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검진幽靈劍陣
진법은 만드는 데 드는 시간이나 비용과 비교하면 그 효용이 참으로 안타깝다. 진법가들이 근근이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건, 부자들이 장원을 짓거나 할 때 풍수지리와 더불어 진법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법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건 절대 아니다. 고대의 진법을 참조한 소림의 백팔나한진이나 종남의 칠성진 등만 봐도 진법의 진정한 위력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림의 백팔나한진 역시 나한 개개인이 정해진 무공만 익히는 희생을 해야 하고, 종남의 칠성진은 같은 검법을 비슷한 경지로 익힌 완숙한 절정의 고수 일곱 명이 필요하다.
위력이 강한 만큼 제한이 크고 대가도 크다.
그런 면에서.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공동의 진법은 불가사의했다.
진법에 갇힌 구후영의 감각에서 화산 무인들이 모두 사라지고 약 반 각이 흐르자 갑자기 검이 나타났다.
형의 말이라면 개가 고양이를 낳았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자룡마저도 뭔 개소리냐고 할지 모르지만, 구후영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말 그대로 허공에 갑자기 검 한 자루가 생겨났다.
허공에 생겨난 검은 누군가가 잡고 휘두르는 것처럼 움직였고, 구후영은 천공교검으로 검을 막으려 했다.
그런데 검은 형체를 유지한 채로 천공교검을 투과해 구후영을 그대로 공격했다.
구후영은 황급히 경공을 펼쳐 검을 피했으나, 검의 속도도 구후영 못지않게 빨랐다. 다행히도 악불형과 강석의 대결을 제때 떠올린 구후영이 적절히 보법을 밟자 검이 그대로 멀어졌다.
그러나 한숨 돌릴 새도 없이 검이 금세 다가왔고, 방금과 다른 방식으로 구후영을 공격했다.
'검의 움직임을 보고 초식을 배우라는 건가? 아니면 그저 피하라는 건가?'
진법의 의도를 모르니 너무 막막했다. 그저 피하자니 낙화검법의 오의를 눈앞에 두고 놓치는 걸지도 모르고, 움직임을 일일이 주시하자니 실수로 검에 맞아 죽을까 봐 걱정이었다.
'제길.'
수십 번의 공격을 구후영이 모두 피하자 검이 사라졌고, 숨돌릴 틈도 없이 두 자루가 되어 돌아왔다. 원체 복잡하던 구후영의 머리가 한결 어지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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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잡놈아, 좀 쉬면 안 되냐?"
안타깝게도 상대는 평범한 개잡놈이 아니고 말이 아예 안 통하는 불세출의 개잡놈이었다.
기존 검들이 사라지기 무섭게 허공에 다섯 자루의 검이 생겨났다.
'내공이 얼마 없다.'
단전의 내공은 화산 검종과 싸울 때 꽤 소모한 탓에 검이 네 자루가 될 때 이미 바닥을 보였고, 전신 혈도에서 박박 긁은 내공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
'모험해야 하나?'
구후영은 능숙하게 보법을 밟아 다섯 자루의 검을 동시에 피하면서 고민했다.
검에 찔릴 때 죽는 게 맞는다면 당장 축기를 하여 내공을 보충하는 게 옳은 일이다. 그러나 실체가 없어 천공교검도 그대로 통과하는 모습뿐인 검에 맞아도 아무 일 없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축기를 하는 건 틀린 일이다.
사대신협 중에서도 홍기영만 이룬 지고한 경지기에 구후영도 망설임이 컸다.
그러나.
"젠장!"
검이 여섯 자루가 되자 구후영도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흡.
입까지 벌리고 크게 들이켠 숨을 따라 막대한 기운이 구후영의 단전에 들어왔다. 동시에 축기와 연기가 절로 진행되었고, 내공은 십이경맥 중 다리로 향하는 여섯으로만 흘렀다.
'다행이다.'
오장육부와 긴밀히 연관된 수삼음경과 수삼양경과 달리, 다리로 향하는 혈도들은 덜 위험하다. 처음으로 싸우는 도중에 축기를 시도하는 구후영으로선 불행 중의 큰 행운이었다.
'그러고 보니 난 경공을 펼칠 때 늘 십이경맥 모두로 내공을 흘렸다.'
보통 일부 경맥으로만 운기하다가 절정에 이른 다음 상황을 봐가며 운기하는 경로를 늘이는 게 보통인데, 구후영은 거꾸로 한 셈이다.
후.
