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궁전地下宮殿
오리털 같은 눈송이들이 하늘을 하얗게 덮었다.
'하자.'
시야에 들어온 수많은 눈송이를 일검에 치울 초식을 고민하던 구후영이 불쑥 결단을 내렸다.
무수한 고민으로도 마음을 정하지 못한 구후영은 결국 조건 하나 걸었다. 자신이 은퇴한다는 소문을 내고 단아가 모습을 드러내면 이번 행동에 참여하지 않고, 단아가 나타나지 않으면 하기로.
아쉽게도 천마가 남긴 말들을 해석하여 진시황과 삼천 동남동녀가 있음 직한 곳을 찾아낼 때까지 단아는 소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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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마리 순록이 끄는 커다란 썰매 위에 털옷을 꼭꼭 여민 사람들이 있었다.
자기 발로 뛰는 사람은 수시로 내공을 회복하는 홍기영과 구후영 그리고 내공이 바닥난 적 없는 옥무영까지 셋뿐이었다.
천마가 경공만큼은 천하제일이라며 칭찬을 마다하지 않은 신검 역시 썰매에 몸을 실었으니 다른 사람은 더 말할 게 없었다.
물론, 구후영 등이 썰매를 타지 않은 건 단순히 거금을 주고 산 순록을 아끼려는 마음이 아니었다.
얕아도 무릎, 깊으면 허리까지 빠지는 눈 위에서 경공을 펼치는 건 고수한테도 어려운 일이었고, 홍기영은 몰라도 구후영과 옥무영은 수많은 깨달음을 얻어 경공 실력이 쑥쑥 자랐다.
특히 기초가 약했던 구후영은 경공을 펼침에 있어 안 좋던 습관들을 하나씩 버리고 교정하며 빠르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나 수준만큼은 매우 높아졌다.
"으흐으흠."
귀연이 뭐라고 말했으나 입이 얼어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쉬자고?"
풍불지가 질문했다. 무수한 노고에도 후손을 보지 못한 풍불지는 귀연을 누구보다 아끼고 보살폈다.
"에."
귀연이 언 입으로 대답했다.
"자자. 잠깐 쉬다 가지."
썰매를 멈추고 순록들에겐 건초를 꺼내 먹였다.
"건초가 얼마 안 남았네."
원경의 중얼거림에 대답이 돌아온 건 약 반 각이 지나고서였다. 옥무영이 지핀 모닥불로 언 입을 녹인 귀연이 드디어 제대로 된 말을 했다.
"목적지까지도 얼마 안 남았어요."
"그런데 우리가 진짜 제대로 온 거 맞아?"
원경의 질문에 귀연이 턱을 치켜들었다.
"이 도사로 말할 것 같으면, 위로는 천문을 알고 아래로는 지리에 능통하여 별 하나만 봐도 자신이 어떤 하늘 아래인지 알고 나무 한 그루만 봐도 자신이 어느 땅 위인지 압니다."
귀연이 으스대는 모습에 사람들이 껄껄 웃었다.
"그럼 귀연 도사께 묻겠소. 왜 다른 자들과 달리 귀연 도사께선 진법을 그리도 쉽고 빠르게 치는 것이오?"
옥무영의 질문에 귀연의 머리가 좀 더 뒤로 젖혀졌다.
"시간이 흐르며 더는 사물死物에 강한 기운이 깃들지 않아 진법은 점점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소. 그 탓에 어느 순간부터 진법은 복잡하고 방대해졌고, 우매한 자들은 그저 그걸 따라 하기에 급급하오. 그러나 빈도로 말할 것 같으면 모산파 역대 장문 중에서도 손가락을 꼽을 만한 천재라 진법에 목적을 맞추지 않고 목적에 따라 진법을 달리하오. 게다가 강한 기운이 깃든 모산파의 보물들이 있어 쉽고 간단하게 진법을 만드는 것이오."
말을 마친 귀연이 짐짓 에헴 하면서 거드름을 피웠다.
"어쩌면 천마나 연 선생의 방식이 옳은지도 모르겠다."
대견스럽다는 듯이 귀연의 재롱을 바라보던 풍불지가 홀연 탄식했다.
"무공이란 게 상대를 이기고 죽이기 위함이니 강함과 빠름 그리고 정확함만 충족하면 되는 게 아닌지 싶다."
그에 악불형이 피식 웃었다.
"네놈이 빠름과 강함 그리고 정확함을 추구하니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난 여전히 제압과 파괴력이 최고라고 본다."
둘이 또 무공에 관한 얘기로 싸우자 모두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사실 무공에 정답이란 게 있을 수 없다. 특히 사대신협의 경지에 이르면 그저 자신이 믿는 바를 얼마나 잘 해내느냐의 차이일 뿐, 우열을 가리는 건 무의미하다.
