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여회빙緣如懷氷
인연은 얼음과 같다.
멀리선 보이지만, 다가가 품에 안으면 어느새 녹아 사라진다. 그러나 인연은 하늘이 정한 거라 안 다가갈 수도 없다.
"그게 언제입니까?"
원경의 질문에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며칠이 멀다고 광증이 도진 탓에 여인은 자신의 나이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가씨가 열 살이었던 해 여름이었으니, 아기를 낳은 건 다음 해 봄이겠군. 강 총관, 그게 언제인지 알려주시겠소?"
옥무영의 질문에 강 총관은 턱이 덜덜 떨렸다.
"이십칠 년 전이오. 아니, 이십육 년인가?"
"그 아이가 살았다면 지금 스물여섯 혹은 스물일곱이란 말이오?"
떨림이 더 심해진 탓에 강 총관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원경 아우, 아우의 나이가 얼마지?"
옥무영이 고개를 돌려 원경에게 질문했다.
"스물일곱이오. 이십칠 년 전의 구 월 육 일에 소림사 산문에서 날 발견했을 때 말도 못 뗀 갓난아기였다고 들었소."
원경의 대답에 여인이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결의형제를 맺은 그날이구나.'
구후영이 우연히 청빈과 원경을 만나 결의형제를 맺은 그날이었다.
당시 구후영은 대동부에서 작고한 어머니 생각으로 심정이 우울했고, 청빈은 무고한 기녀를 죽인 일로 기분이 착잡했고, 원경은 자신이 버려진 날이어서 마음이 울적했다.
덕분에 초면인데도 스스럼없이 잔을 나눴고, 그걸 인연으로 결의형제를 맺었다.
'우연인 듯하나, 명명 중에 하늘의 뜻이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구나.'
"혹시."
여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죽 신발은 없었습니까? 아기 곁에 뒀는데."
마음씨 고운 아가씨는 가족이 없어 혼수품을 준비하지 못한 시녀가 시댁에서 구박받을까 봐 귀한 가죽 신발을 준비했다.
신랑이 신어도 좋고, 팔아서 집안 살림에 보태도 좋다는 생각이었는데, 취연은 몸을 더럽혔다고 바로 백정한테 팔렸고, 백정이 마음에 안 들어 신발을 꼭꼭 감췄다.
그날 아기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입으로 피를 토하자 놀란 와중에도 용케 숨겼던 신발을 꺼내 치료비를 대신하려 했는데, 정작 소림의 산문에 도착하자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으로 광증이 다시 도졌다.
여인은 아기와 신발을 산문 앞에 둔 채 허겁지겁 도망쳤고, 돌아가서 백정의 죽음까지 확인한 후엔 탈진해 쓰러졌다.
"신코에 수구가 달린 가죽 신발이요? 짙은 푸른색으로 염색한."
가만히 구경하던 최종필이 불쑥 나섰다.
"맞습니다. 포두 나으리."
"봉마림에서 원경 스님이 신은 걸 봤는데."
최종필이 원경의 맨발을 보며 중얼거렸다.
"간단한 일이오."
모든 실마리가 어떠한 놀라운 사실을 가리키고 있지만, 어느 실마리도 확실친 않았다. 그 탓에 여인도 원경도 섣부르게 입을 열어 모두가 듣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다.
"소림에 묻겠소. 여기 원경 아우 빼고 소림 산문에 버려진 아이를 주운 적 있소? 설사 죽은 아이라도 말이오."
그래서 옥무영이 나섰다.
"내가 알기론 원경이 유일하오."
눈썹이 허연 스님이 대답했다. 일지봉에 가서 구후영을 소림에 데려오고 면벽에 들었던 원각 스님인데, 늙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원자 항렬에서 어린 축에 들었다.
"혹시, 왼쪽 어깨에 푸른 점이 있습니까? 자라면서 사라졌을 수도 있긴 한데."
여인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네. 있습니다."
원경의 대답에 여인이 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깬 뒤에 아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아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소림 근처에 가기만 해도 두려움과 함께 광증이 도졌습니다. 남편을 죽인 일이 들킬까 봐 누구한테 부탁도 못 하고, 혼자만 속을 끙끙 앓다가 결국엔 포기했습니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린 원경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여인을 품으로 감쌌다.
"그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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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가 훈훈해야 맞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강한 살기들이 원병한테 쏟아졌다. 모자의 상봉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아무도 입을 떼 비난하진 않았지만, 물꼬만 트이면 너도나도 원병한테 뛰어들 기세였다.
