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이남녀怪異男女
서산에 머리를 빼꼼 내민 반달이 배시시 웃는다. 그에 서쪽으로 지던 해가 노란 노을을 피워 모습을 숨긴다. 그러자 심통이 난 반달이 몸을 떨어 노을을 흩트린다.
'됐다.'
노을이 한 조각도 안 남고 완전히 사라진 순간, 구후영도 마침 손을 멈췄다. 그런 구후영의 주변엔 나무 속껍질과 질긴 덩굴을 꼬아 만든 길고 짧은 수십 개 밧줄이 있었다.
'준비는 끝났다.'
밧줄을 다 만든 구후영은 통나무 하나를 메고 강변으로 걸었다. 힘이 세지고 막대한 내공도 품었지만, 뗏목을 들고 산길을 타는 건 쉽지 않다.
일단 베 놓은 통나무를 옮긴 다음 강가에서 뗏목으로 묶는 게 수월하다.
'물에 빠지면 안 되니까 최대한 단단히.'
여섯 번 왕복하면서 통나무와 밧줄을 모두 강변으로 옮긴 구후영은 나무에 홈을 냈다. 그러곤 나무 두 개씩 묶고, 다시 세 개의 묶음을 하나로 묶었다.
적절한 위치에 적당한 깊이로 낸 홈 덕분에 묶은 밧줄이 흔들리지 않아 꽤 단단한 뗏목이 순식간에 완성됐다.
'삿대!'
자신이 만든 뗏목을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던 구후영이 머리를 탁 쳤다. 그냥 하류로 떠가려는 게 아니라 강을 건너는 거기에 당연히 떼를 밀 삿대가 필요하다.
'지엽 때문에 본질을 잊어선 안 되고, 본질 때문에 지엽을 무시해도 안 된다.'
너무 뗏목에 집중한 나머지 삿대를 잊은 자신을 책망하며, 구후영은 산자락의 작은 대나무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푹. 푹.
그런데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삿대 찾아 대나무 숲에 가던 구후영의 발길을 붙잡았다. 구후영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주시했다.
"멈추시오!"
밝은 달빛 덕분에 바로 상황을 파악한 구후영이 불호령을 내렸다. 그에 나뭇가지로 무덤을 쿡쿡 찌르던 자가 몸을 돌렸다.
모자에 달린 면사로 얼굴 전체를 가렸으나 체형으로 봐선 여인이 분명했다.
"무덤은 왜 헤집는 것이오?"
망자를 모독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이거 네 무덤이야?"
여인이 되물었다. 너무 어이없는 질문에 구후영은 못 참고 실소했다.
"아니오."
멀쩡하게 서 있는 구후영의 무덤은 당연히 아니고, 구후영과 연관이 있는 무덤도 아니다.
"내가 쫓는 자가 있는데, 땅을 파고 숨었나 해서 확인하고 있었다."
"사람이 아무리 급해도 무덤에 숨겠소?"
구후영의 말에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든 나뭇가지를 버렸다. 그때, 구후영은 문득 상대가 누군지 떠올랐다.
"혹시 어제 배를 밟고 강을 건넌 분이오?"
"그 배구나. 내가 쫓는 건 바로 먼저 배를 밟고 지난 나쁜 놈이다. 혹시 근처에서 그놈을 보았느냐?"
여인이 바로 구후영이 어제 본 청색 인영이었다.
"보지 못했소."
구후영의 대답에 실망한 듯 고개를 젓던 여인이 훌쩍 몸을 날렸다. 구후영은 여인이 손가락 굵기 정도의 가지에 가볍게 안착하는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경신술이 극에 달했구나.'
그러나 감탄하는 것도 잠깐이었다. 구후영은 삿대를 구하는 일이 급하단 생각에 발걸음을 옮겼다.
'어!'
그런데 미처 발밑을 살피지 않아 작은 구덩이에 발이 빠졌다. 어제부터 깊이 빠졌던 경공에 관한 고민에 다시 빠지며 집중력이 떨어진 탓이었다.
다행히 넘어지면서 양손을 뻗은 덕분에 얼굴을 땅에 박는 추태만큼은 겨우 면했다.
그때. 무덤 바로 곁의 땅이 움찔움찔하더니 회색 옷을 입은 남자가 튀어나왔다. 땅 밑에 숨어 있느라 흙이 잔뜩 묻었건만, 그래도 잘생겨 보이는 이립 정도의 사내였다.
"젠장. 왜 산 사람한테 절하고 지랄이야."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올리는 절을 대신 받으면 귀신이 들러붙는다는 얘기가 있다. 땅 밑에 있느라 상황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남자는 구후영이 절을 올리는 줄 알고 기겁해서 나왔다.