그러나 악불형과 풍불지는 틈만 나면 자신이 옳다고 싸워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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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라고?"
허허벌판에 그다지 높지 않은 산 하나가 달랑 있는 황량한 지역.
일행은 아무런 생명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는 곳이 자신들의 목적지라는 것을 쉬이 믿기 힘들었다.
"이 도사가 아니면 아무도 여길 못 찾았을 겁니다."
반면, 반신반의하는 일행과 반대로 귀연은 더없이 확신했고 더없이 흥분했다.
"솔직히 여기 있는 진법이 아니었으면 이 도사도 자신의 안내가 잘못된 게 아닌지 의심했을 겁니다."
"여기에 진법이 있다고?"
"네, 형님. 그것도 처음 보는 진법이에요. 구궁이나 팔괘는 물론이고 오행도 따르지 않았어요. 정말 대단한 진법이에요."
이어서 귀연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한가득 쏟아냈으나 일행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그저 진법을 느끼려고 애썼다.
그러나 중원에서 손꼽히는 고수들의 기감에도 진법의 존재는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
"생각 같아선 이 진법을 해체하고 싶은데."
귀연이 아쉬운 듯 입맛을 연신 다셨다.
"드나드는 길을 찾아내는 게 훨씬 빠르고 안전하니까 그렇게 할게요."
그때부터 일행은 순록을 죽여 가죽으로 천막을 치고 위를 비롯한 내장으론 물통을 만들었다. 고기는 당연히 훈연했고 피는 소금을 넣고 삶아 단단하게 굳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횃불도 잔뜩 준비했고, 장작도 모을 수 있을 만큼 모아놨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끝낸 일행은 그저 귀연이 길을 찾아내기만 기다렸다.
"찾았다."
꼬박 보름이 지나고서야 귀연이 진법에서 생문과 생로를 찾아냈다.
"정말 대단해요. 생문과 생로가 날짜에 따라 변하는데, 황제력보다 더 오랜 역법을 따르고 있어요."
"황제력보다 더 오랜 역법?"
"네. 사실 저도 배우면서 반신반의했는데 진짜 있네요."
'진시황 시절이면 주나라 역법을 쓸 때인데.'
그러나 구후영은 자신이 떠올린 작은 의문을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길을 찾았다는 말에 흥분한 사람들이 그간 준비한 물건들을 들고 당장에라도 진법에 뛰어들 태세였다.
"자, 이거로 왼쪽 손목을 다 함께 묶습니다."
귀연이 다섯 가지 색의 실을 엮어 만든 가늘고 긴 줄을 꺼내며 말했다. 그에 불쑥 예전 지하도시의 기억이 떠오른 구후영은 위종을 대열의 중간에 배치했다.
귀연이 가장 앞, 그 뒤엔 귀연을 끔찍이 아끼는 풍불지가 섰고, 그 뒤엔 실력이 뛰어나고 침착함도 남다른 홍기영이 섰다.
홍기영 뒤엔 청빈이 서고, 청빈 뒤에 위종이 서고, 위종 뒤엔 시종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옥무영이 섰다.
옥무영 뒤엔 악불형이, 악불형 뒤에 구후영이, 금강인을 얻어 웬만한 공격에 끄떡없는 원경이 가장 후미에 섰다.
그렇게 일행은 귀연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겨 진법 안으로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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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사가 해냈습니다."
열여섯이면 성인이고 장가갈 나이다. 그러나 귀연은 열여섯이 넘고도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했다.
그런 귀연의 으스댐 덕분에 진법을 통과하느라 곤두섰던 일행의 긴장감이 사르르 풀렸다.
"횃불 켭시다."
일행은 횃불 하나만 켰다.
"횃불은 빈도가 들겠습니다."
구후영 등은 작은 빛만 있어도 사물을 보는 데 지장이 없지만, 귀연과 청빈은 아니었다.
그래서 청빈이 횃불을 들고 귀연 곁에 섰다.
"지하인 거 같지?"
이들이 말하는 지하는 그저 땅 밑이 아니라 한참 깊은 땅 밑을 얘기하는 거였다.
"맞아요. 쭉 아래로 내려왔는데 아무도 몰랐어요?"
진법의 교란 때문에 아무도 자신이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음을 몰랐다.
"얼마나 깊은데?"
"칠십 장 정도요."
"그런데도 기운이 꽤 상쾌해."
지하도시의 경험이 있는 구후영이기에 남들이 소홀한 부분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우리의 추측이 진실에 가깝다는 증명이지."
가사 상태는 진짜 죽은 게 아니라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걸 말한다. 당연히 숨은 쉬어야 하고, 그러려면 맑은 기운이 계속 공급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곳에 진시황과 삼천 명의 동남동녀가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꽤 크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구후영과 내가 앞장서고 원경이 뒤를 받쳐."
