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백계千方百計
초원의 아침은 차분하다.
먼저 검푸른 새벽이 고요히 등장하고, 새벽이 연하게 풀어질 무렵 동녘에 옅은 노을이 지며, 이윽고 옅어진 노을 사이로 해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침이 언제 어떻게 올지 모두가 알고, 초원은 그런 예상을 단 한 번도 배신하지 않았다.
"불이야!"
그러니 지금의 혼란은 어둑한 가운데 애꿎은 노을만 거칠게 불태우다가 사람들이 이제나저제나 할 때 불쑥 나타난 해가 새벽을 쓱쓱 지우는 산간의 아침과 같으리라.
"웬 소란입니까?"
"화재가 일었소."
화들짝 놀라며 깬 단아가 질문하고 밤새 불침번을 선 구후영이 답했다.
"화재요?"
단아는 간만의 깊은 잠으로 멍해진 머리를 힘껏 털어 정신을 추스른 다음 약 일 리 정도 거리에 있는 임시 마을을 바라봤다.
큰 불길이 세 개나 치솟고 있었다.
"다들 빨리 일어나요."
실수로 화재가 일 수도 있다. 불타서 가벼워진 말똥이 바람에 구르다가 공교롭게 천막이나 건초 더미를 태우는 건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니까.
그러나 세 개의 커다란 불길이 동시에 인 건 그저 우연으로 치부할 만한 사태가 절대 아니다.
"어서 말에 고삐를 씌워요."
단아의 호통에 모두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능숙지 않아 시간이 걸리는 안장은 생략하고 고삐만 씌운 채 말들을 끌고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원경을 실은 들것은 단아와 모용연이 들기로 했다.
"어디로 가야 하오?"
양손에 말고삐 하나씩 잡은 장선이 고개를 털어 잠을 쫓으며 질문했다. 마찬가지로 말 두 마리씩 맡은 양달과 야효 역시 단아의 지시만 기다렸다.
"저기 서북쪽의 숲으로 갑니다."
일행은 음식과 물을 대부분 버려둔 채 바로 움직였다. 급히 움직이느라 안장 씌우는 것조차 생략한 마당에 미련하게 음식을 일일이 챙길 순 없었다.
"그냥 우리 호들갑이었으면 좋겠소."
원경의 상세는 대백산을 떠날 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였다. 전혀 호전되지 않았지만, 딱히 악화한 기미도 없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사람 일이라, 구후영은 그저 아무런 방해도 안 받고 한시 급히 현월궁에 도착해서 원경을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저 화재가 우리와 무관하다면 좋겠지만."
단아가 작게 탄식했다. 마음이야 구후영과 똑같지만, 머리는 전혀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한 탓이었다.
"왠지 우리와 상관이 아주 클 것만 같습니다."
단아의 예언은 얼마 안 지나 현실이 되었다.
"저기."
채 단잠을 깨지도 못한 새벽에 갑자기 인 세 개의 거대한 불길로 난장판이 된 마을을 몇 필의 말이 달렸다.
불길에 놀라선지 아니면 말에 탄 기수의 채찍질 때문인지, 말들은 가슴 높이의 싸리나무로 세운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일행을 향해 질주했다.
"건주의 족장 같은데."
거리가 멀어 확신하긴 어렵지만, 차림새나 체형이 말을 공짜로 주고 천막도 내준 건주 부족의 족장과 흡사했다.
그때.
마을에서 날아온 몇 대의 화살 중 하나가 가장 뒤처진 자의 등을 맞췄다. 등에 화살을 맞은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낙마해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화살을 맞은 등도 등이지만, 낙마의 충격이 훨씬 큰 상해를 입힌 듯했다.
"내가 마중 가겠소."
구후영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안 됩니다.흑철의 존재를 망각하지 마세요."
그런 구후영을 단아가 단호한 얼굴로 제지했다. 그에 구후영이 심호흡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애써 달랬다.
'제길.'
구후영이 달려가서 화살을 막아준다면 덧없이 죽는 사람이 더는 없으리라.
그러나 이게 흑철이 꾸민 짓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현재 일행 중엔 구후영 빼고 흑철을 막을 만한 사람이 없다. 구후영이 자리를 비워선 안 된다.
"흑철이 상대라면 숲으로 가는 게 위험하지 않겠소?"
장선이 말했다.
"초원의 부족들이 우릴 노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으니깐요."
"초원의 부족이 왜?"
구후영은 저들에게 고독을 물리칠 처방을 내린 은인이다. 만에 하나 처방을 없던 거로 치더라도 초원의 부족들이 굳이 구후영을 죽일 이유는 없다.
