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장풍운山庄風雲
연緣은 묘하고도 묘해 말로 형용하기 어렵다.
수천 리 떨어진 남녀가 청실홍실로 이어져 부부의 연을 맺는가 하면, 부자나 형제도 연줄이 너무 얇아 서로 얼굴 한 번 못 보는 일이 있다.
그렇게 끈끈해서 죽고 못 살 것처럼 보이던 자들도 연줄이 닳아 사라지면 스쳐 지나갈 때도 서로 눈길 한 번 마주치지 못한다.
미련한 자들 눈엔 그저 우연으로 보이나 하늘의 이치를 통달한 자의 눈엔 모두 필연이니, 연이라 함은 부처도 뭔지 모른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고 한다.
하하. 하하.
구후영의 내공이 잔뜩 실린 웃음소리에 의사당이 부르르 떨렸다. 여차하면 구후영을 제압하려고 내공을 끌어올렸던 사내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소협은 어이하여 웃는 것이오?"
참을성이 제일 부족한 장선이 질문했다.
"내가 진짜 구후영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그러나 철추당의 부당주가 가짜고 저 넷도 그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음은 다들 속으로 알지 않습니까? 형님, 형님의 이야기를 이들에게 들려주십시오."
청빈은 그날 홍엽산장에서 겪었던 일을 소상히 얘기했고, 구후영이 하오문을 통해 들은 사실들도 차분하게 서술했다.
"진짜라면 굳이 구후영이란 이름에 이리 반응할 이유가 뭐겠습니까. 내가 우연히 구후영이란 이름을 쓰게 됐는지, 아니면 어떠한 연유가 있는지 궁금하니까 내 동생을 납치해서 날 불러낸 거 아니겠습니까."
구후영의 말에 네 대주가 고개를 더 푹 숙였다.
"자, 기왕 일이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떻습니까? 도대체 내 동생을 어찌했습니까? 어차피 당신들은 오늘 죽을 목숨이고, 당신들이 지키려는 자도 가짜임이 이미 밝혀져서 쏟뜨린 물이 됐습니다."
아까 담담했던 건 다른 사람이었다는 듯이, 구후영이 격동한 얼굴로 네 대주를 매섭게 몰아붙였다.
"아까 말한 게 진실이오. 우리가 어찌한 건 아니고, 밧줄이 잘리고 사람은 사라졌소. 우리가 사흘 동안 살폈지만, 그대도 그대 동생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소."
그때 장선이 버럭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솔직하게 얘기해. 이 소협이 진짜면 그 아이도."
급한 마음에 속의 말을 끄집어냈던 장선이 아차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사고를 친 네 제자가 밉긴 하나 그래도 이십 년 넘게 봐온 정이 있어 어떻게든 목숨만은 살리려는 생각인데, 만약 구후가의 핏줄인지도 모르는 소년을 죽였다면 절대 명줄을 부지하지 못한다.
대부인이 넓은 마음으로 용서한다고 쳐도 홍엽산장을 떠나는 즉시 뭇매에 당해 처참하게 맞아 죽을 거다.
"됐다. 선아, 그만하거라."
대부인이 이미 결정을 내린 걸 경험으로 아는 장선은 속으로 피눈물을 삼켰다.
"배후가 누군지 말하거라. 그러면 이대로 너희를 보내주마."
제자들이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해 속으로 울던 장선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이놈들아. 대부인께서 이리도 아량을 베푸시는데, 너희가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 아니라면 어서 실토하여라."
"저희는."
그때, 슉 소리와 함께 수십 개 암기가 날아왔다.
구후영은 급히 검을 뽑아 청빈의 앞을 막았고, 배월교주는 온휴를 보호했다. 장선과 사내는 경공으로 대부인 앞을 몸으로 막은 채 날아오는 암기를 손등으로 일일이 쳐냈다.
'암기가 가볍다.'
검으로 암기를 쳐낸 구후영이 이마를 찌푸렸다. 한꺼번에 수십 개 암기가 날아오자 놀라서 청빈의 앞을 막았는데, 이렇게 약한 힘이면 내공이 깊지 않은 청빈도 여유롭게 쳐낼 수 있다.
"큭!"