풍불지가 말했다.
풍불지와 구후영은 경공이 뛰어나서 웬만한 위험은 피할 수 있다. 조금 뒤에서 따르는 원경은 상황을 봐서 몸으로 공격을 막아 뒤에 따르는 귀연 등을 보호해야 한다.
"홍기영과 무영은 세 사람을 보호하는 데 주력하고."
세 명은 길을 내고 세 명은 보호받고, 두 명은 보호하고.
유일하게 악불형만 역할이 없었는데, 이는 풍불지의 심술이었다. 사실 둘 다 술을 좋아하고 성격도 비슷해서 제일 친했었는데, 풍불지가 자기 경공을 가르치려 하자 악불형이 그런 잔재주는 무공을 익히는 데 방해된다며 거절해 앙금이 생겼다.
물론, 세월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면서 서로 이해하게 됐지만, 상대를 골탕 먹일 작은 기회라도 생기면 절대 놓치지 않는 둘이었다.
그러나 악불형도 곧장 자신의 역할을 찾게 됐다.
"저길 파괴하면 기관이 멈춰요."
일행 중 가장 깔끔하게 기관을 파괴할 수 있는 사람은 악불형이었다. 악불형은 힘을 일정 공간에 압축하면서 누구보다 군더더기 없는 파괴력을 보유했기에 귀연의 입맛에 가장 맞았다.
그에 풍불지가 입맛을 다시면서 암기를 소지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강호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풍불지는 암기술도 천하에서 열 손가락에 들 정도의 수준을 갖췄다.
다만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다음 굳이 암기를 쓸 필요를 느끼지 못해 몸에 지니고 다니지 않았다.
"생각보다 기관의 수준이 높지 않은 것 같구나."
만일에 대비해 파괴했다고는 하나, 기관의 수준이나 위력 모두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이 기관들은 우연히 들어온 짐승 정도를 상대하는 수준이에요."
풍불지의 말에 대답한 귀연이 잠깐 고민하고 말을 보탰다.
"사람은 바깥의 진법을 통과하기 어렵지만, 짐승은 아니거든요."
"짐승이 살 만한 곳이 아니던데?"
"그야 지금은 겨울이니까요. 여름이면 다를지도 몰라요."
입구는 아름드리나무가 즐비한 숲과 불과 십 리 정도만 떨어진 곳이다. 지금은 새 지저귀는 소리 하나 안 들리지만, 여름이면 온갖 짐승으로 붐빌지도 모른다.
"넌 어린데도 아는 게 참 많구나."
풍불지의 칭찬에 헤헤 웃던 귀연이었으나 곧바로 정색했다.
"기관이에요. 저기랑 저기랑 저기를 순서대로 부숴야 해요."
그렇게 일행은 수십 개 기관을 부수며 십 리가 넘은 길을 걸었다.
"진법이나 뭐 그런 건 아니지?"
엄청난 규모에 놀란 구후영이 귀연에게 질문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귀연으로선 차라리 진법 때문에 십 리가 넘게 걸은 것으로 착각하는 게 덜 무서운 일이었다.
"저기 뭐 보이는데?"
다행히, 일행이 일곱 번째 횃불을 밝힐 무렵 뭔가 거대한 윤곽이 어슴푸레하게 드러났다.
"저, 저건 마치."
평소 누구보다도 거침없던 풍불지가 말을 더듬었다.
"궁전 같은데요."
귀연이 흥분한 얼굴로 외쳤다.
"허!"
돌을 쌓아 만든 건지 깎아 만든 건지 모를 거대한 궁전이 일행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금성의 궁전들도 저것하고 비교하면 나무 장난감 같아.'
가까이 갈수록 점점 거대하게 느껴지는 웅위한 모습에 일행은 압도당하고 말았다.
- 작가의말
이 글의 계기가 영화 ‘서복’입니다. 사실 영화를 본 건 아니고, 어디선가 짧은 클립을 봤는데 유명한 배우들이 나오니까 자연스럽게 검색했습니다.
검색 결과 서복이 서불임을 알게 되었고, 당시 설정을 짜던 글과 결합해 지금 글이 되었습니다.
그 전만 해도 천마의 비급을 둔 난투극을 그리려 했었죠. 원래 설정에서 흑 장로는 비중이 큰 인물이었고, 백화궁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종필은 천하제일포두로 어마어마한 고수였습니다. 흑철 역시 교주 자리를 탐내 시종 주인공을 해코지하려는 절대적 고수였고 말이죠. 사대신협 역시 원래 비중이 큰 인물들이었으나 글의 방향을 급히 비틀면서 엑스트라로 전락했습니다.
지금은 방향을 튼 걸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다양한 인물을 깊이 있게 그리기엔 필력도 상상력도 여전히 많이 부족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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