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근지과無根之果
주육천장과酒肉穿腸過 불조심중유佛祖心中留
술과 고기는 장을 지나고 부처님은 내 마음에 남네.
세인약학아世人若學我 여동진마도如同進魔道
그러나 세상 사람이 따라 하면 그건 마도에 든 것이라네.
"어!"
늦지 않게 자신을 덮치는 회색 인영을 발견한 접객화상이 황급히 손을 휘둘렀으나, 헛손질에 불과했다.
다행히 회색 인영은 문호門戶가 훤히 열린 접객화상을 공격하는 대신 왼손에 잡은 천공교검을 탈취하는 데 그쳤다.
"놈!"
우레 같은 외침과 함께 본선이 벼락같은 기세로 갑자기 나타나 천공교검을 빼앗은 회색 인영을 덮쳤다.
조금 늦었지만, 구후영 역시 어마어마한 속도로 회색 인영을 향해 달렸다.
"역근!"
천공교검을 오른손에 잡은 회색 인영이 짧게 외치며 왼손 소매를 떨쳤다. 그에 수십 장의 종이가 소매에서 나와 허공에 흩뿌려졌다.
"멈춰!"
벼락같은 기세로 회색 인영을 덮치던 본선이 부드럽게 방향을 전환해 구후영의 앞을 막았다.
구후영은 뜻밖의 전개에 깜짝 놀랐으나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방향을 바꿔 연무장 밖으로 도주하는 회색 인영을 쫓았다.
"어서!"
짧게 외친 접객화상이 경공을 펼쳐 허공에 흩날리는 종이들을 회수했다.
"한 장도 빠뜨려선 안 된다."
제일 먼저 상황을 눈치챈 원호가 노끈을 끊고 경공을 펼쳐 달렸고, 원병을 비롯해 사건의 전말을 아는 수뇌부도 즉각 반응했다.
"저런!"
본선이 갑자기 사라졌다가 구후영에게 쫓기는 회색 인영 앞에 나타났다. 천하에서 경공이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진 신검에 못지않은 어마어마한 모습에 구경꾼들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수!"
구후영한테 거의 따라잡힐 위기에 본선한테 앞길마저 막히자 회색 인영이 이번엔 천공교검을 잡은 오른손을 떨쳤다.
마찬가지로 소매에서 종이들이 나왔는데, 아까보다 배는 많았다.
"멈춰!"
본선이 회색 인영을 무시하고 구후영의 앞을 막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구후영은 본선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어쩔 수 없이 자기 몸을 바닥에 던졌다.
쾅!
구후영의 몸이 바닥과 충돌하며 큰 소리를 냈다.
그러나 구후영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구도육좌九圖六坐.
소림의 제자 중에도 아는 사람이 드문 무공으로, 총 오십사 개 자세가 있다. 같은 자세를 여섯 시진 동안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고 버티면 대성한 거로 치는데, 오십사 개 모두 대성하면 천하에서 가장 빠른 경공이 된다는 말이 있다.
본선은 비록 구도육좌를 대성하지 못했으나, 사람들을 놀래기엔 충분했다.
"분신술?"
허공에 멈춘 본선의 몸에서 흐릿한 그림자가 연신 튀어나와 허공에 흩어진 종이를 회수했다.
"금강부동신?"
누구는 분신술로 오해하고 누구는 전설의 금강부동신으로 오해할 만큼 대단한 모습에 구후영마저 모든 걸 잊고 바닥에 누운 채 멍하니 구경했다.
"잡아!"
본선이 보여준 어마어마한 경공으로 멈췄던 연무장의 시간이 원율의 외침으로 다시 흘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계율원과 반야당 제자들이 원율의 뒤를 따라 어느새 자그맣게 보이는 회색 인영을 득달같이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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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럭!
순식간에 세수경을 회수한 본선이 허파를 토해낼 듯이 세차게 쿨럭였다. 그러나 방금 보여준 어마어마한 모습 때문에 누구도 다가가서 등 두드려줄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원호. 네가 마귀의 꾐에 넘어간 게 설마 이것 때문이냐?"
겨우 기침을 멈춘 본선이 방장을 추궁했다.
"송구하고 부끄럽습니다."
원호가 바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깟 신외지물에 홀려 본분을 잊다니."
말을 마친 본선이 가까이 다가온 접객화상에게 세수경이 적힌 종이들을 더러운 물건 버리듯이 던졌다.
