늘 방의 네 귀퉁이와 각을 맞춘다.
이는 일종의 무의식 영역이다.
무인이 높은 경지에 이르려면 이러한 속박을 이겨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육합이다.
거의 모든 초식이 육합을 따른다. 육합은 초식을 더욱더 합리적이게 함과 동시에 한계를 만들었다.
드높은 경지를 밟으려면 이러한 한계를 반드시 깨야 한다.
풍불지는 초식을 잊는 거로 육합을 벗어나려 했지만,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악불형은 모든 힘을 한 점에 모으는 거로 육합을 무의미하게 만들려 했으나 여전히 힘을 완전히 압축하지 못한 탓에 성공과 거리가 멀다.
팽창회는 점과 점을 잇는 전력을 다한 일격으로 육합을 무시하려 했다. 그러나 초식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탓과 심법 부족으로 실패만 거듭했다.
홍기영은 아예 육합을 벗어나는 걸 포기했다. 오히려 더욱더 육합을 따르며 지구력으로 상대를 천천히 말려 죽이는 방식을 택했다.
"그때 악 대협의 조언을 듣고 쭉 노력한 결과 이제 전후좌우의 네 방위를 거의 똑같이 생각하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팽창회의 눈에 질투의 기색이 살짝 스쳤다.
"그러나 상하의 구분은 너무 명확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악불형은 고개를 살짝 돌려 위종을 바라봤다.
위종은 얼굴에 황홀함이 가득했으나 눈엔 총기가 없었다.
아무래도 서불의 기억을 받아들이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육합을 벗어나는 건 이론적으로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위종이 당장 뛰쳐나올 상황이 아님을 확인한 악불형이 자기 생각을 간결히 털어놓았다.
"육합을 품을 정도로 커지거나, 육합을 무시할 정도로 작아지거나."
악불형은 작아지는 쪽을 골랐고, 그 결과가 일점공격술이었다.
"저는 커지는 쪽을 고르겠습니다."
육합은 육극이라도 불리며, 하늘보다 높고 땅보다 깊고 동서남북으로 무한하다.
그러나 무인의 육합은 그리 크지 않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의 육합은 그저 팔다리가 닿는 정도의 공간이다. 악불형처럼 공간을 제압하는 걸 장기로 하는 무인의 육합은 훨씬 크고.
위종은 환허밀공으로 웬만한 공격은 알아서 회피한다. 그렇기에 육합의 크기가 악불형 못지않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구후영의 공간이 위종의 공간을 먹어 치우는 순간, 그저 가볍게 검 한 번 휘두르는 거로 위종의 목을 간단히 벨 수 있다.
"키우든 줄이든 육합을 잊어야 하는 건 똑같다."
그저 기운이 많아 큰 공간을 장악하는 거로 육합의 한계를 벗을 수 있다면 천마는 이미 백번도 하고 남았을 거다.
구후영이 해야 하는 일은 육합의 한계를 깨부수는 것과 막대한 기운으로 위종의 공간을 먹어 치우는 것 두 가지다.
두 번째는 막대한 내공과 드높은 깨달음으로 요행이라도 바랄 수 있지만, 첫 번째는 사대신협도 십수 년째 골머리를 앓고 있는 문제로 요행마저 바라기 힘들었다.
'내가 그간 배운 게 있다면 뭔가 얻으려면 항상 뭔가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난화검과 낙화검을 합칠 때도 그랬다. 두 개의 대단한 검법을 합치면 훨씬 대단한 검법이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합치는 과정에 버려야 하는 게 너무 많았다.
결국 위력은 거의 다르지 않고 그저 검법이 훨씬 완성에 가까워졌을 뿐이었다.
게다가 강호에서 겪은 일들도 구후영에게 뭔가를 얻으려면 늘 대가를 내놔야 함을 가르쳤다.
'내가 가진 것 중에 뭘 내놔야 사대신협도 바라보기만 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지?'
내공의 경지는 구후영이나 사대신협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구후영이 태극혜검을 익힌 덕분이다.