"나 아니라니까."
압박을 견디다 못한 원병이 버럭 고함쳤다.
"내가 나한당 당주가 된 건 이십오 년 전이야. 내 전에 당주는."
"당주는?"
원병이 갑자기 입을 다물자 옥무영이 캐물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원병이 입을 다문 건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수많은 소림 제자의 눈길이 원호한테 몰렸다.
"여 시주께 묻겠소."
가슴을 부여잡았던 손을 치우며 원호가 질문했다.
"혹시 이 목소리요?"
원호가 입을 떼자 여인이 하얗게 질린 얼굴을 원경의 품에 더 깊이 묻은 채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그에 사람들이 하나같이 탄식했다.
비록 대답은 듣지 못했으나, 그 어떤 대답보다도 확실한 답변이었다.
"악몽인 줄 알았는데."
나지막이 중얼거린 원호의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수많은 사람이 침묵한 채 이 사실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하던 그때.
"파계승 원호에게 생사결을 신청하오."
구후영의 단단한 목소리가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파계승 원호는 내 의형과 천륜으로 맺어졌소. 인륜으로 봐도 죽음에 이른 내 의형을 구해준 은혜가 있소. 하지만."
구후영이 흔들림 없는 얼굴로 말했다.
"의형의 모친을 욕보인 죄는 반드시 물어야 하오. 의형이 직접 묻는 건 천륜과 인륜을 위배하니, 피는 나누지 않았으나 목숨을 나누기로 한 동생이 대신 나서는 게 도리에 맞는다고 생각하오."
"옳소!"
원래 여기엔 구후영 편이 없었다. 대부분은 소림 편이고, 나머지는 그저 구경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사람이 구후영을 지지했다.
'욕심에 눈이 가리면 안 된다고 그렇게 얘기했으면서도.'
사태를 지켜보던 본선은 다리 힘이 풀리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구도육좌를 펼치느라 탈진한 몸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는데, 뜻밖의 횡액에 겨우 잡고 있던 긴장의 끈이 툭 끊어지고 만 것이었다.
'원경을 일찍 포기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구명지은과 부친처럼 생각하던 사부의 시신에 검을 꽂은 원한을 두고 원경이 고민한 기간은 일각이 넘었다.
만약 그때 욕심을 부리지 않고 원경을 놔줬더라면.
'무림대회가 끝났음을 알리고 손님을 돌려보냈겠지.'
멀리서 온 문파들은 소림이 역근경과 세수경을 얻은 사실을 한시 급히 알리려고 바로 떠났을 거고, 가까운 문파들도 크게 지체하지 않았을 거다.
특히 원경 일행은 소림에 남기 싫어서 바로 떠났을 가능성이 크니, 지금의 화는 원경을 붙잡으려는 욕심이 불러온 거나 마찬가지다.
'다 저 미련한 놈 때문이다.'
역근경과 세수경을 얻었고, 그 사실을 강호에 알렸다. 원경도 적절한 권고로 붙잡으려 했으나 실패해서 그대로 포기하려던 차였는데, 접객화상이 나섰다.
'저놈이 나서지만 않았어도.'
본선은 그렇게 욕심으로 일을 그르치면 안 된다고 말하고서도 마지막 순간에 결국 사행심을 버리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까지 접객화상에게 쏟았다.
'제길.'
본선의 눈빛을 느낀 접객화상은 속으로 영문 모를 화가 거세게 타올랐다.
'이게 다 내 탓이라는 건가? 내가 뭘 잘못했는데.'
한 선생의 꾐에 넘어가 공유의 가슴에 검을 꽂은 원호가 잘못했고, 제멋대로 나섰으나 오히려 구후영에게 완패한 원철이 잘못했고, 구후영을 흉수로 몰기로 한 계획을 제멋대로 바꾼 원호가 잘못했다.
'잘못한 건 원호 아닌가?'
모든 것 이전에 여인을 겁탈해 원경을 태어나게 한 원호의 죄가 가장 크다.
"본선 사조와 여러 사형제와 사질들께 알리오."
표정을 수습한 접객화상이 나섰다.
"아까 사조께서 원호의 처벌은 새로운 방장이 정한다고 했소. 그러니 원호의 승적을 박탈하는 사조의 결정에 동의할 수 없소."
"뭐 하는 짓이냐!"