몸의 탁기를 호흡으로 뱉어내던 구후영은 뭔가 새로운 걸 발견했다. 숨을 들이쉴 때만이 아니라 뱉을 때도 기운이 단전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끊임없는 공격에 깨달음을 수습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래. 초식이고 뭐고 그냥 피하는 데 전념하자.'
검이 다섯 자루가 될 때까지만 해도 구후영은 아무리 힘들어도 검의 움직임을 주시하려 애썼으나, 여섯 자루가 되자 철저히 포기했다.
여섯 자루의 움직임을 일일이 주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고, 은연중에 이 진법의 목적이 초식을 가르치는 게 아님을 느낀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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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구후영은 상명上明과 사죽공絲竹空에 내공을 보내 뿌예지는 눈을 밝게 만들었다.
축기와 연기가 원활히 된 덕분에 내공은 충분하다. 공청석유로 강해진 체력 역시 아직 바닥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탈수와 집중력 하락으로 귀에 이명이 들리는가 하면, 가끔 눈앞에 안개가 끼며 시야가 흐려졌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여덟 자루던 검이 결국 아홉 자루로 변했다. 설상가상으로, 늘 어깨 나란히 나타나던 검이 아홉 방위에서 구후영을 포위했다.
여덟은 팔방에서, 한 자루는 구후영의 머리 꼭대기에서.
'누가 이기나 해보자.'
구후영은 언뜻 겸손함이 몸에 밴 샌님 같지만, 사실상 누구보다 호승심이 강하다. 극한의 위기 상황에 몰리자 낙심하는 대신 오기가 치밀어 지속하여 떨어지던 집중력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된다.'
늘 검들이 시야 범위에 있어 감각으로 느끼는 건 처음 시도했는데, 다행히 형체뿐인 검들이 기감에 확실히 잡혔다. 덕분에 아홉 자루의 검을 일일이 확인하려고 쉴 새 없이 두리번거리는 수고는 덜었다.
'그런데 왜 가만히 있지?'
나타나고 곧장 공격했던 예전의 검들과 달리, 아홉 자루 검은 허공에 떠 있기만 했다. 그러다 구후영이 의문을 품자마자 속을 읽은 것처럼 바로 움직였다.
구후영은 황급히 검들의 변화에 대응해 왼발 발끝은 태兌의 방위에 맞추고 오른발 발끝은 감坎에 맞췄고, 왼손은 이離 방위를, 검을 잡은 오른손은 손巽 방향을 가리켰다. 거기에 상체는 살짝 뒤로 젖혀 소천문이 곤坤을 향했고, 양어깨는 간艮과 진震을 향했다.
자연스럽게 얼굴이 건乾을 향했고, 대천문은 허공의 검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게 되었다.
'왜 안 공격하지?'
어떤 검은 가까이 다가오고 어떤 검은 멀리 물러났으나 포위한 건 여전하다. 그런데도 전과 다르게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설마. 피하는 게 아니라 견제인가?'
구후영이 고민하는 사이, 검들이 또 위치를 바꿨다. 구후영은 검들의 위치에 따라 손발이 향하는 위치와 자세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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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뒈질."
눈앞에 둥실 뜬 한 자루 검을 보며 구후영이 욕했다. 태어나서부터 했던 욕을 다 합쳐도 진법에 갇힌 후 뱉은 욕설의 반에도 미치지 못할 거다.
"그래. 피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아홉 자루의 검과 계속 대치하던 구후영은 자신이 잘하고 있는 건지 확인하려고 일부러 방위를 틀리게 잡았다. 그러자 아홉 자루의 검이 쏜살같이 구후영에게 쏘아졌다.
구후영은 미리 생각한 대로 움직여 아홉 자루의 검을 모조리 피했고, 단 한 번의 회피에 검이 모두 사라졌다.
한참이나 검이 안 생겨서 이제 끝인가 보다 하고 긴장을 푸는 순간, 한 자루 검이 둥실 나타나 구후영의 화를 돋웠다.
"그러니까 검을 피해 사라지게 하는 게 아니라 공격 못 하게 억제해야 한다는 말이지?"
구후영은 자신의 추론을 육성으로 뱉으며 확신을 얻으려 했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는지 구후영은 잡념을 털어내고 아까 아홉 자루 검과 대치하던 것처럼 검이 공격 못 하게 견제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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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추측이 맞았어."
앞에 뜬 한 자루 검이 공격 한 번 시도하지 못하고 사라지자 구후영은 사기가 부쩍 올랐다. 그리고 바로 생겨난 두 자루 검에 자신의 추론이 정확함을 확신했다.