그러나 무공의 경지는 사대신협이 구후영보다 확실히 높다. 지식과 깨달음이 중요한 내공과 달리 무공의 경지는 경험이 매우 중요했다.
구후영은 대련 경험도 적지만, 최고 수준의 무인과 대결한 경험이 너무 부족했다.
'나는 어떤 사람이지?'
자신이 가진 것이 뭔지 따지던 고민은 어느새 구후영 자신에 대한 의문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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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후영은 어머니와 함께 지낸 기억이 겨우 이 년 정도다. 그 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동생을 임신해 자기 몸 하나 가누기조차 힘든 상황에서도 구후영한테 글을 가르치는 걸 소홀하지 않았고, 늘 성현의 말씀을 따르라고 강조했다.
구후영과 동생을 받아준 서당 훈장도 비슷한 말을 했고, 의술을 가르친 신한천 역시 같았다.
구후영은 이들의 말에 따라 성현의 말씀을 떠받드는 '고루한' 소년이 되었다.
그러나.
낙화문의 제자가 되지 않겠느냐는 사부의 말에 바로 의원이 아닌 무인의 길을 선택했다.
독 선생이 백이 넘은 목숨을 해칠 때도 벌떡 일어나 질책하는 대신 죽은 척했다.
야효가 청월을 데려가려 할 때도 나서서 도리를 따지는 대신 검을 들었다.
마보를 팔아 돈을 얻었을 때도 성현의 책 대신 검을 샀다.
사실 구후영은 성현의 말씀을 따르는 선비보단 힘을 갖춘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백화궁 궁주 때도 피하는 대신 정면으로 맞섰다. 여러 상황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아무나 구후영처럼 망설임 없이 절정의 고수와 당당히 싸울 수 있는 게 아니다.
마교에서도 무려 화산의 절정고수와 무당의 대장로와 무공 대결을 했다. 자룡의 핑계가 있긴 했으나, 강함에 대한 동경이 아니었다면 다른 길을 아예 무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귀검동의 일도 마찬가지다. 자룡을 구하는 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귀검동으로 향하는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구후영은 시종 강해지고 싶어 했다.
소림의 일도 구후영이 억지로 무력 대결로 유도했다. 당시 아는 바가 적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옥무영이 무력이 아닌 여타 수단으로 사태를 해결하려 했던 것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화산의 일이 끝나고 나눈 대화에서 옥무영은 강호가 이익으로 돌아간다고 했고 구후영은 무력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강호는 온갖 군상이 부대끼는 곳으로 딱히 한두 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옥무영과 구후영은 그저 시각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부처 눈엔 부처만 보이고 멧돼지 눈엔 멧돼지만 보인다.
구후영이 무력을 숭앙하는 사람이기에 강호가 무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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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강호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면 평생 성현의 말씀을 따르면서 내 본심과 다르게 살았겠지.'
구후영은 누구보다 투쟁심이 강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유언과 유년에 받은 가르침으로 본심과 다르게 살아왔다.
낙화문 제자가 된 덕분에 투쟁심이 성현의 말씀에 마모되어 사라지지 않았고, 강호에서 온갖 일을 겪으면서 점차 진정한 자신을 알게 되었다.
생각이 이어짐에 따라 구후영의 몸에서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기운이 풀려 나왔다.
관조본심. 또는 관심.
구후영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봤고, 자신이 생각해오던 것과 다른 자신을 발견했고, 그러한 자신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을 솔직히 대하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몇 개의 경지를 뛰어넘었다.
"대단하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원경이 감탄했다.
"대단하긴 하지."
옥무영이 한탄했다.
질투 같은 저열한 감정은 아니었다. 호승심도 아니었다.
그저 세상에 천재가 너무 흔한 것에 대한 작은 한탄이었다.
지금 구후영의 깨달음에 놀라는 원경은 어려서부터 공유 스님의 가르침을 받아 관조본심을 완성했다.