혈도를 짚인 네 대주와 복장표국 측 증인들이 짧은 비명을 끝으로 모조리 암기에 죽었다. 아무리 요해를 맞혀도 잠깐 숨 쉴 여유는 있는 게 암긴데, 극독을 묻혔는지 당한 사람 모두가 즉사했다.
"넌 대부인을 지켜라."
제자들의 죽음을 확인한 장선이 이를 악물며 창호지에 수십 개 구멍이 난 문을 향해 주저 없이 몸을 날렸다.
"형님은 여기 계십시오."
구후영도 검을 손에 든 채 박차고 나갔다.
둘이 뛰쳐나가고 의사당엔 다섯 명만 남았다. 사내는 귀에 내공을 집중해 밖의 기척을 듣는 동시에, 눈으로 배월교주와 청빈을 경계했다.
그렇게 의사당에 어색한 기운이 맴돌 때.
"영이 있는 곳으로 간다."
이마를 찌푸리고 고민하던 대부인이 말했다.
"여기 안전하게 있는 게 좋겠습니다. 거긴 장 사형이 돌아온 다음에 가보는 게 어떻습니까?"
사내가 극구 말렸다.
"아니다. 영이 살아 있는지 꼭 확인하고 싶구나."
사내는 대부인의 고집을 꺾을 자신이 없었다.
"세 분도 함께 움직이는 게 좋겠소."
"소녀가 앞장서겠습니다."
배월교주가 앞에 서고 사내와 대부인이 가운데, 청빈과 온휴가 후미를 차지했다.
"헉."
조심스럽게 움직여 의사당 밖으로 나간 일행은 장선이 데리고 온 친위대가 전부 얼굴이 시커메서 죽어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강호에 이만한 암기술을 펼칠 고수가 누구 있지?"
일행이 들은 암기 던지는 소리는 단 한 번이었다. 즉, 여덟 명의 친위대와 철추당의 네 대주 그리고 여섯 증인을 한 번의 출수로 모두 죽였다는 뜻이다.
여덟 친위대는 구후영의 웃음소리에 놀라 경각심을 한껏 끌어올렸고, 안에 죽은 사람들은 비록 혈도가 짚여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의사당 밖에선 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단순히 숨소리로 이들의 위치를 판단해 암기로 죽였다는 말이 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강호에 이만큼 대단한 암기술과 소리만으로 위치를 정확히 판단하는 어마어마한 재주를 동시에 품은 자가 없다.
"일단 저쪽으로 가자."
대부인의 말에 일행은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다섯은 산책하는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 철추당 부당주 구후영의 집 앞에 도착했다.
"소녀가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대부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배월교주가 몸을 날려 창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안에 아무런 기척도 없자 대부인이 한숨을 푹 쉬었다.
잠시 후, 배월교주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편히 죽었소?"
"장법에 머리를 맞아 고통 없이 죽었습니다."
"직접 보고 싶구려."
대부인은 사내의 경호를 받으며 안에 들어갔다. 커다란 덩치의 구후영이 칠공으로 피를 흘린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대부인은 천천히 다가가서 떨리는 손으로 죽은 구후영의 머리와 얼굴을 연신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는 사이 남은 사람은 방안을 살펴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소녀가 주제넘게 한 번 나서보겠습니다."
미리 살핀 배월교주가 입을 열었다.
"흉수는 먼저 독 묻은 암기로 암습했습니다. 그런데 부당주가 기습에 당하지 않았네요."
"칠사보의七絲寶衣를 늘 입고 있다네."
칠사보의는 금실, 은실, 동실을 비롯해 일곱 가지 실로 뜬 일곱 겹의 옷이다. 잘 만든 칠사보의는 도검과 암기는 물론이고, 내가중수법의 위력도 어느 정도 줄여준다.
"그렇군요. 장법을 쓰는 자들은 보통 머리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회피하기 어려운 가슴이나 배를 공격하는 초식이 주류를 이루죠. 아무래도 칠사보의 때문에 머리를 공격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론이 뭐요?"
사내가 질문했다.
"암기술과 비교해 내공이 그리 뛰어나지 않습니다. 소리를 듣고 사람 위치를 확신할 정도의 고수라면 칠사보의를 피해 머리를 공격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건 모순입니다."
"같은 사람 소행이 아닐 수도 있잖소?"