가뜩이나 골치 아픈데 접객화상이 나서서 엉뚱한 소리를 하자 원병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소림 제자인 원호의 처벌을 외인한테 맡길 수 없다고 말하는 거요. 여러분이 나를 방장으로 추대하면, 소림의 법도에 따라 원호의 죄를 재단하고 합당한 벌을 주겠소."
뜻밖의 선언에 다들 어리둥절해하는 가운데.
"옳은 얘기다. 원정의 말이 맞는다."
그새 계산을 마친 본선이 접객화상 편을 들었다.
"소림의 법도에 따라 난 이만 물러나겠다. 소림의 미래는 온전히 너희한테 맡긴다."
말을 마친 본선은 제자의 부축을 받아 연무장을 떠났다.
'원정이 새 방장이구나.'
소림은 달마원의 원로들이 방장 선출을 비롯한 수뇌부 선정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규칙으로 막았다.
그렇기에 본선이 자리를 뜬 걸 규칙을 지키기 위함으로 볼 수 있지만, 이 자리에 그 정도로 순진한 사람은 몇 없다. 접객화상의 그저 제안 정도에 그치는 발언이 본선이 자리를 뜸으로써 정식 안건이 되었다.
'언질을 받은 거겠지?'
생각 많은 일부는 서열이 나한당의 원병과 반야당의 원율은 물론이고 계율원주보다도 더 밑인 원정이 당당히 나선 데는 원로들의 지지가 있는 게 틀림없다고 섣불리 재단했다.
덕분에 새로운 방장은 만장일치로 원정이 지목되었다.
"원호 사형. 자신의 죄를 고하시오."
방장이 된 원정은 본선이 벗어두고 간 누런 가사를 몸에 걸친 다음 원호의 죄를 추궁했다.
"나한당 당주 시절이었소. 밖에 나갔다가 심마가 발작해서 개울가에서 여인을 납치해 겁탈했소."
원호가 모든 걸 체념한 얼굴로 말했다.
"심마가 물러나고 그저 악몽이라고 생각했소. 기억이 뒤죽박죽인 데다가 그 동굴을 다시 찾지 못해서 부처가 내 마음을 시험한 거로 생각했소."
"그게 다요?"
원정의 추궁에 원호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 벌어진 모든 일은 내가 독단으로 계획한 거요. 원철 사제가 나선 건 그저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고, 원병 사제는 다들 알다시피 예전부터 내가 시키는 일은 무작정 믿고 따랐소."
"이렇게까지 해서 뭘 얻으려고 했던 거요?"
"역근경과 세수경이오. 그저 몇 장을 읽었는데도 수많은 깨달음을 얻었소. 주해본 전체를 얻어서 혜가 조사의 깨달음을 온전히 엿보고 싶은 욕심에 나를 주체하지 못했소."
"설마, 역근경과 세수경을 얻으면 혼자 보려고 했던 거요?"
"여기까지 와서 뭘 더 숨기겠소. 예전엔 내가 원철과 원병보다 더 강했소. 둘한테 따라잡힌 것에 자존심이 상했고, 역근경과 세수경이 역전할 기회라고 생각했소."
원호의 대답이 길어질수록 사람들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커졌다.
"방장으로서 처벌을 정하겠소. 원호의 부끄러운 죄는 일일이 나열하지 않겠고, 모든 중죄에 대한 처벌은 태형으로 통일하겠소."
태형은 소금물에 담근 곤장으로 볼기를 때리는 형벌을 말한다.
"죄는 쌓일수록 커지는 것. 그저 더하기만 하면 태형 삼백 대에 그치지만, 죄인이 나한당 당주와 방장의 자리에 있었음을 고려해 오백 대로 정하겠소."
평범한 사람은 태형 열 대에도 몇 달을 드러눕는다. 원호가 비록 고수라곤 하지만, 오백 대는커녕 이백 대를 버틸지도 의문이다.
"계율원은 어서 태형을 집행하라. 곤장이 부러질지도 모르니 넉넉히 서른 개를 준비하라."
원정의 지시에 몇 명 남지 않은 계율원 계도승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 작가의말
연여회빙 - 인연은 가슴에 품은 얼음과 같다.
154화 이대도강, 155화 무근지과, 156화 불조유심. 이 세 소제목은 해당 회차의 내용과 아주 밀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 회차를 합치면 꽤 적절한 제목이었음을 느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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