"방법을 알았으니 됐다."
구후영은 천공교검을 앞으로 겨눈 채 두 자루 검을 동시에 견제했다. 구후영의 완벽한 견제에 두 자루 검 모두 가만히 떠 있기만 했다.
그러다 일정한 시간이 흐르자 두 자루 검이 간격을 넓혔다. 아홉 자루의 검과 한참 대치했던 경험 덕분에 구후영은 어렵지 않게 자세를 바꿔 견제를 이어갔다.
시간이 흐르며 두 자루 검은 점점 멀어졌고, 구후영의 자세도 계속 바뀌었다.
그리고 끝내, 검 끝이 서로 마주 보게 된 다음, 두 자루 검이 동시에 사라졌다.
구후영은 급히 운기하며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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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이 등신 같은 놈아."
쭉 잘하다가 일곱 자루가 되었을 때 파탄을 보였다. 너무 팔괘에 집착한 나머지, 하나가 비자 생각이 많아지며 잠깐 실수한 것이다.
그럼에도 구후영은 마음을 잘 다잡고 여덟 자루와 아홉 자루 모두 버텨냈다.
그런데 약 반 각의 시간이 흐르고 앞에 또 한 자루 검이 나타나자 구후영도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동생이 구해주길 기다리고, 사부께서 문파를 부흥하길 기다리고, 할머니가 가문의 대를 잇기를 기다리시는데. 멍청한 널 하늘같이 떠받드는 사제들은 또 어때."
구후영은 한쪽으로 검을 견제하면서도 쉬지 않고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등신 새끼. 차라리 아까 독충에 물려 깔끔하게 죽지 그랬냐. 다 죽은 목숨 용케 부지하고 내공까지 얻었으면 황송하게 생각해 바로 떠났어야지. 뭐? 더 강해지겠다고? 자기 목숨 하나 못 지키는 놈이 누굴 지켜. 천치 같은 놈."
검이 다섯 자루가 될 때까지 쉬지 않고 욕했더니 속이 후련했다. 그에 구후영은 집중력을 끌어 올렸다.
'태극, 양의, 삼재, 사상, 오행, 육합, 칠성, 팔괘, 구궁.'
여기서 구후영이 잘 모르는 건 칠성과 팔괘와 구궁이다. 태극은 태극권 덕분에 느낀 바가 있었고, 양의와 오행은 의원들이 깊이 익히는 학문이다. 삼재와 사상과 육합은 무인이라면 몸에 밸 수밖에 없다.
칠성과 팔괘와 구궁은 아니다. 그나마 팔괘와 구궁은 지하도시를 겪고 단전에 세 개의 구궁이 생기면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공부했으나, 칠성은 단 한 번도 유의해 본 적이 없다.
'육합과 팔괘, 반듯한 둘 사이에 낀 이단아.'
칠성은 흔히 북두칠성의 변화라고 오해하는데, 사실 반만 맞는다.
시작은 북두칠성의 위치 변화를 따른 거지만, 사실상 훨씬 많은 별의 이동을 연구하며 이뤄진 학문이다. 실효성이 거의 없고, 음양에 집착하는 유교의 사상에도 안 맞아 홀대를 받은 탓에 거의 사장되다시피 한 학문이다.
'칠성에도 반드시 변화의 핵이 있다. 그 핵만 잡으면 된다.'
삼재에서 천天과 지地 사이에 선 인人이 변화의 핵이다. 사상과 육합과 팔괘는 비어 있는 중궁이 변화의 핵이고, 구궁 역시 마찬가지다. 오행은 토土가 핵이 된다.
칠성 역시 반드시 변화의 핵이 있다. 그게 아니면 하나의 학문으로 아예 인정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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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했어. 구후영."
구후영은 자신의 뺨을 연속 때리며 자화자찬했다.
"넌 천재야."
칠성의 핵은 사상이나 육합이나 팔괘와 마찬가지로 비어있는 곳이었다. 구후영은 몇 번의 실패를 거쳐 드디어 칠성의 핵을 찾아냈다.
"이번엔 반드시 성공하자."
내공은 여전히 넘치는데, 집중력은 말할 것도 없고 체력 역시 바닥을 보이기 직전이다.
"넌 할 수 있어."
그런 구후영 앞에 검 한 자루가 둥실 떠올랐다.
- 작가의말
구후영 같은 모범생도 공부방에 가두면 반쯤 미칩니다. 돼지엄마들도 자기 애 좀 그만 괴롭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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