사내가 배월교주의 추론에 반박했다.
"같은 암기입니다. 모양도 같고, 바른 독도 똑같습니다."
사내가 바닥에서 암기를 주워 코에 댔다. 비릿한 냄새가 네 대주와 증인들을 죽인 암기에 바른 독과 같았다.
"수련자가 열이면 독과 암기도 열입니다."
같은 독을 수련해도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고, 암기 역시 살상력을 최대화하기 위해 손가락 힘이나 여러 신체 조건에 근거해 맞춤 제작한다. 두 사람의 소행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극히 미약하다.
"그렇다면?"
"홍엽산장을 잘 아는 자고, 의사당 안에 사람들 위치를 아는 자입니다."
배월교주의 말에 대부인을 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친위대!"
청빈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
"친위대면 안에 누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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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이 급히 돌아갔더니, 의사당 문 앞엔 일곱 구의 시체만 있었다.
"비수가 턱밑까지 왔구나."
사내가 탄식했다. 그렇게 조심하고 경계했는데, 놈들의 마수가 장선의 친위대까지 뻗어 있었다.
"체온으로 판단컨대 부당주가 죽은 건 대략 삼 각 전입니다. 얼추 저와 장 당주가 대결할 즈음의 일이겠군요."
그때 장선이 돌아왔다. 장선 정도의 고수가 경공 좀 펼쳤다고 지칠 리는 없으니, 지금 숨이 거친 건 화가 잔뜩 치밀어서 그런 게 분명했다.
"놓쳤습니다. 분명히 기척을 들었는데 어느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사내가 장선의 팔을 쿡쿡 찔렀다.
"사형. 바닥에 시체 좀 봐."
장선은 눈치로 뭔가 잘못됐음을 파악하고 시체들을 살폈다. 그러다 시체 한 구가 사라진 걸 발견하고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상황 판단을 끝낸 장선이 바로 대부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온휴는 홍엽산장이 양양과 호북 무림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소문으로 들었지만, 철추당의 당주가 이리 쉽게 무릎을 꿇을 줄은 몰라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언제부터 데리고 있던 자냐?"
장선은 시체들 얼굴을 보며 사라진 자가 누군지 확인한 후 이마를 찌푸리고 고민했다.
"절 따른 지 삼 년 정도 됩니다. 금검당 부당주 육비나타六譬哪吒가 추천했습니다."
육비나타는 암기술의 고수다. 독이나 암기는 비열하다고 생각하는 철혈방에서 금검당의 부당주 자리까지 갔다는 점이 육비나타의 암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반증한다.
"이제야 놈들의 꼬리를 잡았다만, 대가가 너무 크구나."
대부인이 한탄하자 장선은 이 모든 게 자기 잘못인 것 같아 고개가 더 숙어졌다.
"장 대협. 제 동생은요?"
청빈은 한참이나 기다려도 구후영이 나타나지 않자 걱정이 치밀었다.
"나도 모르겠소. 내 뒤를 따르는 것 같던데 어느 순간 기척이 사라졌소."
장선이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때. 어마어마하게 큰 소리가 홍엽산장을 흔들었다.
"구후 소협입니다. 온 표국주께선 연무장으로 가서 도우러 온 사람들을 안정시키십시오."
말을 마친 배월교주가 경공을 펼쳐 사라졌다.
'날 상대할 때 일부러 봐준 거구나.'
배월교주의 경공을 본 장선의 등허리가 순식간에 땀으로 젖었다. 대결할 때 방금 펼친 경공만큼 빠르게 움직였다면 채 스무 합도 겨루기 전에 장선이 패배했다.
'이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걸 보니 장선 너도 이젠 퇴물이구나.'
상대가 체면을 봐줘서 다행이라고 여기다가, 자신이 예전 같지 않음을 떠올린 장선이 깊이 탄식했다.
"저도 가보겠습니다."
청빈도 대부인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하고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빠르진 않으나 담장을 밟고 평지처럼 달리는 청빈의 모습에 모두 속으로 감탄했다.
"조카도 저쪽으로 가봐."
대부인이 사내에게 말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난 온 표국주랑 선이와 함께 연무장에 가서 사람들을 안정시키겠다. 놈들이 어디까지 준비했는지 모르지만, 난 오늘 끝까지 가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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