즉, 구후영처럼 갑자기 깨달음을 얻어 진정한 자신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십여 년 전부터 쭉 솔직하게 자기 자신으로 살았다는 뜻이다.
소림의 큰일을 겪고 잠시 계율을 지키며 살려 노력했으나 모용연과 혼인하면서 다시 원래 자신으로 돌아갔다.
소림 무학의 깊이를 생각할 때, 원경은 아마 평생 끊임없이 강해질 것이다.
별다른 고비도 없이.
"설마 육합의 한계를 깬 건가?"
팽창회는 오늘 구후영을 처음 보고, 그간 폐관에 폐관을 거듭하느라 소문조차 듣지 못했다.
그렇기에 일정 기간 구후영을 지켜본 다른 셋보다 놀라움이 훨씬 컸다.
"그건 아니야. 대신 비슷한 힘을 낼 순 있겠어."
구후영은 육합을 깨는 걸 포기했다. 대신 육합을 깼을 때 갖추는 힘을 얻으려 했다.
높은 경지도 욕심나고 균형의 끝도 보고 싶다.
그러나 당장 눈앞의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구후영은 과감히 허황한 욕심을 버리고 그저 힘만 얻기로 했다.
그때, 위종의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
"어이쿠야. 놀랄 일이 아직도 남았을 줄이야. 어서 나가서 방해해야지."
수정벽 너머로 구후영의 기세를 느낀 위종이 탄식했다. 그러나 장난기가 물씬 풍겨 전혀 진심이 아님을 눈치가 무딘 사람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니야."
빠르게 몸 상태를 점검하고 수정벽을 열려던 위종이 갑자기 생각을 바꿨다.
"천마만 죽이면 모든 게 끝이라는 생각에 급히 내려왔다가 팽창회의 방해를 받았지. 이곳을 들키기도 했고."
"그 탓에 혈포규찰대가 천마를 깨우는 걸 제지하지 못했어."
"그리고 천마의 죽음도 찝찝하단 말이야. 그렇다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위종이 수정벽 너머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손짓에 따라 백 개의 점괘가 허공에 떠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마찬가지로 세 개의 점괘가 누가 잡기라도 한 듯이 꼿꼿이 섰다.
귀연이 점괘를 읊었다.
"대흉大凶, 흉중흉凶中凶, 필흉必凶."
아까처럼 거창하지 않았다. 대신 의미는 훨씬 명확했다.
"여기서 나가면 내가 반드시 죽는다고?"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리던 위종이 이를 악문 채 구후영과 원경을 째려봤다.
'둘 중 누구지?'
새로운 힘을 얻은 구후영일 수도 있고, 금강인과 연화인을 얻어 언제든 대일여래인大日如來印을 완성할 원경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안 나가면 그만이지."
말을 마친 위종이 손으로 지팡이를 힘껏 때렸다.
마른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지팡이가 부서지며 천공교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 작가의말
글쇠 : 의사 선생님.
의사 : 아, 알아요. 초콜릿 중독이죠?
글쇠 : 네?
의사 : 매년 이맘쯤에 환자분처럼 생긴 사람들이 초콜릿 중독으로 병원을 자주 찾습니다. 어차피 초콜릿은 보존 기간도 길고 하니까 두고두고 먹어도 괜찮아요.
글쇠 : 그게 아니라.
의사 : 알아요. 초콜릿 선물한 분이 먹는 모습 꼭 보고 싶다고 그랬겠죠. 그래도 미련하게 다 먹으면 어떡합니까.
글쇠 : 한 입만 먹었는데요.
의사 : 그럼 특이 체질인가? 고작 한 입으로 중독까지 오긴 힘든데?
글쇠 : 그게, 한 사람당 한 입이라서요.
의사 : 초콜릿 많이 받았나 보네요. 부럽다. 나도 젊을 때 네댓 개씩 받고 그랬는데. 다 옛날얘기죠 뭐. 그래서, 총 몇 입 드셨어요?
글쇠 : 2천 입 후엔 안 셌습니다.
의사 : 나가! 나가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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