"잡았다. 요놈."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무 위에 있던 여인이 병아리 채는 매처럼 하강했다.
"배월교주. 십 년이면 포기할 만도 하지 않소?"
배월교주라는 말에 구후영이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러나 청색 옷의 여인은 목소리도 체형도 단아와 전혀 달랐다.
"옥면비룡玉面飛龍. 오늘은 기필코 널 잡아서 날 좋아하게 만들 거다."
"그럴 바엔 차라리 자결하고 말겠소."
두 남녀의 기상천외한 대화에 구후영은 잘못 들었나 싶어 애꿎은 달을 힐끗 쳐다봤다.
"그럼 얼른 자결해. 나도 마음잡고 다른 남자 찾게."
둘은 짧은 사이에 벌써 십수 합을 주고받았다. 구후영은 둘이 주고받은 괴이한 내용의 대화를 잊고 수준 높은 대결에 집중했다.
"죽어!"
여인의 주먹이 태양혈을 노리자 사내의 몸이 가랑잎이라도 된 듯이 가볍게 날아갔다. 여인이 큰 보폭으로 쫓아가자 사내가 갑자기 착지하여 방향을 전환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어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여인도 사내도 발로 땅을 차고 떠오를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착지했다. 덕분에 영활함이 뛰어난데 안정감도 그대로였다.
그때, 수비에 치중하던 사내가 구후영에게 귀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소협. 날 도우면 내 경공을 알려주겠소. 내가 바로 섬서에서 경공으로 적수가 없는 옥면비룡이오."
남자가 봐도 잘생긴 얼굴은 옥면이란 표현이 적절했고, 어제 보여준 경공 실력도 비룡으로 불리기엔 손색이 없다.
"속지 마라. 네가 도우면 도망쳐서 몇 달이고 잠적할 놈이다. 차라리 내 경공을 알려줄 테니 날 도와 저놈을 잡아라."
배월교주로 불린 여인이 똑같이 제안했다.
"십 년이나 날 쫓아만 다닌 여자요. 내 경공이 낫소."
"십 년이나 날 뿌리치지 못한 놈이다. 게다가 내 경공이 이놈 것보다 훨씬 유명하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경공으로 섬서 제일이 된 내 깨달음이 탐나지 않소?"
"이름만 말해도 다 아는 내 유명한 경공이 탐나지 않느냐?"
너무 어이없는 상황에 구후영은 그저 멍하니 있었다. 둘은 그런 구후영을 누굴 도울지 고민한다고 제멋대로 오해하여 다급히 회유를 시작했다.
"승부혈과 삼음교혈엔 늘 내공이 머물러야 하고, 복토혈과 족삼리혈과 승산혈엔 늘 내공이 흘러야 한다."
여인이 선수를 쳤다.
"가볍기만 해선 빠를 수 없소. 자신의 몸무게와 순수한 힘을 알고 그걸 내공으로 적절히 조절하는 게 좋소."
"혈해혈과 위중혈은 여러 갈래 기운이 지나니 서로 충돌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초보는 내공으로 힘을 키우려 하고, 중수는 내공으로 몸을 가볍게 하고, 고수는 몸도 가볍게 하고 다릿심도 키우오. 그러나 최고수는 마냥 가볍게 하는 게 아니라 적절한 순간에 몸을 무겁게도 하오."
옥면비룡이 말할 때마다 구후영이 감탄하는 걸 본 여인이 책략을 바꿨다.
"용천혈로 내공을 뿜으면 더 빨라진다고 착각하는 멍청이들이 있지. 그건 내공 낭비일 뿐이다. 차라리 발로 딛기 조금 전에 흡력을 발생하는 게 빨리 달리는 데 도움이 된다."
"절정의 경지가 되기 전엔 상체의 혈도까지 운기하지 않는 게 좋으나, 절정이 되면 가슴과 배는 물론 팔의 혈도에까지 운기해야 하오. 달리는 건 그저 다리의 일이 아니고, 몸 전체의 균형이 잡혀야 조금이라도 빨리 달릴 수 있소."
"오래 뛰다 보면 환조혈이 아플 수 있다. 이때 옆구리의 소요혈에 내공을 보내면 아픔이 완화된다."
"소요혈보다는 발목의 곤륜혈이 더 효과가 좋소. 경공을 펼치는 중이기에 기운을 보내기도 훨씬 쉽고."
의원이기도 하기에 구후영은 혈도를 잘 안다. 덕분에 경공에 제대로 입문한 적이 없음에도 둘의 말이 쏙쏙 이해되었다.