"글을 읽어 마음을 닦듯이 무공을 익혀 몸을 닦는다. 불경을 읽고 무공을 익히는 것 모두 말末이고 부처께 다가가는 게 본本이다. 이번 일을 교훈으로 삼아 모두 본말도치의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 말기 바란다."
본선의 질타에 소림 스님 대부분이 고개를 숙였으나, 접객화상만은 숨이 콱 막히며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가 나서야겠다.
네?
연무장에 가서 두 아이를 직접 봐야겠다. 죽일 수 있다면 기습해서 해치우고 자결하는 거로 소림의 명예를 지킬 것이다.
부당한 말씀입니다.
고목은 장작만 되어도 감지덕진데, 천년 소림의 주춧돌이 된다면 부처님의 은총 아니겠느냐.
하지만, 원경은 금강인을 이룬 듯한데.
욕심이 눈을 가리면 끝나도 끝난 줄 모르게 된다. 둘을 제거하는 게 어렵다면 내가 나서서 사과하고 원호를 벌하는 거로 최대한 좋게 마무리해야지 않겠느냐. 대신 네게 부탁할 일이 하나 있다.
뭐든지 말씀하십시오.
네게 검을 주인한테 돌려주는 역할을 맡길 생각인데, 최대한 느리게 걸어라.
회상을 마친 접객화상은 겨우 숨이 트였으나, 참기 어려운 욕지기가 치밀었다.
'사조께선 이리될 줄 미리 알고 계셨어.'
일의 과정은 원하는 대로 된 게 단 하나도 없지만, 결과만 보면 성공이다.
"역근경과 세수경이 소림의 품에 돌아온 건 참으로 기꺼운 일이나, 그 과정이 참으로 부끄럽구나. 혹시, 구후 시주를 괴롭힌 것도 저자의 요구더냐?"
"그렇습니다. 혜가 조사의 주해본을 볼모로 삼아 무당과 싸우라 하였고, 구후 시주를 상해하라 하였습니다. 못난 제자는 역근경과 세수경을 얻은 다음 소림의 힘으로 모든 걸 돌려놓을 수 있다고 오판하여 이리도 못난 짓을 벌였습니다."
미리 말을 맞춘 듯한 둘의 대화에 접객화상은 끝내 못 참고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그 모습에 원병이 다가가 접객화상의 손에서 세수경이 적힌 종이들을 빼냈다.
"방장 자리와 더불어 원호의 승적도 박탈한다. 도둑맞은 소림의 물건을 찾는다는 핑계를 대기엔 네 행실이 도를 넘었다."
"벌을 달갑게 받겠습니다."
둘의 대화에 연무장이 시끌벅적해졌다. 무당이 장삼풍의 유작인 태극혜검을 얻은 거로 강호가 시끄러웠던 게 어제 같은데, 이번엔 소림이 분실했던 역근경과 세수경을 되찾았다.
이는 오늘 소림이 저지른 실책들이 모두 덮이고도 남을 정도의 묵직한 사건이다.
굳이 제갈공명 같은 지략가까지 갈 필요도 없이, 손가락셈만 할 줄 알면 이제 무당엔 아무런 기회도 남지 않았고 앞으로 백 년은 소림의 독주라는 계산을 마칠 수 있다.
'저 셋이 아쉽구나.'
원병의 기습을 버텨내고 백팔나한진을 깬 것으로 용이 되었는데, 소림이 역근경과 세수경을 찾은 탓에 날개가 꺾여 평생 승천이 어려운 모양새가 되었다.
사람들은 날아오르기도 전에 좌절한 세 신예에게 안타까운 눈빛을 던졌다.
'좆같구나.'
헛구역질 끝에 토해낸 쓴물을 소매로 닦은 접객화상은 눈가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나만 병신이지.'
원호가 잘못한 건 맞지만, 모든 게 소림을 위해서였다. 과정은 최악이나 결국엔 목적을 이뤘고, 목적을 이루자마자 순순히 벌을 받으며 모든 죄를 짊어지려 한다.
원병 역시 원호가 승적마저 박탈당하게 됐는데 만족스럽고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저리 모질지 못할 바엔 차라리 착하게나 살 것이지.'
원호나 원병은 목적을 이뤘다는 성취감에 취해 있는데, 함께 일의 중심에 섰던 자신은 정작 자괴감과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다.
접객화상이 감당하기 어려운 압박에 짓눌려 허덕이는 사이, 본선이 몸을 돌려 원경과 대화했다.
"처음 보는구나. 내가 네 사조다."
"반갑습니다."