"화산의 일을 공자 탓으로 돌릴지도 모르잖아요."
어차피 화산 기종이 조정에 밀고한 순간부터 구후영이 아니더라도 마교와 북원의 계획은 실패가 결정됐다.
그러나 이는 구후영의 태평한 생각일 뿐이고, 북원의 잔당이 이번 실패를 구후영 탓으로 귀결할 가능성도 꽤 크다.
"초원의 부족을 상대하기엔 숲이 최고죠."
구후영 일행이 북쪽의 초원으로 온 건 흑철 때문이었다.
구후영보다도 빠른 경공에 일격필살의 장법까지 갖춘 흑철을 경계해 숨을 곳이 많은 숲과 산을 기피해야 했다.
그런데 일행을 노리는 게 초원의 부족이라면 또 얘기가 다르다. 말을 잘 달리고 활을 잘 쏘는 초원의 무리를 상대하기엔 숲이 최적의 환경이다.
"단 소저는 이게 누구의 짓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시오."
장선이 잔뜩 굳은 얼굴로 질문했다.
비록 기습하고도 원경을 죽이지 못했고 구후영에게 팔 하나 잘리기까지 했지만, 흑갑호위를 상대하면서 보여준 경공과 장법은 간이 크다고 자부하는 장선한테도 두려움을 주기 충분했다.
그렇기에 장선은 내심 적이 초원의 부족이길 바랐다.
"제발 흑철이 아니길 바라야죠."
단아가 자신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둘이 동시에 우릴 노린다면.'
문득 든 생각에 구후영은 몸이 흠칫 떨렸다.
#
일행은 숲의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이제 확실해지겠군요."
무작정 언덕으로 달렸던 족장은 뒤늦게야 구후영 일행을 발견하고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마을에서 이백 명 규모의 말 탄 무리가 출발해 뒤쫓자 다시 방향을 틀어 서남쪽으로 달렸다.
"저들이 이쪽으로 향하면 숲에 들어가고, 아니면."
구후영이 하던 말을 멈추고 고민에 빠졌다.
저들이 노리는 게 구후영 일행이 아니라면 이대로 갈 길을 가야 할지 아니면 위험에 빠진 족장을 구해야 할지 쉽사리 결정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아니면 상황에 따라 움직이죠."
일행의 고민을 덜어주려는 듯, 이백 규모의 무리는 족장을 쫓는 대신 말머리를 비틀어 일행을 향해 달려왔다.
그에 단아가 탄식했다.
"참으로 성가시게 됐군요."
현월궁까지 대략 이천오백 리 거리다.
천리마가 하루에 육백 리 정도 달리고, 준마는 사백 리에서 오백 리 정도 달린다.
일행의 말은 체력이 좋기로 유명한 초원의 품종이다. 다리가 짧아 빨리 달리진 못하나 하루에 삼백 리는 너끈히 간다.
문제는 들것을 든 사람이 경공으로 달려야 한다는 건데, 모용연과 단아는 경공이 괜찮긴 하나 체력이 부족하고 장선과 양달은 경공이 평범하다. 구후영 역시 야효에게 맞춰야 해서 말보다 빠를 수 없다.
결국엔 하루 삼백 리가 최대치라는 거고, 이대로는 빨라야 아흐레고 늦으면 열흘 이상 걸리는 여정이란 뜻인데, 그 기간 내내 초원 부족의 공격을 감내해야 한다.
"그래도 흑철보단 낫지. 우리가 저들의 기척을 놓칠 염려는 없잖소."
장선이 말했다. 얼굴이 아까보단 밝은 게, 자신들을 노리는 적이 흑철이 아니란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진 듯했다.
"일단 보이는 적부터 해결해야죠. 숲으로 들어갑시다."
단아의 결정에 일행은 말을 끌고 숲으로 움직였다.
그때, 초원의 부족이 달리는 말 위에서 화살을 날렸다.
활이 좋은 건지 살이 가벼운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대부분 화살이 근처까지 날아왔다.
"내가 막겠소."
구후영이 땅을 박차고 몸을 허공에 띄운 다음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일행을 노리던 화살은 물론이고, 엉뚱한 곳으로 향하던 화살들도 구후영이 휘두른 검의 경력을 피해내지 못했다.
"허!"
백 발이 넘은 화살이 한꺼번에 부서지자 초원의 무리에서 커다란 경탄이 터졌다.
그러나 구후영은 자신이 휘두른 일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과했다.'