'무작정 몸을 가볍게 한다고 멀리 뛰고 빨리 달리는 건 아니다. 상황에 따라 몸무게를 적절히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제운종도 밟는 순간 밀고 떼는 순간 당겼지. 용천혈이 아닌 음대혈로 해내야 한다는 뜻인데, 쉬운 건 아니구나. 그런데 그땐 내가 얼추 비슷하게 했던 거 같은데.'
알고 한 건 아니지만, 정학의 제운종을 비슷하게 따라 한 적 있다.
"몸무게는 어떻게 조절하오?"
듣기만 하던 구후영이 처음으로 질문했다.
"십이경맥에 동시에 내공을 보내라. 빨리 가고 늦게 회수하면 가벼워지고 늦게 가고 빨리 회수하면 무거워진다."
"굳이 십이경맥에 다 보낼 건 없소. 아홉 개만 해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고, 익숙해지면 세 개만으로도 되오."
"놈. 그래서 내공이 별로 없는데도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잘 피해 다녔구나."
여인이 버럭 화냈다.
"내공이 별로 없다니. 화산이랑 종남을 빼면 나보다 내공이 많은 자가 섬서에 다섯 안 되오."
옥면비룡도 외쳤다.
"방향 전환은···"
구후영은 내친김에 평소 궁금하던 걸 일일이 질문했다. 둘은 앞다투어 대답했고, 어떻게든 상대와 다른 대답을 하려 애썼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머리가 어지러웠을 텐데, 오성이 깊은 구후영에겐 오히려 안계를 넓혀주는 좋은 선생들이었다.
"어떻소? 누굴 도울지 결정했소?"
"밑천이 다 드러난 모양이군. 난 아직도 할 얘기가 많다."
"나도 많소. 경공을 펼치다 보면 가끔 기운의 흐름이 흐트러지는 일이 있소. 이럴 땐 등의 풍문혈로 기를 보내면 흐름이 돌아오오."
"허공에 오래 떠 있고 싶으면 외기外氣를 이용해라. 새가 날갯짓을 안 하고도 허공에 뜰 수 있는 게 다 외기 덕분이다."
"높이 뛰고 싶으면 와기渦氣를 타면 되오. 외기와 달리 쉽게 만나기 힘든 건데, 곤륜의 운룡대구식과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소."
서로 싸우랴, 도망갈 기회를 엿보랴, 도망 못 가게 늘 경계하랴, 구후영에게 자신의 경공도 자랑하랴.
채 일각도 안 되어 둘 다 지쳤다.
"잠시 쉴까?"
"그게 좋겠소."
합의한 옥면비룡과 배월교주가 뒤로 세 걸음씩 물러났다.
"근데 두 분은 왜 싸우는 거요"
구후영이 질문했다.
"난 이 남자가 좋다."
"난 이 여자가 싫소."
둘이 금세 다시 싸울 분위기가 되자 구후영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
"여자분은 남자분의 어디가 좋소?"
"잘생겼고, 무공도 이만하면 쓸만하고. 사람이 조금 좀생이인 건 있는데 난 상관없고."
"옥면 대협은 저 여자의 뭐가 싫은 거요?"
"글쎄."
옥면비룡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간 도망 다니느라 바빠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소. 처음엔 분명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런데 배월교에 교주가 몇이오?"
할 말이 궁해진 구후영이 전혀 상관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게 무슨 소리지?"
"강호에 배월교가 나타났는데 교주 나이가 벽옥이었소."
"그럼 새 교주가 생겼나 보네. 열여섯이면 내 조카 중 한 명이 틀림없겠어. 언제 한번 들러야겠다."
"십 년 동안 남자를 쫓아다니느라 교에 한 번도 안 들른 거요?"
어이없어 따지는 구후영의 말에 배월교주가 한숨을 푹 쉬었다.
"배월교의 여인은 시집가기 전엔 면사를 벗을 수 없다. 더 늙어서 용모가 시들기 전에 세상에 자랑하고 싶은데, 눈에 차는 사내라곤 저놈밖에 없으니."
"옥면 대협은 무슨 고충이 있소?"
구후영의 질문에 옥면비룡이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났소. 면사로 얼굴 가린 여인이 다짜고짜 혼인하자고 닦달하니까 당연히 박색이겠거니 했소. 배월교에 그런 풍습이 있는 줄 누가 알았겠소."
처음부터 끝까지 이상한 한 쌍의 남녀였다.
- 작가의말
구후영 : 근데 이쯤 쉬셨으면 다시 싸워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 아직 물어볼 게 많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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