원경이 합장례 대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너는 어찌할 생각이냐?"
"환속하고 싶습니다."
원경의 대답에 수뇌부 모두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세상이 이미 고해인데, 환속한다고 뭐가 달라지느냐?"
본선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여긴 불상만 있고 부처가 없습니다. 소림이 이미 세상인데 남는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원경의 단호한 거절에도 본선은 포기하지 않았다.
"네게 방장의 자리를 맡겨 소림을 추스르고 싶은데, 공유 그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재고해볼 수 없느냐?"
뜻밖의 제안에 소림의 스님들은 물론이고 구후영과 옥무영도 그만 굳어버렸다.
"사손은 술과 고기를 끊을 생각이 없습니다."
원경의 완곡한 거절에 본선이 껄껄 즐겁게 웃었다.
"송나라의 활불 제공濟公도 술과 고기를 즐겼으나 세인의 숭앙을 받는 스님이 되었지. 네 마음에 부처가 있다면 그저 장에 잠깐 머물렀다 떠나는 술과 고기가 무슨 문제겠느냐."
"원호의 마음에 부처가 있고 소림이 있는데, 굳이 방장 자리에서 쫓아내고 승적을 박탈할 이유가 있습니까?"
원경의 확고한 마음을 알아차린 본선이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꼭 절에서 하는 수행만 수행인 게 아니지. 몸이 어디 있고 무슨 일을 하든 마음에 부처가 있으면 그게 수행이다. 그래도 소림이 네 뿌리란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고, 종종 들러서 얼굴을 비췄으면 좋겠구나."
'왜 그리 당당한데?'
자괴감을 비롯한 여러 감정에 짓눌려 허덕이던 접객화상은 갑자기 커다란 반발심이 생겼다.
'너희는 뭐가 그리 당당하냐고.'
소림이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건들거리는 옥무영, 소림이 원하는 걸 모두 망치면서도 시종 담담한 구후영, 무려 방장의 자리도 거절한 채 꼭 환속하겠다는 원경.
'왜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거냐.'
계획대로 원경이 봉마림에서 죽고, 구후영이 원철의 손이나 백팔나한진에 죽었다면.
소림은 구설에 오를 수밖에 없다.
주해본이 소림에 돌아온 사실을 세인이 모르기 때문이다.
'소림의 승리인데.'
어찌 보면 차라리 지금이 낫다.
원철이 갓 약관에 이른 애송이한테 완패하고 백팔나한진이 파훼 당했을 뿐만 아니라 공유의 사부인 본선이 직접 나서서 구후영과 옥무영에게 사과하는 등 과정은 더없이 추악하나.
결과는 소림의 완승이다. 역근경과 세수경은 전혀 검증되지 않은 태극혜검과 파급력 자체가 다르다.
"사제, 사람이면 은혜를 알아야 하오."
콕 집어 뭐라 말할 수 없는 반항심으로, 접객화상이 갑자기 나섰다.
"은혜보다는 염치를 아는 게 우선 아니오?"
"원경. 넌 갓난아기 때 팔다리가 부러지고 내장이 상한 채로 소림의 산문 앞에 버려졌다. 목숨이 위태한 널 원호 사형이 진원을 상해가며 치료했다."
접객화상의 발언에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사실이오?"
원경이 믿기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 원호한테 질문했다.
"그런 일은 있으나, 그게 넌지는 나도 몰랐구나."
"그때 사형은 보리심공菩提心功을 대성하기 직전이었다. 너를 구하느라 진원을 소모하면서 파공破功한 바람에 더는 상승의 심법을 익힐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심호흡으로 격동한 마음을 다잡은 원경이 원호한테 다시 질문했다.
"왜 그러셨소?"
"그냥."
원호가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땐 그러고 싶었다. 오늘은 이러고 싶었고. 오늘은 틀렸으나 그땐 맞았던 거지."
원경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들이 빠르게 스쳐 갔다.
"네가 내게 감정이 안 좋은 건 안다. 그러나 난 이젠 방장도 아니고 소림의 스님도 아니다. 네가 남아서 소림을 바르고 곧게 세우면 떠나는 나도 마음이 편할 것 같구나."
시종 대쪽 같던 원경이 입술을 떨며 대답을 망설였다.
- 작가의말
무근지수 -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무근지수 혹은 무근수라고 합니다. 무근지과는 무근지수의 변형이며, 현실에선 묵은지에만 집착하는 사람을 분류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아쉽지만, 본선은 실력도 심성도 소지승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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