한 발도 빠뜨리지 말자는 마음으로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두른 덕분에 모든 화살을 막긴 했으나, 이건 그저 무식하게 힘을 쏟은 것뿐이었다.
결과만 보면 대단하나 무인으로선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모습이었다.
그때.
선두에 선 자의 휘파람 소리에 따라 초원의 무리가 속도를 늦췄다.
그러곤 전보다 더 정성을 들여 활을 쐈다.
잘 조준된 화살이 일행을 덮쳤다.
구후영은 다시 발을 굴러 몸을 날린 다음 온정신을 집중해 허공에 반듯한 선 하나 그었다.
'됐다.'
분명히 힘도 안 들이고 가볍게 그은 선인데, 새까맣게 쏟아지던 화살 중 단 하나도 선을 넘지 못했다.
'일지한매一枝寒梅.'
겨울의 끝자락에 고고하게 피는 꽃이 있다.
앙상한 가지에 망울을 터뜨리고 찬바람에 당당히 맞서는 건 이 꽃이 강한 힘을 품어서가 아니라, 북풍설한에도 굴하지 않는 오연한 기개와 지조를 품었기 때문이었다.
첫 휘두름에서 얻은 깨달음을 바로 실전에 적용한 구후영은 부지불식간에 떠오른 네 글자를 초식의 이름으로 정했다.
휘익!
두 번의 화살 공격이 허무하게 막히자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휘파람을 불어 일행을 멈춰 세웠다.
#
'제길.'
숲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던 흑철은 치미는 화를 억지로 눌렀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흑갑을 벗은 네 명의 흑갑호위를 해치운 다음, 흑철은 잠깐 갈등에 잠겼었다.
이대로 포기할지 아니면 계속 의뢰를 수행할지.
짧으나 치열한 갈등 끝에 흑철은 의뢰를 수행하기로 결심했다. 만 냥이나 되는 황금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과 의뢰를 반드시 완수한다는 철칙을 겉으로 내세우긴 했지만, 결국엔 참을 수 없는 질투심 때문이었다.
이립 정도 나이에 금강인을 얻은 소림의 천재와 천마의 제자로 알려진 약관의 천재.
굳이 의뢰가 아니어도 이 둘은 반드시 죽이고 싶었다.
마음을 정한 흑철은 희미한 자취를 따라 마을까지 쫓아왔고, 언덕 위에 천막을 친 일행을 발견했다.
그러나 밤새 눈을 부릅뜨고 경계를 서는 구후영 때문에 접근이 어려웠다.
그에 꾀를 내서 마을에 불을 냈다. 그것도 화석火石(백린)을 이용해 흑철이 떠나고 한참 뒤에 불길이 일도록 조절했다.
상식적으로 마을에 불을 낸 사람이 아무리 빠르게 달린다고 해도 안 들키고 숲에 먼저 도착할 가능성이 없다. 일행의 눈에 안 띄려면 멀리 북쪽의 숲을 따라 한참 에돌아야 하는데, 흑철보다 두 배는 빠르게 달려야 겨우 비슷하게 도착할 정도다.
흑철은 구후영 일행이 만일에 대비해 숲으로 대피할 거지만, 굳이 자신을 염두에 두진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초원의 부족이 구후영의 발목을 잡았다.
방심한 일행을 기습해서 구후영부터 죽인 다음, 나머지는 천천히 해치우려던 계획이 초장부터 어긋난 것이었다.
'물러날까?'
흑철은 의뢰를 수행할 때 늘 완벽한 계획을 세워뒀고,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진행하는 걸 즐겼다.
지금처럼 변수로 계획이 일그러질 경우 그대로 포기하고 새로운 기회를 노리는 게 원칙이었는데, 지금은 왠지 그러기 싫었다.
그때.
난데없는 바람이 흑철을 스치고 사라졌다.
동시에 면사를 쓴 여인이 양손을 연신 털어 수십 개의 암기를 쏘아냈다.
"흐억!"
영문 모를 안도감을 느끼며 괴이한 기합을 뱉어낸 흑철은 뛰어난 경공으로 자신을 노린 암기를 모조리 피해내곤 곧장 앞으로 신형을 날렸다.
- 작가의말
이번 편을 통해 왜 회귀한 주인공이 헌터 시험을 볼 때 다른 참가자들이 방해하지 못해 안달인지에 대한 개연성을 0.000001% 확보했습니다.
질투는 무엇보다 무서운 힘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초면에 겨우 F급인 주인공의 뭘 질투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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